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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삶, 천상병 시인과 국가보안법

풍월 사선암 2006. 5. 10. 10:47

[같은 詩 다른 노래] 귀천(歸天) - 詩 : 천상병, 노래 : 홍순관, 김원중, 이동원, 오현명,
박흥우, 서울 바로크 싱어즈


천상병 시인의 삶


- 김준태 시인의 <사랑의 확인> 중에서

『귀천』의 시인 천상병(1930~1993)은 술을 너무 좋아해 술을 친구 삼고, 세속의 관행을 무시한 기이한 행동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이 세상, 우리 세대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천상병의 고향은 마산시 진동면이다.고향의 생가는 오랜 세월의 탓인지 허물어지고 없으나  천상병이 상상의 나래를 한 껏 펼친 던 상북초등학교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도시 외곽에 있으면서도 전교생이 52명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시골학교의 정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상병은 생전에 고향마을 정자 밑에 냇물이 흐르고, 거기서 멱감고 가재 잡던 이야기며, 또 7살 때 산에 갔다가 밭을 헛디뎌 벼랑으로 굴러 '이젠 죽었구나'하는데 다음 순간 몸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느 이야기 등 고향에 대한 추억담을 털어 놓곤 했다. 


일제시대에 가족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해방 후 귀국한 천상병은 마산에서 생활했다. 마산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내내 책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다. 가난 때문에 책을 사볼 수 없었던 천상병은 학교와 집 중간에 있었던 서점에 매일같이 들러 책을 보고, 다 못 보면 페이지를 접어 두었다가 다음날 와서 계속 읽곤했다. 가끔은 서점주인이 책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천상병은 이를 평생동안 고마워 했다.


천상병은 마산중학교 시절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끔 시를 지어 김춘수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마산고교 뒷산에 올라 지은 시 『강물』도 김춘수가 『문예』지에 근무하던 유치환에게 보내 추천됐다. 


그는 술을 좋아해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대학시절 소설가 한무숙의 집에 식객으로 있을 시절, 어느날 잠도 안 오고 술생각이 간절해 낮에 얼핏 본 안방 화장대 위의 양주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두가 잠든 사이 안방에 숨어들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양주병을 들고 나와 단숨에 들이키고 보니 향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천상병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한때 행방불명되어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문우들은 80여 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내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유고 시집이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1993년 4월 28일 그는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소설가 천승세의 말처럼 평생 평화만을 쪼던 새가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시집 『새』,『귀천』,『주막에서』 등과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남겼다


"쌀 한되 값 없던 때도 행복"


한해를 뒤둘아보는 세모의 달이다. 이루지 못한 일들, 후회와 미련이 쌓여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일기도 하는 시기이다. 이런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게 무엇일까.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일 아니랴. 고슴도치들이 추운 겨울밤을 보낼 때, 상대방의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이 가는 법을 배우듯 우리도 체온이 감도는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어야 할 때다.


용서와 사랑. 입에 담아 표현하기는 쉬워도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게 바로 이것 아니랴. 내게 상처를 남겨주고 간 타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우리가 용서하는 일도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기독교의 주기도문에서도 이 '용서'를 아주 중시하여 "내게 죄지은 자를 내가 용서하여 주듯이 (주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시며"라고 간구하지 않던가.


이렇게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죄>만 용서해 달라고 빌 줄 알았지 그 전제 조건인 <남의 죄를 내가 용서하는 것>에는 소흘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시기도 지금이 가장 알맞은 시기일 것 같다.


맨 손바닥 하나 내보이며 다정한 친구들에게 천원, 이천원씩 술 값 적선은 받았어도 늘 재벌 못지않게 여유를 갖고 호기를 부렸던 시인, 천상병. 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던 그에게도 두가지 간절한 소원은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밤이 되면 찾아들어가 눈을 붙일 방 하나요, 또하나는 사랑스런 자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종로에서 탄생한 천재시인 이상이 명동에서 깡패들과 맞서 호통을 쳤듯 천상병도 한번은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큰 소란에 휘말릴 뻔했다. 제주도 출신의 쌍과부가 운영하는 술집 '추자네 집'에서였다. 어깨가 떡 벌어진 주먹패가 천상병에게 시비를 걸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꺼져, 이 자식아!"하고 소리쳤던 것, 그렇게 호기를 부리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천상병이 어느날 이 쌍과부집 아들 비룡이를 보고 수작을 건넸다.


마침 손님 한명 없이 어린 비룡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장면을 대하자 그는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가며 세뇌를 시켰던 것이다.


"자, 내 말을 따라서 해 봐. 나의 아버지는 천상병이다. 나는 천상병씨의 아들이다." 아이스크림 맛에 홀린 이 아이가 어느정도 세뇌되어 있는 꼴을 뒤늦게 들어온 과부가 보고 질겁을 했다. 그 뒤로 아이에게 어떻게 새뇌를 했는지 다음에 천상병이 들어섰을 땐 비룡이가 그 얼굴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천상병은 X새끼다."


그렇게 X새끼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를 소망했던 그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당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끌려들어가 호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길로 그는 종로구 관철동등 그의 주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종적이 묘연해지자 주위 친지들은 그가 추운 날 어느 길목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시인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이 힘을 모아 1971년 12월 그의 유고시집 <새>를 펴냈다. 이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자 출판사 측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죽었다던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소변도 제대로 못가려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될 만큼 폐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추운 겨울 날 그는 길거리에 쓰러져 얼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그를 보호하여 행려병자로 취급, 정신병원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어린애처럼 순수한 시인을 살리고자 하셨던 걸까. 마침 이 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감종해박사가 천상병을 알아봤다.


문인들을 좋아하여서 두루 가깝게 사귀고 자신의 문집도 한권 펴낸 적이 있는 김박사는 천상병을 보호하여 묵묵히 치료하고 있다가 그의 유고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천상병에게 있어 수호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목순옥과의 인연은 이 병원에서 깊어졌다.


천상병의 친구 여동생이기도 했던 목순옥은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겨 죽은 사람으로까지 인정했던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통조림 몇 통을 사들고 응암동 시립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김박사는 그녀의 오빠 순복이 큰형님으로 불렀던 박종우 선생의 부산고교 제자였고 또 천상병, 목순옥과 친했던 화가 하인두의 고교동창이기도 해서 전에부터 두 사람은 친히 알고 지냈던 사이었다.


이때 나온 천상병의 병명은 '신경황폐증',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아 기계가 멈춰 서듯 정신마저 황폐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에게 병문안을 다니는 횟수가 늘자 천상병은 유난히 목순옥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스 목, 언제 또 올래? 팥빵이 먹고 싶다." 이렇게 의지하는 그를 내칠 수 없어 마침내 두 사람은 서울 변두리 수락산 기슭에 사글세 방을 하나 얻고 김동리 선생 주례로 72년 5월 14일 결혼식도 올렸다. 그때가 천상병은 43살의 노총각이었고, 목순옥은 36살의 노처녀였다.


<결혼 후 남편을 대하는 내 마음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이었다. 병원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생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내 덕분에 천상병은 천원권 적선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됐으나 그런 만큼 아내의 두 어깨는 더욱더 무거웠다. 결혼 초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곁에서 돌보기 위해 병풍 자수를 집에서 놓아 번 돈으로 쌀 한말 연탄 열장씩을 사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친구 언니의 지원으로 1977년 청계천 8가에서 친구와 함께 고가구점을 경영했으나 계속되는 경영난과 비싼 이자 부담 때문에 결국 고생만 하고 문을 닫았다.


그 3년동안 쌀 한되를 살 돈이 없어 눈물을 삼킨 적도 많았으나 그들은 행복했다. 그런 때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시인 강태열이 "천 형, 막걸리 값이나 하면서 돈은 천천히 갚으라"고 선뜻 3백만원을 빌려주며 지금의 가게 '귀천'을 추천했다.  


그 온정 덕분에 목순옥은 천상병의 '수호 천사'로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병, 담배 한갑이면 천하에 부러울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부칠 방까지 해결되고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 60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 걱정할 거 없네 / 그러면 어쩌지요? / 될대로 될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 그 조무래기가 무얼 알까마는 /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


<간의 반란>이란 시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계속된 음주로 해서 간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마침내 그는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나갔다.


늦게서야 결혼했지만 22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날마다 머리를 매만져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아내 목순옥. 예쁜 여자만 보면 어린애처럼 "내 애인"이라는데도 질투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


급성 간경화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를 친구가 후원해 주는 춘천의료원에 입원시킨 뒤 춘천에서 서울로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간병에 매달렸던 그녀는 이제 천상병 기념관을 가꾸고 지키는걸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간다.


또 기일이 되면 버스를 전세내어 의정부 송산시립묘지까지 가서 추모행사를 벌이고, 상경해서는 종로 인사동 골목의 '천상병 기념관'에서 해마다 추모 세미나도 연다.


천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은 오래 전에 예행 연습이 끝난 죽음이었다.그가 처음 세상을 떠난 것은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끌고 갔을 때였다. 그는 거기서 물 고문,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전기 고문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천상병은 여섯 달을 갇혀 있다가 풀려 났다. 자백을 강요 받았으나 친구가 여럿 있다는 사실 말고는 자백할 것이 없었다. 이 때의 전기 고문으로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930년 일본 땅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 가족을 따라 귀국하여 마산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아직 학생이었던 1949년 월간잡지 [문예]에 그의 첫 작품 "강물"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잠시 부산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는 한편으로 문학 평론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평론 활동도 그의 작가로서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 번 "죽음"을 맞게 된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으로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 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여러 차례의 죽음으로 점철된 것이 천상병 시인의 생애라면, 그의 삶은 또한 여러 겹의 부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있다는, 서울의 청량리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왔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시인이었다는 사실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기억이 그의 생명의 끈이었는지 모를 일이다.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대학 때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이 도움이 되며 모든 것이 잘 되면 한두 달 뒤에 퇴원할 수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목순옥은 오빠의 친구를 매일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화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고 어린애처럼 약했다. 천상병과 목순옥은 1972년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의 결혼 생활은 때로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20년간 계속 되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그냥 아무나 믿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는 그의 성품으로는 이 신혼부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목순옥은 서울 인사동 골목에 작은 찻집을 열었고,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단골 손님이 되었다. 천상병 초기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이 찻집의 옥호를 귀천(歸天)이라고 불렀다.  이들 부부는 서울 북쪽 교외로 나가 의정부에 있는 낡은 가옥의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술에 곯은 시인의 간장이 성할 리가 없었다. 1988년 목순옥은 의사로부터 남편의 시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결코 회복할 가망이 없으니 불가피한 임종에 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춘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의 친구가 그들을 돕기로 했다. 천상병은 곧 입원했고 목순옥은 그 뒤 여러 달 동안 버스를 타고 춘천까지 달려가 매일 저녁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매일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적고 있다.


"하느님! 아직은 안됩니다. 그에게 오 년만 더 주십시오. 제발 빕니다. 오 년만 더요."


놀랍게도 그는 원기를 되찾았고 그 뒤 퇴원하여 그럭저럭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년 동안이었다. 이 유예의 기간 중에 그의 새로운 시집들과 에세이집들이 출간되었고, 1993년 월 28일 그는 마지막 귀천 길에 올랐다. 이제 인사동 찻집 문을 열어도 사람들은 늘 그가 앉던 자리에서 들려오던 시인의 꺼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열 다섯 명만 들어와도 ?慤榻? 그곳이 만원일 때에도 그는 말했다.


"어서 와요,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요!"


천상병은 되살아나서 자신의 유고 시집의 출판을 목격하는 진귀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첫 유고 시집 이후에 몇 권의 시집을 더 출판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유고 시집, 이번에는 진짜인 유고 시집이 간행된 것은 1993년이었다.


- 한국문학 영역 총서2 천상병 "귀천" 중에서


천상병 그는 나이 마흔둘이 되도록까지 결혼도 하지않고 또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인생활을 했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으로 살았다.


호주머니에 돈 한푼이 없어도 걱정을 하지않고 그저 만나는 선배나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요새돈으로 돈백원 얻으면 그것으로 넉넉하게 생각한 사람. 그런 그가 바로 천상병이다. 좋다,좋다,참좋다 를 연발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라고 예쁜아내와 후덕한 장모님과 반갑의 담배, 한병의 맥주가 있는데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고 . . .  


그는 소풍가듯 하늘나라로 갔다. 저승가는데도 차비가 필요하다면 차비가 없어 저승도 못 가겠다고 걱정하던 그사람  이 세상 소풍 오듯 왔다가 소풍가듯 저 세상으로 떠난사람  평생을 가난했던 시인 그저 막걸리 한잔이면 인생의 자족을 알았던 시인 그는 진실로 天上의 시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속세에 전혀 물들지 않은 천상의 순수시인 천상병이 가을을 보내며 노래한 '들국화' 일부다.


산등성 외딴 곳 애기 들국화 빛깔과 파란 가을 하늘의 겹침을 보며 때묻지 않은 만남을 소망했다. 그만큼 가을은 번잡한 일상 속에 잊어버린 우리 마음을 찾아나서기에 좋은 계절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歸天)' 단 한번 부산직할시 김현옥 시장의 공보실에 출근한 적이 있는 이 평생 무직의 시인 천상병 (千祥炳.1930~1993) 은 그 하루하루의 전설이 시를 압도하고 말았다.


천상병..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순수한 어린이었다..


이 시 `귀 천`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라는 시구는 감히 누구도 쉽게 적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늙고, 초라한.. 하지만..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천사.. 어찌 보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박하고, 깨끗치 못한 이 세상에 힘이 되어주라고 하늘에서 보낸 아기 천사 일런지도......


천재 천상병. 세상은, 세상의 악마들은 그를 짖밟고 짖밟고 짖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천진한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늘로 돌아가신 천상병님.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 소풍은 아름다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인, 마지막 떠돌이 천상병 시인, 폐품이 된 몸을 지탱하며, 뒤틀린 세상을 향해 막걸리를 뿌리며 퍼붓는 독설과 사랑과 눈물의 결정체가 내림 소주처럼 걸러져 맑게 빛나는 시로 순수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그저 맑은 순수시처럼 보이는 천상병 시인의 시에는 적당한 알콜도수가 감춰져 있어서무심코 읽는 순수한 독자들을 취하게 한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천상병 시인은 지금, 여기 지상에는 없다. 어린애나 다름없게스리 천진무 구하게 살았고 또 순결무구한 시들만을 즐겨 썼던 그는, <귀천> 이란 시가 소원했듯이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긴 여행이 아닌 인생이란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서 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지 모른다. 살아 생전 그는 가난했다. 친지들한테는 '내미는 빈 손'밖에 없었다.그것 도 큰 손이 아닌, 막걸리 몇 잔 정도일 뿐인 '작은 빈 손'만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여 지식인 계층에 속했으나 그의 몸과 시 세계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선 잔재주나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적 테크닉은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그의 시는 공자님이 말씀한 '사무사(思無邪 사악함이 없는)' 바로 그 길목 가운데에 놓인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돈이 없어 저승도 못 가겠네"라고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 그의 시에는 정녕 꾸밈이 없다. 그의 마음(혹은 詩心)또한 꾸밈이 없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것만큼, 생각하는 대로 만큼 그대로 씌여졌을 뿐이다.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시작되는 <귀천>이란 시는 그래서 쉽게(아, '쉽 다'란 말은 사실 얼마나 어려운 말린가!)씌어졌고 감동의 폭이 넓을 수밖 에 없다. 서울 인사동 골목을 가면, 시방 그의 아내가 찻집 '귀천'을 문 열어 놓고 있다. 하늘로 간 남편이 별 밝은 밤 더러는 종종 찾아 내려올지 몰라 서......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으로의 '귀천') 천상병 시인과 국가보안법 - 정해랑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입니다. 귀천이라고 하면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이니 죽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죽음을 말하면 당연히 음울한 분위기여야 할 터인데 이 시에서는 죽음을 소풍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주 쉽고 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이를 두고 자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심이든, 삶과 죽음에 대한 달관이든 아무튼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대단한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천상병 시인이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고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소풍 같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천상병 시인은 남달리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말년의 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처절했던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의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천상병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내 육십 년을 돌아보면 나도 별나게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왔다. 이십대에 문인이 되어 음악을 논하고 문학을 논하며 많은 술도 마셨다. 그로 인하여 몇 번의 병원 신세도 졌다. 그리고 다정한 친구로 인해 동백림 사건에 걸려들어 심한 전기 고문을 세 번 받았고 그로 인해 정신병원에도 갔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의 좋은 아내를 얻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천상병 시인이 쓴 ‘외할머니와 손잡고 걷던 바닷가’라는 글에 나오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회고입니다. 이 분이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1967년 7월에 발표된 이 사건은 화가 이응로, 작곡가 윤이상, 그리고 몇몇 서독(이때는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때입니다.)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당시 중앙정보부(뒤의 안전기획부, 그리고 오늘의 국가정보원)에서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했던 사건입니다. 그래서 국가정보원에서도 이 사건을 자체적으로 진상을 조사해서 규명해야 할 대상으로 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이 사건에서 동베를린을 방문했었던 대학 친구인 강빈구로부터 평소 막걸리값 5백 원, 1천 원씩 받아썼는데, 그것을 두고 ‘간첩에게 포섭된 인사’로 꾸며진 것입니다. 간첩이 아닌 것은 물론이려니와,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설사 동베를린에 갔다 왔다고 해서 전기고문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잘못을 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아이를 낳지 못할 정도로 전기 고문을 한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고작 친구가 동베를린에 갔다 온 친구한테 막걸리값 좀 얻어 먹었다는 이유로, 그가 동베를린에 갔다 왔다는 정도만 아는 이유로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육체적, 정신적 불구가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70년 겨울에 천상병 시인은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을 하고, 유고 시집까지 만들어서 발간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집이 발간된 얼마 뒤에 그가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그곳에 수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삶을 살고도 삶을 소풍이라고 생각하고,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는 천상병 시인의 순진무구함과 달관의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런 일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추악한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지 못한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기막힌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겠지요. 그 원인으로는 우선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장치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는 국가보안법이 악용될 가능성이 적다구요. 과연 그럴까요? 물론 지금은 이전보다 국가보안법이 악용될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보안법으로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집권당의 주요 인물들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다시 되돌려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번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천상병을 고문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요? 그리고 그들에게 그 짓을, 그 금수만도 못한 짓을 시킨 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뿔이 달려서 어디 깊은 곳에 숨어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아무 티도 안 나게 우리들 속에 섞여 있습니다. 아니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와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지 정권만은 최근 들어서 민주시민들의 힘 때문에 이들 손에서 멀어져 있지만, 기타의 힘은 이들에게 아직도 엄청나게 쥐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모든 힘을 다해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막으려고 합니다. 세상을 다시 거꾸로 돌리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일제 때 독립투사를 고문하던,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시키던 자들이 광복 뒤에 다시 득세하여 독립투사를 ‘국가보안법’이라는 무기로 고문하던 역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철폐해야 하고, 과거사를 철저하게 규명해서, 다시는 이런 자들이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천상병 시인이 당한 것과 같은 기가 막힌 일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확실한 길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그래도 알려진 시인이기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라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숨죽이며 살아 왔는지 이런 기회에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더군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면 좋아할 사람들은 북한의 김정일이나 극소수 좌익들이라고. 천만예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면 결국 대다수 시민들이 인권 침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국가보안법이 유지된다면, 천상병 시인처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아주 극소수의 고문 기술자와 그들을 뒤에서 조종했던 자들만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아마 대한민국의 1%이겠지요.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치고 국가보안법이 있는 세상에서 고문을 자행하던 인간백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 사실이 분명함에도 아직도 망설이는 마음이 든다면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인간을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해 가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해 온 인간 백정들에게 세뇌당해 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철폐-그것은 거창한 이상도 아니고, 대다수 사람들과는 관련이 없는 소수 이념가들의 구호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족과 이웃을, 벗들을, 아니 내 자신을 인간백정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아주 현실적인 필요입니다.


다시 한번 천상병 시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온 ‘그날은-새’라는 시를 읽어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어 봅시다.


이제 몇 년이었는가

아이롱 밑 와이샤쓰 같이

당한 그 날은


이제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 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