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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몰염치병…이념 앞세운 정의는 정의로운가

풍월 사선암 2020. 6. 2. 12:20

‘위안부 문제’ 몰염치병…이념 앞세운 정의는 정의로운가

[중앙선데이] 입력 2020.05.30 00:21 <빠른 삶, 느린 생각>

 

지난 16일자 중앙SUNDAY 칼럼에서 이훈범 선생이 우리 사회에 ‘몰염치 병’이 퍼져가고 있다고 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이훈범 선생이 지적하는 바로는 몰염치 병자는 ‘중대한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나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고개를 뻣뻣이 내세우고…, 사죄는커녕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욕한다’. 그리고 관계없는 사실들을 들어 비판자를 ‘몰아세운다’. 이 병은 코로나바이러스만큼 사회 도처에 퍼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위안부 문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관계된 문제, 검찰에 대한 전 고위 공직자의 협박 등이다. 이러한 또 그에 유사한 ‘몰염치’에 대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지적된 사태에 대한 보도와 진단은 여러 매체에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새삼스럽게 또 다른 논평을 부치는 것은 불필요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또 하나의 논평을 부치기로 한다. 이 몰염치 병은 일시적인 유행병보다는 더 크게 우리의 사회적 사고의 근본에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안부, 조국 전 장관 문제처럼 / 정의 이상조차 이해타산 휘둘려 / 개인 양심에 의해 정의 재검토를
특정 집단의 이익만 옹호할 땐 / 비인간적 폭력의 명분 될 수도 / 대학은 정신적 가치 지주 돼야

 

정신 질서 살아야 정의·양심 상호작용
 
지적된 일들은 특히 사회의 지도부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란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올려다보는 사회 부분들이 존재한다. 사회의 이런 윗부분은 사회 구성 전체의 의미화 또는 이념화 그리고 정치화를 매개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거나 그 향방의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은 상징적 의미를 가짐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함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정치이고 경제이고 또 거기에 더하여 정신의 체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앞의 두 체제는 쉽게 정신의 체제를 뒤틀리게 한다. 그 뒤틀림의 결과가 몰염치 병이다. 이것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위안부 문제이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단 물질적 보상의 문제, 즉 위안부로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바르게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제하의 위안부 문제는 검토되고 문제가 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것은 그 근본에 있어서 물질적 보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제하에서의 성노예화는 그 대상이 된 여성들, 그들의 인간됨을 말살하는 범죄였다. 그러한 범죄가 물질적 보상으로 복원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 그러한 것이 따른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죄와 참회 그리고 속죄의 대체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죄는 형편에 맞추어 행해지는 위선의 표현일 수 있다. 그 진정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사죄의 표현을 대체하여,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여기의 필자도 내놓은 일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드러나는 여러 사실들을 보면, 성노예화는 그 자체로 물질적 거래 또는 탈취의 자산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이 인간 존재로부터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그에 이해타산이 대신하는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정의의 이상마저도 이러한 이해타산에서 이익을 최대로 확보하는 일에 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을 반드시 의식하는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는 지도적 이념에 의하여 구조화된다. 대통령도 되풀이하여 강조하듯이, 지금의 시점에서 정의는 그러한 이념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혁명 이념의 일부가 된 정의의 경우에 흔히 볼 수 있듯이, 정의는 가혹한 비인간적 폭력 또는 부정의의 행위를 자행하는 데에 명분이 되기도 하는데, 지금 시점의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이 특정한 이익을 확보하는 수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정의는 개인적 양심의 결단으로부터 도출되는 이념이고 이상이다. 그러나 정의는 양심을 대행하고 그것을 불필요한 것이 되게 하기도 한다. 바른 조건하에서는 정의는 끊임없이 개인의 양심에 의하여 재검토되고 시험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른 조건이란 정신세계가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정치 질서 경제 질서이면서, 사람의 심성에는 그것을 하나의 정신적 질서로 이해하려는 요구가 있다. 이 정신 질서의 정신이 살아 있다면, 그 틀 안에서 정의와 양심 둘 사이에는 복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그러한 정신의 차원이 바르게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관련된 여러 사정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위안부 문제에서나 비슷하게, 큰 명분이 된 정의와 작은 양심의 뒤틀린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추가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정신적 차원의 부재가 아닌가 한다. 거기에 관계되는 영역은 법이고 대학이다. 그 중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대학이다. 대학은 물론 개인적 이해타산의 세계의 일부이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보, 정치 정보와 기술 정보를 수집하는 사회 기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의 정치적 가치를 점검하고 창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생명의 보편적 의의에 대하여 공부하고 정신적 가치를 확인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기구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관점에서--사실 모든 다른 기능의 기초이면서도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정신의 관점에서, 오늘날 이 기구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에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대학과 대학원의 입학 관계의 문제와 사정들도 이러한 것들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이것도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대학의 입학 제도에 관하여 일정한 유보 상태의 의견을 신문에 써서 두 가지로 내놓은 일이 있다. 하나는 대학 입시 제도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려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립대학을 두고 말한 것인데, 국립대학은 학습 여건이 허용한다면, 입학 지원자를 제한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국립대학이 국가의 예산으로 그러니까 국민의 출자하여 운영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학은 대학 교육을 원하는 학생을 대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것이 대학 교육과 연구의 수준과 질을 낮추는 일이 된다면, 그것을 고려하는 한도에서 입학을 제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학 입학에 관하여 이전에 내놓은 또 하나의 의견은 입학시험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지적 성장 가능성을 사지선다형의 시험문제로써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합격과 불합격 사이의 몇 점의 차이가 어떻게 하여 수업 능력 평가에 대한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시험 점수에 의한 합격 불합격의 판정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사회적으로 다툼을 방지하는 방편이다. 이러한 관찰은 물론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낙방생들을 위로하고 재시도를 권고하려는 것이었다.
 
입학과 관련하여 보다 믿을만한 평가의 방법은 관련 교사나 교수가 학생 하나하나의 자질에 대하여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입학 사정에서 그것을 참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에 대학 입학에 그 비슷한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번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에 관련된 여러 논란을 보면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대학들이 그러한 제도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대학이 사회의 정신적 가치의 지주 노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학문은 무사무위 상태 요구
 
이것도 여러 해 전의 이야기이지만, 나는 인간 의식의 철학 그리고 신경과학의 대표적 학자인 대니얼 데닛 교수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원래 코네티컷 주 미들타운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분석 철학 분야의 대가인 하버드 대학의 윌러드 콰인 교수가 강연을 하러 온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콰인 교수를 면담할 기회를 가졌다. (미국 대학에서는 저명인사의 강연이 있을 때면, 강연자와 학생이 개별적으로 면담할 수 있는 시간을 별도로 마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는 하버드 전학의 권고를 받고, 일정한 절차를 거치기는 하였지만, 곧 하버드로 전학할 수 있었다. 데닛 교수의 학문적 업적으로 보아 콰인 교수의 판단은 너무도 옳은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허위 문서 또는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학문은 사리사욕은 물론 사사로운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인격적 수련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私)가 없는 공평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편벽된 생각을 비운 무사무위(無思無爲)의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정의의 이념도 이러한 반성에 이어져서 참다운 내용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보듯이 사사로운 욕망의 가림막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흔히 보는바 여러가지 동기를 감추어가진 자기 정당성의 주장들은 이러한 정신적 수련의 차원이 사라진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버리기 어렵게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