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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에서 사자로 돌변한 아내, 하지만 내가 암 걸린 뒤엔…

풍월 사선암 2020. 3. 27. 22:18

사슴에서 사자로 돌변한 아내, 하지만 내가 암 걸린 뒤엔

 

[아무튼, 주말-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사랑이 식고 나면, 여자가 무서운 줄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시련을 당하고 보면, 여자가 강한 줄을 알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건 언제일까요? 그녀를 진짜 사랑하게 되는 건 언제일까요? 홍여사 

 


"난 속아서 결혼했어."

 

보통은 아내들의 푸념일 그 말을, 우리 집에선 남편인 제가 자주 합니다. 17년 전 가을에 만난 아내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한 마리 사슴 같았거든요. 바람 속에 간신히 버티고 선 듯한 가녀린 몸매에 겁먹은 듯 크고 맑은 눈, 말 없는 미소에 반해서 초스피드로 청혼을 했었죠. 그런데 막상 같이 살아보니, 이건 완전 상남자 스타일이지 뭡니까. 체구보다 힘이 무척 세고, 고집 또한 셉니다. 눈물 어린 듯한 그 큰 눈에 안 어울리게 성격은 저보다 털털하고 무디고요. 애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말이지요. 하긴 누군들 배우자에 대해 다 알고 결혼할까요? 의외의 모습과 친해지며 행복을 찾아갈 수밖에요. 문제는, 그런 노력마저 제 아내에겐 통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기념일 이벤트를 닭살 돋는다며 마다하는 건 그렇다 치고, 평소 가벼운 데이트 신청조차 성가셔합니다. 오랜만에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라도 하자고 하면 아내는 꼭 김 빠지는 소리를 하죠. 지금이 그럴 때야? 길 막히면 어쩌려고? 우리끼리 무슨 재미로?

 

물론 압니다. 저한테 정이 없어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것을요. 가만 보면 아내의 무뚝뚝한 성격은 집안 내력입니다. 처형들도 다 비슷합니다.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자매지간이면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걸 들어보면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럼에도 속 시끄러울 땐 꼭 언니들을 찾고, 별말 없이도 위로를 받는다니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순간도 아내는 처형들과 얘기 중입니다. 단체 대화방에 네 자매가 모여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아마 환절기 비염이 도졌다느니, 애들 중간고사 점수가 신통찮다는 얘기들을 나누고 있겠죠. 또 무슨 얘기를 더 할지는 모르지만, 아내가 끝내 하지 않을 말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내일 우리가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간다는 말은 아마 안 할 겁니다. 쓸데없이 언니들의 속을 태우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내가 사슴 같은 여인이 아니길 다행입니다. 사슴이었다면 3년 전 그날, 제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다리 하나가 꺾이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내는 사슴의 탈을 쓴 암사자였습니다. 특유의 대범함과 굳은 심지로 어려운 시간을 잘 버텨주었지요. 의사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던 날, 저는 도무지 실감이 안 되어 헛웃음을 지으며 아내를 돌아보았지요. 이 여자, 기절하는 거 아닌가 하고요. 그러나 아내는 꼭 다문 입술로 제 앞에 다가서더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쥐며 제 눈을 마주 보더군요. 주름진 그 눈에는 의외로 물기가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른 데 보지 말고 나만 보라고. 그 눈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후로 아내는 한결같은 굳건함으로 저를 돌봐왔습니다. 속으로야 겁이 났겠지만, 내색하지는 않더군요. 아마도 환자인 제가 워낙 귀가 얇고 감정 기복이 심한 성격이라, 자기라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느꼈나 봅니다.

 

건강할 때는 몰랐습니다. 한결같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요. 아파 보니, 사람의 마음이란 바람에 날아다니는 가랑잎만큼 가벼운 것이더군요.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은 왜 하필 내가 아파야 하느냐는 억울함으로 수시로 돌변하곤 했습니다. 이겨내고 말겠다는 의지는 변해버린 내 일상에 대한 짜증으로 뒤집히곤 했죠. 죽을 것 같다가 살 것 같고, 이젠 살아난 것 같다가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금방 도로 죽은 목숨 같던 내 마음의 널뛰기. 그때마다 아내도 같이 울었다면 여기까지 걸어오는 길이 훨씬 더 고달프고 상처투성이였을 겁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내는 굳건히 중심을 잡아 주었고 그런 아내를 믿고 나는 맘 놓고 아파도 했다가, 다시금 희망의 불을 지피기도 했지요. 정말이지 건강할 때는 몰랐습니다. 아내의 어떤 점에 내가 진정 반했던 것인지를요. 사슴 같은 눈망울에 속아서 결혼했다고 투덜대곤 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나 봅니다. 뚝심 있는 의리의 여인이라는 것을요.

 

그 여인과 함께 저는 내일 병원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갑니다. 이번에도 결과가 깨끗하면, 투병 3년의 졸업장을 일단은 따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살얼음판 같은 전야를 여러 번 겪었지만, 끝내 익숙해지지는 않네요. 의연한 아내와 달리 제 마음엔 자꾸 날이 섭니다. 지금은 온 신경이 협탁에 놓인 아내의 휴대폰에 가 있습니다. 아까부터 쉴 새 없이 카톡 메시지가 날아들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처형들인 모양인데, 무슨 일로 저렇게 부산할까요? 그러고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일 병원에 간다는 말을 아내가 언니들에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다들 한마디씩 응원의 메시지를 보태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건가 싶어, 나는 그녀들의 톡방을 살며시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뭔가요? 대화방엔 웬 맛집 주소에, 유명 카페 소개가 연이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생뚱맞은 거리 축제 팸플릿은 또 무엇인지. 자매들은 지금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대화방을 거슬러 올라가던 제 손가락은 곧 아내가 올린 메시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한 시간 전쯤 아내가 쓴 그 글을 읽고, 저는 잠시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더 읽었지요. 한 번 더, 또 한 번 더, 한 번만 더.

 

"언니들아. 나 오늘 밤엔, 겁이 나서가 아니라 가슴 설레서 잠 못 들고 싶다. 그 무서운 서울에는 신랑이랑 데이트하러 가는 길이고 싶다. 병원 근처에 어디 분위기 좋은 데 없나? 참고로, 이제 수민 아빠 뭐든지 먹을 수 있다. 우리 이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어디든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읽으려 했을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 글자가 보이지 않더군요. 이대로 죽는 걸까 싶던 순간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이제야 터져 나왔습니다. 뜨거운 눈물 줄줄 흘리고 보니, , 정말 살고 싶더군요. 이 뜨거운 몸으로 내 아내 곁에 오래 살아 있고 싶더군요. 사슴처럼 다가와 사자처럼 나를 지켜준 그녀를 세상 어디로든 데려가고 싶더군요. 어디로든.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