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3편 조훈현(上)
2019-06-28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바둑황제 조훈현
천재의 탄생 - 거기 고독이 있었다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조훈현. 그는 이름만으로도 위대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바둑에 관한 한 그는 정말 위대하다.
‘천재’라는 단어가 딱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양 그는 바둑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영광은 항시 그의 머리 위에 있었으며 좌절은 더 큰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됐다.
조훈현의 출현으로 우리 바둑계는 적어도 한 세대, 약 30년의 세월을 절약했다는 것이 세계바둑계의 통설이다. 조훈현은 이창호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한국 프로기사 모두의 교사였다. 우리 바둑이 세계무대에서 괄시받지 않고 일본, 중국과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된 것. 나아가 세계대회를 휩쓸며 바둑최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조훈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부사로서 그의 55년 바둑인생, 바둑역정은 온갖 신기록과 진기록으로 점철된 드라마였다. 반상에서 그는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요, 명량을 지킨 이순신이었으며, 코끼리를 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영국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까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현재진행형이다.
조훈현(1953~)
- 1953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 1962년 만 9세 7개월 입단(세계 최연소)
- 1963년 일본에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九단 문하에 입문
- 1972년 병역문제로 귀국, 일본기원 五단 인정
- 1980년 9관왕, 1982년 10관왕, 1986년 11관왕(세 차례 전관왕)
- 1982년 九단(한국 최초)
- 1985년 국수전 10연패
- 1989년 제1회 응씨배 우승, 은관문화훈장 서훈
- 1977~1993년 패왕전 16연패
- 2003년 삼성화재배 우승(만 49세 10개월, 최고령 세계타이틀 획득)
- 통산 최다타이틀 보유(160회), 통산 최다승(1949승), 통산 최다대국(2788국), 타이틀전 최다 출전(233회)
- 2016년 5월~ 제20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자유한국당)
언제 펼쳐 봐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있다. 바로 이 한 장의 사진!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조훈현 九단이 잉창치 회장으로부터 1미터가 넘는 대형 우승트로피를 받아드는 순간이다.
1989년 9월 5일은 한국바둑의 날이었다. 변방의 한국바둑이 세계에 우뚝 선 날이었다.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을 때 공항은 아우성이었다. 시민들의 열띤 환호 속에 김포공항에서부터 마포대교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정부는 훈장을 수여했고, 월간『바둑』지는 감격에 젖어 이런 신파조의 제목을 달았다.
“아, 대한민국, 아, 조훈현!”
노르망디 상륙이 2차 세계대전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듯 한국바둑은 잉창치배(應氏盃) 이전과 이후로 대별된다. 조훈현 九단이 마련한 발판을 딛고 이후 한국바둑은 세계대회를 휩쓸며 단숨에 바둑최강국으로 올라섰다.
돌이켜 생각해도 조훈현의 잉창치배 우승은 ‘기적’이란 두 글자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조훈현 특유의 강렬한 기질이 숨어 있다. 더구나 조훈현은 잘 제련된 승부사였다. ‘진흙 밭’이라 불린 한국바둑에서 그는 토종 고수들과 한국식(?) 거친 전투를 거듭하면서 일본바둑이 쳐놓은 ‘미학’의 굴레를 벗어났다. 자유를 얻었다. 그는 진정한 역전의 명수였고, 바둑의 황제였다. 잉창치배를 통해 조훈현의 바둑은 수만 개의 꽃송이가 일시에 만개하듯 화려하게 피어났다.
▲ 1989년 9월 제1회 잉창치배에서 조훈현이 중국의 녜웨이핑을 3대2로 물리치고 우승, 한국 프로바둑 사상 최초로 세계 제패에 성공했다. 바둑팬들에게 ‘환장하다’로 널리 알려진 응씨배 우승 카퍼레이드 사진. 조훈현은 이듬해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아부지, 거기 놓으면 안 되겠어라우
조훈현은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에서 영암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 대(代)까지 대대로 살던 곳이 월출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 영암군 회문리이기 때문이다. ‘고향’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린 문제인데, 어쨌거나 조씨 문중의 요람은 아직까지도 많은 친척들이 살고 있고 선산이 위치한 영암이므로 바둑황제의 본향이 영암이라고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조훈현은 시니어리그 영암팀의 주장으로 활약했고, 2017년 문을 연 그의 기념관 역시 영암군 회문리 기찬랜드 내에 자리하고 있다.
목포시 죽동 20번지. 조훈현이 태어나 7세 때까지 산 곳이다. 목표역 앞 그곳에서 조훈현의 아버지는 지물포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형편은 그다지 넉넉하진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과 누나들이 아버지의 절정기에 비교적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데 비해 막내아들 훈현이 태어난 시점은 6.25 전쟁의 혼란기에 집안 형편이 특히나 기울어져 있던 때였다.
1950년대 중반, 부친 조규상은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 암울한 장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층 마루에서 조카사위 신서중과 바둑을 두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실력은 8급이나 되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네 살이던 조훈현이 “아부지 거기 놓으면 안 되겠어라우.” 하는 것이었다.
조규상은 잠시 갸우뚱했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돌을 놓았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아버지가 두는 바둑을 유심히 지켜봐왔을 뿐, 바둑을 배워본 적이 없는 훈현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복기를 해보니 바로 그 수가 패착이나 다름없는 수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어디 네가 한번 두어 봐라.”했더니 “아 글쎄, 제법 두는 것은 물론이고 복기까지 척척 하는 것이 아닌가.” 비상한 예감에 집안이 떠들썩해졌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집안의 조카 박승곤이 조규상을 설득해 꼬마를 기원으로 데리고 갔다.
조훈현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목포와 영암 일대에서 바둑 신동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져갔다. 훈현의 아버지도 늦게 얻은 아들이 천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벅차하다가 어느 날 일대 용단을 내린다. 1958년 겨울, 조규상은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번지수에 ‘산’자가 붙은 성북구 보문동의 달동네. 살림은 어려웠지만 훈현의 대성을 위해선 스승이 필요했다. 상경한 날부터 조훈현과 함께 매일 명동의 송원기원으로 출근을 했다. 그곳엔 당시의 일인자 조남철 국수가 있었다.
목포에서 온 신동이라고 소개하자 조남철은 흔쾌히 “한 판 둬보자.”고 바둑통을 끌어당겼다. 9점 바둑이었다. 승부는 3시간 뒤에 끝이 났다. 예상대로 조남철의 승리였다. 패배를 확인하고 난 조훈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조남철의 입에서 뜻밖의 반가운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얘야, 한 판 더 두어보자꾸나.”
바둑수업 시절 조훈현은 번개같이 한 수를 두어놓고 달아나기 일쑤였고, 틈만 나면 만화방에 가서 넋을 잃고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고도 질 줄을 몰랐다. 일본 유학을 보내자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김인의 일본행을 주선했던 이학진(작고. 1911~2009)이 다시 앞장을 섰다.
▲ 조훈현 바둑기념관이 2017년 11월 10일 전남 영암에 건립됐다. 사진은 개관식 모습. 개관식에는 조훈현 내외를 비롯해 전동평 영암군수, 우기종 전라남도 정무부지사, 원유철 국회의원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조훈현 바둑기념관 개관을 축하했다.
# 이 아이는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조훈현은 62년 아홉 살의 나이로 입단대회를 통과해 프로기사가 되었다. 목포에서 상경한 지 4년, 입단대회 도전 세 번째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아홉 살 프로기사의 탄생은 일본을 포함해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당시 언론의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입단이 무엇인지, 프로기사가 무엇인지, 세계최연소 신기록이 무엇인지에 대해 초등학교 3학년생이 알아야 얼마를 알았겠는가. 입단대회 때도 어른들은 틈만 나면 사라지는 훈현을 붙잡으러 다니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유학의 얘기는 무르익어갔다. 입단한 이듬해인 63년 10월, 조훈현은 프로 二단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만으로 겨우 열 살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일이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그렇다고 가기 싫은 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탄다는 호기심과 큰 동네에서 제대로 바둑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당시엔 일본 유학하면 으레 기타니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도일(渡日) 1호’ 김인이 그 곳에서 수련했고, 조훈현보다 1년 먼저 유학길에 오른 조치훈도 그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당연히 기타니 九단도 조훈현이 자신의 문하로 들어오려니, 느긋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연이란 하늘이 만든다고 했던가. 운명의 나침반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조훈현은 인사차 들른 세고에 九단의 자택에서 예정에 없던 내제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우칭위엔(吳淸源)과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두 사람밖에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두 제자의 질량이 너무 커서 일본바둑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세고에는 연배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기타니보다 격이 높은 존재였다. 그러나 당시 74세로 연로한 탓에 도장을 운영하지 않고 있었고, 내제자를 들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세고에가 조훈현을 보자마자 대뜸 바둑판을 내와 두 판을 테스트해보더니 이렇게 말해버렸다.
“음, 내가 늙고 몸이 불편해 언제 죽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
세고에는 그 한마디로 조훈현의 거취를 깔끔하게 결정해 버렸다. 기타니의 양해를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독단적으로 한국에서 온 천재소년을 자신의 내제자로 삼아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기타니 입장에선 ‘아뿔싸’ 땅을 칠 만한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평소에도 사이가 별로였던 세고에와 기타니 두 사람은 몹시 불편한 관계로 돌아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세계 최연소 프로기사가 우칭위엔의 사제가 되다’ 이 사건은 빠르게 일본바둑계의 화제가 되어 버렸다. 74세의 스승이 불과 열 살짜리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누가 봐도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조훈현의 기재에 반한 측면도 있겠지만 이때 세고에에겐 다른 깊은 뜻도 있었다고 한다.
“스승은 한중일의 바둑천재 딱 한 명씩만 데려다 키웠어요. 나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바둑은 원래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우칭위안을 키워 중국에 보답했으니, 조훈현을 잘 키우면 한국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선생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획을 그을 재목이 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바둑기술보다는 ‘사람 됨됨이와 그릇’을 중시하는 선생의 가르침은 정말 깊고 무거웠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중 얘기다. 당시 조훈현은 어렸기에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60년 이상의 간극이 있었다. 스승과 제자라고 하지만 살가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더구나 세고에는 근엄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라 말 한마디 붙이기조차 겁이 났다.
“겨울이었어요. 첫해 겨울 엄청난 눈이 왔던 기억이 납니다. 아침 일과는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치우는 일, 바둑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상이 준비되어 있었지요. 넓은 저택에 가족은 단 세 사람뿐입니다. 고령의 스승과 수발을 드는 며느리, 그리고 유일한 내제자인 저밖에 없었죠. 스승은 무서워서 감히 범접하기가 어려웠고, 세 끼 챙겨주고 깊은 모성으로 돌봐주셨던 선생님의 며느리를 저는 ‘마마짱’으로 부르며 의지했어요. 그야말로 ‘마당쇠 시절’이라고나 할까요. 하는 일이라곤 마당 쓰는 일과 심부름밖에 없었으니까요.”
열한 살 꼬마가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스승은 바둑을 둬주지도 않았고…. 서울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왕자처럼 자란 훈현이 택할 길이라곤 스승에 대한 복종뿐이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세고에 선생댁 2층의 작은 다다미방. 그곳이 훈현의 방이었다. 여름을 제외하고 방은 늘 추웠다. 위아래 두껍게 몸을 감싸도 한기가 몰려왔다. 이 춥고, 허전하고, 외로운 이국의 다다미방에서 조훈현은 10대를 보냈다. 밤이 되면 보고 싶은 부모, 보고 싶은 형제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혹여 스승의 귀에 들어갈까 봐 숨죽여 훌쩍훌쩍 베갯잇을 적시다 잠이 들었다.
조훈현은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90년대 초반 아들 민재의 유학 얘기가 나왔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민재는 예사롭지 않은 영재 끼를 보이고 있었다. 뒷받침할 경제적 여력도 되는 만큼 주변에선 다들 여건이 좋은 미국으로의 유학을 권했다. 아들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 만큼 조훈현 부부도 보내느냐, 마느냐를 놓고 꽤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던 걸로 안다. 그러나 결국은 품에서 키우는 쪽을 택했다. 불확실한 미래도 미래였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아이가 객지에서 겪을 상황을 생각하면 도무지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거 그의 외로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세고에는 엄격했지만 매몰찬 스승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훈현의 일상과 성장과정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훈현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일부러 강아지 ‘벵케이’를 데려올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해주었다. 벵케이는 영리한 개였다. 훈현을 잘 따랐다. 훈현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열심히 꼬리를 흔들면서 쫓아갔다. 강아지 때 들어와 9년 동안 훈현과 동고동락한 뱅케이는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좋았다.
◀일본 유학시절 외로움을 달래준 벵케이. 조훈현은 산책 때마다 벵케이와 동행했다.
# 덤벼라, 쿤켄(훈현)!
니시오기의 스승 집에 정착하면서 훈현은 일본기원 원생으로 등록했다. 한국에선 이미 프로 二단의 자격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양국 바둑의 차이는 극명했으니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급수 평가를 받아보니 4급 판정이 내려졌다. 창피하고 당혹스러웠다. “처음부터 다시하자” 자존심에 불이 붙었다.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처리하랴 학교수업 받으랴 원생 생활하랴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훈현의 바둑은 야무지게 성장해 갔다. 그런 훈현을 지켜보면서 세고에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구체적 행동 요강을 하나 둘씩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둑을 두고 나면 복기와 함께 반드시 기보를 챙기는 것이었다. 기사의 모든 것은 기보에 있다는 것이 세고에의 신조였다. 세고에는 훗날 조훈현의 공식 대국 기보를 단 한 판도 빠짐없이 정리해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줬다. 조훈현 역시 이런 습관을 토대로 온갖 고전과 일류기사들의 기보를 파고들면서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2년 만에 강한 1급 판정을 받았고 3년째인 66년 여름, 세 번째 출전한 입단대회를 통해 정식 일본기원의 프로기사가 되었다. 그의 나이 13세. 당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타이기록이었다. 이후 67년 二단, 69년 三단, 70년 四단, 71년 五단으로 승단하기까지 조훈현의 행보는 순풍에 돛 단 듯 경쾌하기만 했다. 주위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조훈현은 특히 속기에서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조훈현이 입단한 직후 스승 세고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바둑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하여 훈장을 받았다. 그 축하연회장에서 조훈현은 우칭위안과 두 점 치수로 공개 속기를 두어 1집을 졌다. 두 점을 놓고 1집을 지긴 했지만 내용은 훌륭한 것이어서 열세 살의 훈현은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그 뿐인가, 2년 후인 15세 때엔 속기대국에서 당시 ‘혼인보(本因坊)’ 타이틀을 갖고 있던 린하이펑(林海峰) 九단에게 정선으로 두어 4집을 이기기도 했다.
▲ 조훈현이 입단한 직후 스승 세고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바둑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그 축하연에서 조훈현은 동문 사형인 우칭위안과 기념대국을 벌였다
이런 훈현이었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위기도 있었다. 아베 요시테루 六단이라는 프로기사와 내기바둑을 뒀다가 파문당할 뻔한 일이다. 당시 二단이었던 조훈현은 사석에서 한 판에 100엔씩 내리 6판을 이겨 600엔을 땄다. 그 소식은 금세 일본바둑계에 퍼졌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아베 요시테루였다. 그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바둑 담당기자들에게 조훈현을 자랑하고 다녔다.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 조훈현에게 내기바둑을 둬서 여섯 판을 깨졌다. 정말 무서운 놈이다.” 물론 그의 의도는 동생처럼 아끼는 훈현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싶은 선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이 세고에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만다.
당시 바둑을 배우러 다녔던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九단의 허락 하에, 그것도 거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둔 내기바둑이었지만 스승 세고에는 용납하지 않았다. “너는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야” 불호령과 더불어 당장 보따리를 싸서 일본을 떠나란 엄명이 내려졌다. 스승의 집을 나와 2주일간 방황 끝에 간신히 용서를 받았지만 훈현의 바둑 인생은 그때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세고에는 그 정도로 엄격하게 바둑의 도를 지키려 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반면 조훈현에게 내기바둑을 두라고 했던 그 사람, 조훈현의 실전 스승 역할을 했던 후지사와는 정반대였다. 자유분방하고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선이 굵은 성품이었다. 그는 ‘오는 사람은 다 받아준다’며 일종의 양산박 같은 연구회를 열고 있었다. 그곳에는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린하이펑(林海峰), 구토 노리오(工藤紀夫) 등 쟁쟁한 고수들이 즐비했고, 훈현은 그곳에서 후지사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후지사와는 조훈현보다 스물여덟이나 위. 하지만 후지사와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린 조훈현만 보면 “덤벼라, 쿤켄(훈현)!” 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당시 후지사와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제일의 속기파이자 싸움바둑. 조훈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순식간에 뚝딱뚝딱 한 판씩을 해치웠다. 얼마나 많은 판을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히 단판 치수고치기로 대결했고, 마침내 어느 시점에선가 훈현이 선으로도 앞서기 시작하자 치수고치기의 룰이 깨지고 말았다. 아무리 승률이 좋다 해도 바둑계의 거목이자 대선배인 후지사와를 상대로 백을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훈현의 기재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던 후지사와는 그때부터 공공연하게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녔다.
“훈현의 기재는 세계 최고다. 오래지 않아 그는 초일류 기사로 우뚝 서고야 말 것이다.”
그런 정을 못 잊어, 조훈현이 귀국한 후 후지사와는 단지 “훈현이가 보고 싶어” 술병 하나를 달랑 뒷주머니에 꽂은 채 한국 땅을 찾았으며 그런 스승을 맞아 조훈현은 스스럼없이 늙은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드리곤 했다(일생을 기행으로 일관했던 후지사와는 2009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으며, 그때 조훈현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운구를 했다).
▲ 일본 유학 시절 조훈현의 실질적 스승은 후지사와 슈코였다. 조훈현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후지사와는 조훈현이 보고 싶으면 일본에서 한달음에 달려오곤 했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했다. 사진은 스승 후지사와가 1998년 3회 삼성화재배 와일드카드로 유성 삼성화재연수원을 찾았을 때 잔디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 이후락도 해결 못한 병역문제
시대가 바뀌어 1970년이 됐다. 이 해에 열일곱 살의 조훈현은 33승1무5패(승률 88.6%)의 기록을 세우며 ‘일본 기도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 전 해에 이시다(石田芳夫. 훗날 명인, 본인방)가 받았고, 다음 해에 조치훈이 이 상을 받는 걸 보면 당시 조훈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두면 이기는 시절’이 바로 이때였다. 이듬해엔 五단으로 승단하면서 어엿한 열여덟 살의 청년이 되었다.
그 무렵 스승 세고에는 마지막 제자의 성장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훈현의 병역의무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제자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병무청에 직접 병역연기 탄원서를 내는 등 백방으로 손을 써 봤다. 하지만 끝내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했다. 바둑계와 인연이 깊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손을 써도 되지 않았다. 당시 병역기피자가 경찰에 총을 쏜 사건이 터졌는데,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어떠한 고관의 자제라도 병역회피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절망의 초대장 한 통이 현해탄을 건너 니시오기의 집 우편함에 날아들었다. ‘입-영-통-지-서’. 스승은 식욕을 잃고 드러누워 탄식했으며 조훈현은 바둑책을 덮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80%대의 경이적인 승률을 올리며 고속질주를 하던 조훈현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귀국의 시간을 기다리며 휘황한 신주쿠의 밤거리를 헤맸다.
◀세고에 겐사쿠.
1972년 3월. 조훈현은 가방하나 든 채 귀국한다. 10년이 지난 세월. 타의에 의한 귀국이었다.
마지막 모든 정을 쏟은 제자의 떠나는 뒷모습을 세고에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바라만 보았다고 한다. 이후 4개월 동안 그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고에의 나이 여든셋.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가족에게 “노구로 더 이상 신세 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자 한다.”는 내용. 또 한 통은 친구, 후배들에게 “조훈현을 꼭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는 간절한 부탁.
“스승의 부음을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대들보에 목을 매단 게 아니라 앉아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졸라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스스로 손을 놓아버린다’는 것이죠. 그만큼 스승은 죽음의 순간에도 무시무시한 의지력을 보이신 분입니다. 친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아마도 저의 귀국이 90%쯤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심하셨거든요.”
조훈현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훈현의 에세이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세고에가 죽은 후 애견 벵케이도 밥을 안 먹고 비실비실 앓다가 죽었다. 일종의 자살이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벵케이의 죽음으로 선생님의 죽음까지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조훈현의 서울 생활은 이렇듯 그를 지탱해주던 기둥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상태에서 시작됐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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