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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기술

풍월 사선암 2019. 5. 10. 08:56

바둑 이야기

바둑의 기술

한 수 한 수가 승부를 향한 여정

 

광활한 19줄의 반상(바둑판)을 바라본다. 바둑돌을 쥔다. 손을 뻗어 착수할 시점이 되어, 나는 생각에 잠긴다. 바둑판 너머의 상대 대국자는 안광을 빛내며 나의 한 수를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는 조선 사람을 만나 바둑을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서양의 장기(체스)가 과학이라면 동양의 바둑은 철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바둑이 제시하고 있는 기술 및 이론 체계는 철학적 함의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또한 바둑의 기술 및 이론은 정치 혹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일례로 소탐대실은 바둑 교훈이면서, 이미 사회적 용어로 굳어져있다. 바둑의 기술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둑의 기술


세관

 

대세관이란 각각의 대국자가 지닌 철학적 안목을 뜻한다. 균형 감각, 형세판단, 기풍(바둑 스타일) 등이 개인의 대세관에 반영된다.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오청원 기성은 바둑은 조화라고 설파함으로써, 자신의 대세관을 바둑의 본질로 승화시켰다. 바둑의 고수들은 예외 없이 폭넓은 대세관과 자신만의 바둑 철학을 갖고 있다.

 

자신의 틀에 갇혀 있으면 다양한 사고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바둑의 고수를 지망하는 수많은 바둑인들이 기보를 통해 고수들의 안목과 대세관을 익히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창의적 대세관을 확립하는 것은 바둑의 고수가 되는 지름길이다.


수읽기

 

◀전광석화 같은 수읽기와 전투력으로 이창호 9단에 이어 10여 년간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세돌 9.

 

바둑의 기술 중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이면서, 그 난해함과 심오함이 끝이 없는 영역이 바로 수읽기이다. 수읽기는 기본적으로 초반, 중반, 종반 어느 한 분야의 고유 영역이 아니다. 수읽기는 바둑의 기초적인 기술이면서 동시에, 두 대국자의 역량을 가늠하는 초석이 된다.

 

수읽기가 강한 대표적인 기사로 이세돌 9단이 있다. ‘센돌이세돌 9단은 다른 분야에 비해 포석 감각이 부족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약점을 빠르고 정확한 수읽기, 현란한 대국 운영으로 극복해냈다.

 

일본의 조치훈 9단 또한 치열한 수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고, 한국바둑의 젊은 양대산맥으로 주목 받는 김지석 9단과 박정환 9단도 수읽기의 귀재들이다.


형세판단

 

수의 가치 판단, 국면을 전체적으로 고려하고 우세와 열세를 가늠하는 것이 형세판단이다. 상대보다 한걸음 앞서려면 정확한 형세판단이 필수이다. 형세판단은 중반부터 세밀하게 이루어지며(국면에 따라 초반부터 형세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다), 끝내기 단계에 들어서면 거의 매 수마다 형세판단을 하게 된다. 대세관이 바둑판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라고 한다면, 형세판단은 수의 가치를 세밀하게 산출하는 능력이다. 또한 형세판단은 수리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과목이기도 하다. 계산력, 응용력, 논리력이 요구되는 분야가 바로 형세판단이다.

 

위 세 가지 기술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바둑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 수읽기를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집중력, 그리고 기존의 이론과 자신의 창의성을 결합한 창조적 대세관 등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둑 한 판을 두기 위해 필요한 세부 기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둑은 통상 초반, 중반, 종반 세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각각의 영역은 바둑 역사 4,000년 동안 당대의 기사들이 정립한 바둑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세 가지 영역의 핵심 기술은 다음과 같다.

 

초반 기술


포석

 

집을 짓는 과정 중 기초 공사에 해당한다. 이를 바둑 용어로 포석이라 부른다. 기초 공사가 부실하면 집이 제대로 설 수 없듯, 포석이 잘 짜이면 한 판의 바둑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두어지며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은 포석은 다음과 같다.

 

삼연성 포석 / 1-3-5포석 / 중국식 포석


정석

 

먼저 반상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돕기 위해 서술하면, 바둑판은 네 귀(귀퉁이, 코너, 각진 곳), 네 변(side) 그리고 중앙으로 이뤄져 있다. 귀를 선점하고 점차 변 및 중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흑백간의 접전이 발생하는데, 이를 수많은 고수들이 연구해서 하나의 정형으로 굳어진 모형을 정석이라고 부른다. 가장 많이 쓰이는 정석의 용어는 걸침과 협공이다.


대세점

 

대세점이란 초반의 흐름을 좌우하는 한 수이다. 보통 이 한 수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초반의 급소라고도 할 수 있다. 대세점을 보는 안목은 초반 포석과 반상 전체를 얼마만큼 구조적이고도 융합적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석에 치우치지 않고, 집이나 세력에 구애됨이 없이, 판 전체를 조망하는 지식이 대세점에 녹아 있다. 또한 대세점은 선점하는 자에게 지분이 100% 돌아간다. “큰 곳보다 급한 곳이라는 바둑 격언은, 대세점의 절대적인 크기와 우선적 가치에 대해 말해준다.


◀위 기보에 세모 표시된 흑돌은 우측 흑 세력을 키우면서 아랫쪽 백 세력을 줄이는 일석이조의 자리로, 현 국면에서 놓칠 수 없는 대세점이다.


행마

 

바둑에서 원래 있던 돌 주변에 새로운 돌을 놓아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을 말한다.” 한국어 위키백과

 

행마란 바둑 용어로, 특히 돌의 보폭 및 전개를 묘사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돌은 필연적으로 귀에서 변으로, 변에서 중앙으로 향한다. 세부적으로는 날일자 행마, 눈목자 행마 등 각 행마에 적합한 용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반상을 아우르기 위하여 돌들이 전개하는 형태를 통칭하여 행마라고 한다. 

 

중앙을 중시하는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생전 살아있는 기성으로 불린 오청원(吳淸源) 9. <사진제공: 일본기원>

 

많은 기사들이 공동연구와 기존 이론을 혼합하여 각 세대별로 유행포석을 만들어냈다. 대체로 바둑 한 판은 귀--중앙의 순서로 두는데, 이는 굳어진 이론은 아니다. 초반 포석은 대국자의 취향과 기풍(바둑 스타일)을 보여준다.

 

만약 상대 대국자가 천원(중앙의 화점)에 첫 수를 둔다면, 그는 호방한 우주류를 지향하는 선수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은 어려운 법. 주어진 틀을 바꾸는 것은 변혁에 해당되나 그만큼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난,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기성오청원 9단은 전성기 시절 신포석을 통해 바둑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현대바둑의 태동을 선포하였다. 귀나 변에 머물러 있던 바둑의 시야를 광활한 중앙으로 돌린 것이었다. 오청원 9단에 의해 본격적으로 촉발된 포석의 연구는 그 한계가 보이지 않으며, 실제로 바둑의 세 영역 중 초반 포석의 중요성과 위치를 최고로 끌어올렸다.

 

또한 초반이란 돌 몇 개 놓이지 않은 포석 단계에서도 대국자의 성향과 철학을 알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분야이다. 바둑 이론서의 90% 이상이 포석 이론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포석과 정석이 매우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음을 뜻한다. 바둑의 고수들이 초반부터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 고심하는지 느낄 수 있다.

 

중반 기술


공격

 

드라마 미생을 보신 독자라면 바둑에서 말하는 공격타개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생은 말 그대로 완생이 아닌 형태를 말하며, 우리말 표현으로 두 집이 없는 미완의 상태를 뜻한다.

 

미생을 일본어, 그리고 영어로는 두 눈이 없는 형태라고 한다. 두 눈이 환하지 않으니 밝게 볼 수 없으며, 길을 더듬어 찾아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바둑에서의 미생은, 항시 공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두 집을 확보하여 완생한 돌은 어떠한 공격에도 끄덕 없지만, 미생은 공격 당하거나 포위당하면 꼼짝없이 죽게 되는 위태로운 처지이다.


타개

 

미생이 두 집(두 눈)을 만들기 위하여 고투하는 과정을 타개라고 한다. 상대의 맹공을 견디는 과정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가는 여정에 비유할 수 있다. 빛을 보기 위하여 미생은 반드시 두 눈을 내야 하며, 이를 집요하게 방해하는 상대의 세찬 공격을 받아내고 이겨내야 한다. 타개의 묘미는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두려움을 용기로 맞설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중반전술

 

사활, , 사석전법, 성동격서, 침입과 삭감 등 여러 전술과 전략이 있다. 바둑에서 말하는 전술은 구체적으로 중반을 전개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세부 기법을 뜻하며, 전략은 한 판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고금의 지혜가 총망라된 전쟁 전략을 의미한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전쟁 모형을 지니고 있으며, 각개격파로 부분 전투를 이겨도 최후 승리를 결정하는 전쟁에서 패하면 그 판 전체를 잃게 된다. 바둑의 전략이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여러 전략과 흡사하며, 바둑을 두는 대국자가 직접 전략을 세우고 모든 전술을 설계 운용하기에 바둑을 제왕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패싸움

 

패는 요술쟁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이 패의 존재로 인해 변화무쌍한 바둑의 매력이 다시 한번 부각된다. 패란 상대가 따낸 곳을 한번 다른 곳에 둔 후 되따낼 수 있는 곳을 의미하며, 그 지점에서 패싸움이 벌어진다. ‘한번 다른 곳에 두는 것을 패감이라고 하는데, 이 패감의 유무 및 가치 판단이 바둑의 흐름 및 방향을 결정한다.

 

흔히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데, 바둑에 어떤 예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라는 존재이다. 어떤 기사가 투병 중에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인생에도 패가 있다면, 패라도 걸어보련만.”

 

중반은 바둑의 전투를 상징하며, 온갖 종류의 전술과 작전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지점이다. 또한 초반 포석과 달리 중반 전투는 변과 중앙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바야흐로 판 전체를 휘감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롭게 관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중반 전술은 고대 중국에서 전해 내려온 병법서를 통해 익힐 수 있다.

 

끝내기

 

바둑의 마무리 부분에 해당하며, 중반 전투가 끝나고 일시적 평화가 찾아온 시점을 의미한다. 노을이 지고 하루가 저무는 광경을 상상하면 된다. 바둑의 종반은 중반처럼 혈투와 살육으로 얼룩진 전투와 양상이 다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더욱 치열하고 표독한 전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수학적으로 가장 세밀한 부분을 계산하면서 두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바둑에는 덤 개념이 있다. 호선(even) 대국에서, 흑은 백에게 덤 6.5집을 준다. 여기에서 도입된 0.5집의 개념이, 바둑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인 동시에 끝내기 분야의 광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끝내기에 들어서면 두 대국자는 본격적으로 한 수의 가치를 따지기 시작한다. 1, 2. 최근 기사들은 1/3, 1/6집의 가치까지 따지기 시작하였다. 그 정도로 치열한 것이 현대바둑이다.

 

조합게임이론에서 사용하는 공식과 같은 이론이 바둑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끝내기 계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는 김용환 박사(맨우측)가 정상급 프로기사들과 자신의 끝내기 이론을 입증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바둑을 이과에 비유하는 이유는 바로 끝내기가 가진 수학적 체계 때문이다. 한 수의 크기 계산법, 확정가와 변동가, 사석 계산, 패를 포함하고 있을 경우의 계산법 등. 그러나 수리적 접근은 끝내기 분야가 가진 매력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끝내기는 심리적 요소를 포함한 분야로, 적절한 지점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마지막 공배(서로 집이 되지 않는 곳)를 메우기 전까지, 끝내기는 궁극의 지성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사유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확장하며 최선의 한 수를 촉구한다.

 

바둑은 초반, 중반, 종반을 거치며 숱한 사유와 해석을 쏟아낸다. 바둑의 기술은 대대로 전수되어 현대에 이르러 하나의 거대한 이론체계로 정립되었으나, 이러한 기술발달은 역설적으로 바둑의 진입 장벽을 높여 초심자에게 알 수 없는 경외감과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바둑의 기술을 배우고자 할 때 흥미 있는 목록을 정하여 단계별로 접근할 것을 권한다. 먼저 기존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두어본다. 바둑을 두는 과정을 통하여 사유의 즐거움을 느끼고, 곧이어 나의 마음을 끄는 부분을 계속해서 찾아본다. 언젠가 바둑돌을 쥐는 촉감이 기분 좋게 손에 전해지는 날, 이미 바둑애호가가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둑의 기술 - 한 수 한 수가 승부를 향한 여정 (바둑 이야기, 조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