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차인태 “병원 가업 못잇고 방송일, 원 없이 다해봐… 인생 후반은 재능기부”

풍월 사선암 2019. 3. 6. 23:18

차인태 병원 가업 못잇고 방송일, 원 없이 다해봐인생 후반은 재능기부


차인태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이 서울 서대문구 문화일보홀 청춘극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평생 TV 카메라 앞에 섰는데도 사진 찍히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진기자의 요구대로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차인태 아나운서클럽 회장

대입·방송국 입사 모두 재수’ / 의대 떨어지고 성악으로 전향 / 대학 방송반서 아나운서 꿈꿔 

2009년부터 악성 림프종 투병 / 병 이기며 세상보는 눈 바뀌어 / 가진 것 세상에 나누며 살고파 

탈북민들 사투리 교정해주고 / 직장인들에말하는 법알려줘 / 우리말 지키는 파수꾼 자부심

 

빠암빠 빠빠 빠빠빠빠빠.” 19701980년대 일요일 아침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 선율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면 온 가족이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19732MBC에서 첫선을 보인 후 EBS로 옮겨 현재까지도 방송 중인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 장학퀴즈의 첫 진행자는 차인태 아나운서였다. “전국 남녀 고등학생들의 건전한 지혜의 대결이라는 오프닝 멘트로 시작하는 그의 반듯하고 진지한 진행은 시청자에게 신뢰감을 전했고, 파일럿으로 시작한 장학퀴즈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9904월까지 172개월간 장학퀴즈진행을 한 후에도 아나운서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제주 MBC 사장을 지낸 후 1998년 퇴직했고,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부 교수로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이후 고향인 평북도지사와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그는 최근 전·현직 아나운서들의 친목 모임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제9대 회장을 맡았다. 2월의 마지막 날 문화일보 편집국에서 그를 만났다.


여전히 반듯한 노신사는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풀어냈다. 1944년 평북 벽동에서 태어난 차인태(75) MBC 아나운서는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그는 연세대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왠지 어떤 결정이든 허투루 할 것 같지 않은 그가 성악과를 졸업하고 아나운서가 된 사연이 궁금해졌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웃음). 어렸을 때 저는 남들과의 경쟁에서 계속 실패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며 1차에서 떨어져 2차 학교로 갔고, 고등학교도 2차로 됐어요. 대학은 의대를 지망했어요. 아버지가 평양의대의 전신인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나온 의사셨거든요. 월남해서 병원을 개업해 4남매를 키우셨죠. 자연스럽게 장남인 제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공부도 잘했는데 합격자 발표날 아무리 찾아도 벽보에 제 이름이 없더라고요. 재수를 선택하며 뒤늦게 성악을 시작했어요. 성악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었지만 대학에 합격했어요. 입학해서 교수님께 레슨을 받는데 고개를 갸웃하시더라고요. 보는 눈이 있으신 거죠(웃음). 일주일에 한 번씩 학년별로 발표회를 했는데 힘에 부치더라고요. ‘이러다가는 학교 선생이나 교회 성가대 지휘자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대학 신문사 시험을 봤는데 또 떨어졌어요. 그래서 방송반에 들어갔고, 아나운서까지 이어졌죠.”

 

그는 사회에 나와서도 몇 차례 고배를 마셨다. 대학 재학 중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고, 다음 해에 합격했다. 군 입대 후 MBC 시험을 봐 옮겨갔다.

 

시험을 보면 으레 첫 번째는 떨어지는 팔자인가 봐요(웃음). 그렇게 KBS에 들어갔는데 당시에는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9급 공무원 신분이었어요. 교육을 마치고 지방으로 발령이 났는데 아버지께서 장남을 지방에 보내는 걸 내키지 않아 하셨어요. 언제 서울로 다시 올지 기약이 없었고, 지방에서 끝날 수도 있었으니까요. 학군단으로 군에 입대했고, 제대를 앞두고 당시 인사동에 있던 MBC 시험을 봐서 합격해 1969년에 발령받았어요.”

 

전성기 때 그는 1주일에 14개의 고정 프로그램을 소화했으며 대통령 취임식, 기념식, 가요제 등 중요 행사 진행도 맡았다. 방송일을 접은 후에도 언젠가 기회가 다시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그에게 새로운 일이 찾아왔다.

 

제주 MBC 사장을 끝으로 MBC에서 나오면서도 쓸모가 없어졌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서운한 생각도 없었고요. 드라마, 코미디까지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을 원 없이 다했으니까요. 좀 쉬려고 했는데 여기저기서 저를 오라고 했어요. 그때 학군단 후배인 경기대 총장께서 충정로캠퍼스에 새로운 학부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해서 학교로 갔죠. 2003년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 차관급인 평북도지사가 됐어요. 지역 연고가 있다 보니 여러 차례 이북 도민 행사 사회를 봤는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천거를 했어요. 학교에서는 휴직하고 봉사하고 오라고 해서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까지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요.”

 

열심히 달려온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2009년 말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고 긴 시간 병마와 싸웠다.

 

의사가 완치 가능성이 50%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6년 동안 아홉 번이나 시술을 받았어요. 병에 걸리면 본인의 의지가 강해야 하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해요. 환자 가족이 의연해야 하고요. 그래야 치유 가능성이 높아져요. 아플 동안 아내가 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헌신해줬어요. 아이들에게는 아빠 앞에서 울지마라고 했고요. 손주들을 보고 제가 눈물을 흘렸어요.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왜 이렇게 됐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자존감을 상실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2017년에는 심장에 박동조율기인 페이스메이커를 달았어요. 지금도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어요. 근데 의사들은 절대 완치라는 말을 안 써요. 지금까지 잘 되고 있다고만 하죠(웃음).”

 

병을 이겨낸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뭘 꼭 해야겠다는 욕심, 욕망이 없어졌다고도 했다.

 

제가 가진 걸 나눠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하려고 해요.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죠. 분명한 건 걸어온 시간보다 앞으로 걸어갈 시간이 훨씬 적다는 거예요.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전적으로 제 몫이고요. 흔히들 병마와 싸워 이겨냈다는 말을 하는데 병과 싸우면 안 돼요. 병에게 나 좀 도와줘’ ‘너도 내 생각 좀 할 수 있잖아라고 말하며 더불어 가야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원망, 서글픔 등 미묘한 감정도 싹텄어요. 그러면서 차인태가 이것밖에 안 돼하는 반작용도 생겼고요. 아나운서로 일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가수 오승근의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 가사가 마음에 쏙쏙 들어와요(웃음). 축구도 전반전 마치고, 쉬었다가 후반전을 하잖아요. 전반전을 다시 뛸 수는 없지만 후반전을 준비해야죠.”

 

그의 후반전은 재능기부다. MBC 아카데미 스피치 최고위 과정원장을 맡아 사람들에게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치고, 아나운서 동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직도 맡았다. 5일 그의 회장 취임식이 열렸다.

 

후배 아나운서들과 함께 회계사, 변호사,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말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요. 첫 과제로 1분 동안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땀을 흘리며 절절매요. 그런 분들에게 태어나서 처음 말을 배우는 것처럼 차근차근 가르쳐주죠. 한국아나운서클럽에는 1500명의 회원이 있어요. 1950년대에 방송하시던 원로들도 계시죠. 아나운서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 단체지만 좋은 일도 많이 해요. 초등학교 교과서를 표준발음으로 녹음해 보급하고, 탈북민의 사투리도 고쳐줘요. 또 다문화 가정에 우리말을 가르치기도 하고요. 아나운서들은 우리 언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요.”

 

그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는 없냐고 말을 건네자 후배들에게 항상 걸걸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할 걸’ ‘했으면 좋았을 걸이에요. 후회를 동반한 단어를 쓰기 싫어해요. 물론 후회스러운 일이 있죠. 하지만 후회한들 무엇하겠어요(웃음). SBS 개국 때 백지수표를 받았어요. (급여를) 받고 싶은 만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동그라미 몇 개를 써야 억인지도 몰랐어요. 얼마를 써야 할지, 받을 건지 말 건지 고민이 많았죠. 사장실로 올라갔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최창봉 사장께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씀드렸더니 ‘MBC에서 누가 나가라고 하더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런 말 못 들었다고 하니까 그럼 아직 쓸모 있다는 말이네라고 하셔서 얼른 알겠습니다하고 나왔죠. 그 일도 후회 안 해요. 이미 결정한 일은 바로 잊어버려요.”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아나운서의 전설’ ‘국민 아나운서등의 수식어가 붙는 걸 무척 싫어한다. 기사에도 절대 그런 표현을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런 표현들은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박제화된 느낌이 들어요. 저는 여러 아나운서 중 하나였을 뿐이거든요. 많은 동료가 도와줘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죠. 오로지 방송이 좋아서 미친 듯 달려왔어요. 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지닌 재능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이왕 맡은 프로그램을 남보다 멋지게 잘하겠다는 욕심도 컸고요. 제가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

  

그에게 바라는 일이 있냐고 물었다.

 

지금 하는 일을 충실히 해야죠. 또 만약 기회가 된다면 압록강 변 고향에 가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 형제가 살아 계시면 꼭 만나뵙고 싶어요. 평양, 금강산 등 방송 때문에 북한에 여러 번 갔었지만 피붙이를 만날 기회는 없었거든요.”  


김두관·송승환도 출연아직까지 불쑥 인사하는 사람 있어


17년 진행 장학퀴즈

 

차인태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의 대표 프로그램인 장학퀴즈’(사진)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경남지사를 지낸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송승환 PMC프러덕션 총감독, 이규형 영화감독, 가수 김동률 등이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차 회장은 “‘장학퀴즈를 통해 많은 사람을 알게 됐고, 요즘도 불쑥 와서 인사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여행 가다가 기내에서 승무원이 다가와 장학퀴즈 출신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내릴 때까지 잠을 못 자요(웃음). ‘장학퀴즈출연자 결혼식 주례도 많이 했어요. 거절을 못 하겠어요.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가 찾아와서 좀 어떠시냐고 묻길래 누구시냐고 했더니 장학퀴즈 출연자라고 하더라고요. 다들 여전히 저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다들 훌륭하게 자라서 사회의 동량 역할을 하는 걸 보면 뿌듯해요. 감사하는 마음도 들고요.”

 

장학퀴즈외에도 굵직한 국가행사나 대형 축제의 진행을 맡은 그에게 어떤 프로그램이 가장 기억에 남냐는 질문을 던졌다.

 

“MBC 입사해서 처음 맡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밝아오는 우리 마을이에요. 농사정보를 전하고 각 지역에서 녹음을 따와 제철 식재료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새벽 5시에 시작하는 방송인데 잊히지 않고 기억되네요. TV 프로그램으로는 여보여보게임이 생각나고,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모닝쇼에서 리포터로 활동하던 기억도 나네요. 그땐 정말 많이 돌아다녔는데 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울릉도에 해돋이 중계하러 갔다가 비가 와서 사흘 동안 갇혀 있다가 돌아와 회사에서 혼나기도 했어요(웃음).”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5년 동안 진행했으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도 10년 동안 그가 맡았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나이 대별로 각기 다른 기억을 지니고 있죠. 문주란 세대, 조용필 세대, 변진섭 세대 등 전 세대를 관통하진 못하지만 각자의 시대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진행을 할 때는 미인들 만나서 좋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요.” 


문화일보 : 2019년 03월 06일(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