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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풍월 사선암 2018. 4. 17. 08:53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이명박 대통령시절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원로 언론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막걸리 잔이 돌고나서 한 원로 언론인이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노예근성을 없애야 해요. 무슨 일만 터지면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게 노예근성 아니고 뭐겠어요? 이제 우리도 경제대국이예요. FTA협정이 맺어져서 이제 미국도 우리에게 함부로 경제제재를 못해요. 북한은 소련이나 중국의 도움 없이도 계속 잘 버티고 있어요. 미국과도 맞짱을 뜨고 말이죠. 그런데 남쪽은 아직도 철저하게 기고 있단 말이예요. 이제 우리가 항공모함을 만들어 동해에 띄우면 될 텐데 미국함대가 동해안에 와서 지켜주기를 바라는 인간들이 있단 말이요.”

 

그 말을 듣던 또 다른 언론인이 맞장구를 치면서 화답했다.

 

맞아요, 의식자체가 미국의 반식민지화 된 사람들이 많지. 6.25때 미국의 어마어마한 물량적 공세와 함께 재즈문화가 들어왔지. 정체성이 약했던 우리 기성세대가 미국의 삼류문화에 빠져 의식자체가 흔들려 버린 면이 있는 거야. 대한민국의 군사작전권이 지금까지 주둔 미군사령관에게 있고 서울 한복판에 오랫동안 미군부대가 존재하는 걸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는 이해 못하지. 독립국가의 안보주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는 거야. 이제 시대가 바뀌었어요. 미국에 의존하지 말고 이제 우리도 질 높은 핵개발을 해서 독자적으로 맞서야 해요.”

 

원자폭탄 개발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집념어린 목표였다. 전쟁억지력으로서의 원자력이자 경제적 성장과 발전의 동력으로서의 원자력이었다. 미국의 도움 없이 우리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염원이었다. 월남전에서 허덕이던 미국의 닉슨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안보는 각 국가가 스스로 책임지라고 했었다. 19713월 한국에서 미7사단 병력 2 만 명이 나가고 197611월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같은 작은 나라는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바늘로 감싸야 사자 같은 큰 맹수도 함부로 덤비지 못합니다.”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강대국 사이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가 군사적 일등국가가 되어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핵이 개발되어야 했다. 그 이후 미국은 원자력과 관련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했다. 1971년 고리1호기를 착공한 우리가 프랑스와 플라토늄 재처리 기술 및 시설도입교섭을 추진하자 미국은 핵우산을 철수하겠다며 압박했다. 1975년 초 우리가 캐나다 원자력공사와 농축우라늄을 활용하는 원자로 도입을 추진하자 미국은 캐나다에 압력을 넣어 이를 무산시켰다. 이 무렵인 197534일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스나이더 주한대사에게 이런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우리의 기본목표는 핵무기와 운반체계를 개발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민감한 기술과 장비에 대한 한국의 접근을 금지하고 한국이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하라. 또 한국의 핵관련 시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

 

19758월 서울에서 열린 8차 한미안보협의회에서 슐레진저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미관계를 손상시키는 가장 안 좋은 요소는 자체적인 핵무기 확보노력이다.”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감시의 눈을 피해 핵무기를 만드는 나라들이 있었다.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과 북한이었다. 핵무기 개발의 집념을 불태우던 박정희 대통령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총에 맞아 사망했다. 군부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대통령 레이건은 그를 바로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둘만의 만남을 가졌다. 나는 십여 년 전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중의 측근이던 이학봉 전 민정수석과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민사사건의 소송대리를 맡았던 인연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런 소리를 들었었다.

 

레이건이 전두환 대통령을 미국으로 오라고 했는데 공식적인 행사 뒤에 레이건과 전두환 두 사람이 조용히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레이건이 한국은 핵개발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핵개발만 하지 않으면 정권을 인정해 준다는 거였죠. 돌아와서 대통령과 참모들이 회의를 했는데 핵개발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미국 몰래 할 수 있느냐였죠. 이미 대덕공학센터로 위장한 핵연료개발공단은 CIA한테 걸려 버렸고 다음으로는 안면도에서 몰래 해 보려고 했는데 주민들이 어떻게나 원자력시설을 반대하고 나서는지 몰라요.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을 속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경제나 살리자고 했죠.”

 

중국이 첫 ICBM을 시험발사한지 일 년 만에 대만주둔 미군철수가 합의됐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의 핵개발이 완성됐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오에 겐 자부로는 핵무기를 몇 나라만 가지고 있고 나머지 모든 나라들은 핵을 가진 나라의 도덕성에만 의존하는 게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무기가 허용되는 몇몇 깡패들에 의해 세상이 휘둘려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 병사들이 철수를 한다고 하면 자존심을 내동댕이치고 한미동맹을 얘기하며 애걸복걸 하는 입장이 됐다. 북한이 핵개발을 완성하고 군사적 일등국가가 됐다. 우리는 핵을 가진 국가들의 입김에 휘둘리는 고달픈 처지가 된 것 같다. 대통령들은 NPT를 탈퇴하고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정부가 왜 존재하나?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라고 있는 게 아닐까.


엄상익(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