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등산,여행

頂上에 오른다고 人生이 바뀌진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오른다

풍월 사선암 2018. 3. 9. 22:15

    崔普植 기자의 K2 체험 - 스쳐간 죽음들

頂上에 오른다고 人生이 바뀌진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오른다

 

地球上에서 가장 위험한 8,611m 險山에서 보통사람이 시험해 본 인간 능력의 한계,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스쳐간 죽음들

 


폭 설 

 

밤새 귓전으로 폭설이 텐트를 연타하는 소리를 들었다. 텐트의 천장은 눈의 무게에 눌려 축 내려앉았다. 그 안에서 잠들었던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에 두 번이나 깨어나 주먹으로 텐트 안을 꽝꽝 쳤다. 텐트 위에 쌓인 눈더미가 후두둑 둔탁하게 떨어졌다.

  

새벽 3시였다. 텐트 문을 여니, 눈은 이미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빙하계곡도 능선도 하얀 눈이었다. 그 사이에 얼음()들은 거대한 고드름 모양의 첨탑을 만들거나, 산 위로부터 굴러내려 온 바위를 아슬아슬하게 안고 있었다. 이 광활한 산들의 세상 위로 눈은 퍼부어 댔다. 시야의 전진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섰던 웅장한 高峰들의 형상은 서서히 지워져 갔고 그 빈 공간에는 온통 부연 雪煙이 가득찼다.


눈은 멀리 하늘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눈이 떨어졌다. 하늘은 높지 않았던 것이다. 하늘은 내 눈높이에 있었고, 森森(삼삼)하게 옹립해 있는 高峰들의 배꼽 부근에서 흰 띠를 두른 채 걸려 있었다.


지구 아래 중심부에는 마그마라는 액체가 펄펄 끓고 있고, 그 위로 널찍한 () 같은 대륙이 떠있는데 이것들이 간혹 움직여 지각변동을 일으킨다(지질학에서는 이를 판구조 이론이라고 함). 그 널찍한 판 중에 인도 地板(지판·Plate)과 유라시아 地板이 서로 충돌해 밀고 밀리고 휘고 뒤섞여 중간으로 불쑥 솟아오른 게 히말라야의 高峰들이다. 이는 적어도 7000만년의 세월이 흐른 것들이다.


나는 홀로 이 오래된 자연의 몸통 앞에 서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내 나이는 마흔넷, 高峰들과 빙하 앞에서 나는 갑자기 유치하고 겁많은 유아일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의 길이가 아무리 늘어난들 이들에게 한낱 하루살이처럼 비칠 것이다.


이들은 말 없이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동안, 간혹 그 침묵의 세월이 좀 심심해 장난이나 한번 쳐볼까 해서, 하늘의 한 귀퉁이를 찌르고 있던 머리를 한번 흔들어 그 머리에 이고 있는 수백만t의 얼음과 바위들을 슬쩍 떨쳐낼 뿐인데 아래쪽 인간들에게는 눈사태와 낙석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려 큰 난리가 나기도 했다. 그런 것처럼 이들의 아름다움은 육안으로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크고 어마어마해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다. 우리가 일상에서 美醜(미추)를 분별하고 따짐도 또한 이러하지 않을까.


나는 이 압도할 광경에 너무나 떨려 텐트 안으로 들어와 버너를 켜고 어젯밤에 먹고 남겼던 라면에 물을 더 붓고 다시 끓였다. 오늘은 눈보라 속에서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나는 파키스탄의 북쪽에 있는 카라코람산맥의 K2(8,611m)에 와 있었다. 산악인 韓王龍(한왕룡·38) 대장의 K2 청소등반에 68일부터 30일까지 동행한 것이다. 韓王龍1994년 초오유(8,201m) 등정을 시작으로 2003년 가셔브룸2(8,035m), 브로드피크(8,047m)으로 8000m14좌를 완등한 사나이다.


대원으로는 8000m급 봉우리 7개를 등정한 베테랑 산악인 나관주(37), 미국 로키산맥 암벽등반 경력이 있는 아웃도어 스포츠전문강사 오성훈(37), 작년에 브로드피크을 등반한 적 있는 김영미(23·강릉OB), 그리고 대학산악부에 소속돼 이번이 첫 해외원정인 이인성(25·강원4)이 참여했다. 그리고 단장격으로 한국히말라얀클럽의 문영식 회장과 오인환 부회장이 동행했다.


등반의 로맨티시즘

  

韓王龍14좌 완등은 선배 산악인 嚴弘吉(엄홍길·44)朴英碩(박영석·41)에 비하면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기록은 국내에서 세 번째였다. 박정한 사람들은 2등도 기억하지 않는 법. 하지만 그는 다른 측면에서 조명됐다. 등반 과정에서 그는 단 한 명의 동료와 셰르파도 잃지 않은 것, 그리고 히말라야 속에서 다른 대원을 구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자신을 버린 행위 등 그것은 비록 산악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채점표는 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그동안 잊혀졌던 등반의 로맨티시즘을 일깨웠던 것이다.


그건 ()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저는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대원과 보조를 맞추었고 그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내려왔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산에 올라갈 기회는 또 있다. 이번에 실패하면 원정 경비를 벌어 다시 오면 된다라는 쪽으로 생각을 했어요. 설령 못 올라간들 어떤가요. 頂上에 올라간다고 인생이 바뀐 적이 없잖아요. 頂上을 밟아야겠다는 욕심이 화를 부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나요


어느 날 그가 K2청소등반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嚴弘吉朴英碩 두 선배들이 아직도 내심 경쟁을 벌이고 있는 링 안으로, 그들보다 덜 지독한 그가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선배와 다른 길로 감으로써 그만의 독자적인 산악인 루트(Route)를 열 수 있다고 여겼다.


국내 산악계에는 14좌 완등을 각축한 嚴弘吉朴英碩, 그리고 그 전의 허영호 등 세 명의 스타 산악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매스컴의 조명이 이들에게 독점되면서 스폰서들도 이들 3에게 집중됐다. 이들이 세간의 관심을 끌어들여 산악계의 볼륨을 키운 것은 사실이다. 이들로 인해 산악계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봉우리 몇 개를 더 많이 올라갔느냐로 산악인을 평가하는 풍토가 확산됐다. 반면 외롭게 고난도의 ()등반을 하고, 어떤 루트로 올라가느냐에 더 의미를 두는 登路(등로)주의를 고집해 온 산악인들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낮아졌다. 산악인은 누구나 頂上을 추구한다. 그러나 왜 산을 오르느냐, 등반을 한다는 것은 무슨 존재적 의미가 있는가, 어떤 식으로 오를 것인가, 그 과정은 어떠했는가 라는 등반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잊혀져 갔던 것이다.


초고리


지난 69일 새벽 4(현지시각)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아프간전쟁(2001) 이후 3년 만에 다시 파키스탄에 왔다. 작열하는 햇볕은 여전했다. 거리에는 간간이 K2-Golden jubilee celebration(K2봉 황금의 초등정 50주년)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고 산악인들 사이에 등반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K2. 하늘의 절대군주라는 별명을 가진 이 봉우리는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산맥 중앙부에 우뚝 서있다.


K2라는 이름은 영국의 인도측량국에서 카라코람 산맥의 봉우리들을 측정하기 위해 순서대로 K1·K2·K3·K4식으로 붙인 번호였다. K2는 카라코람의 제2봉이라는 뜻이다. 1858년 인도측량국에서 삼각측량을 통해 이 카라코람의 제2(K2)이 공교롭게도 세계에서 두 번째 높은 봉우리임을 밝혀 내면서, K2라는 이름은 굳어졌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인도 전체를 측량하는 대형사업을 벌였다. 히말라야 高峰에 대한 측량은 그 작업의 하나로 시작된 것이다. 히말라야 高峰들이 속한 티베트와 네팔은 둘 다 독립왕국이어서, 영국의 지도 작성자들은 이 두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워 영국령 인도 영토에 자리잡은 여러 삼각측량 관측소에서 측정했고, 현지 주민을 교육해 몰래 잠입시키기도 했다. 당시 히말라야 高峰에 접근하는 것은 마치 소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영국인 고드윈 오스틴이 1861년 카라코람 산맥을 탐험, K2에 이르는 발토르 빙하를 발견했다. 발토르 빙하가 세계에서 가장 넓고 깊다는 설도 있다. 영국왕립지질학회는 그 공로를 인정해 K2봉을 고드윈 오스틴으로 명명했지만, 이미 굳어진 K2의 이름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자기들이 불러온 식으로 초고리(Chogori: 초고크다, 이라는 뜻)로 부르고 있다.


미국팀과 이탈리아팀의 각축


K2가 바깥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간의 등반 욕구를 자극했다. 특히 K2 등반은 미국팀과 이탈리아팀이 치열하게 각축했다. 개별 산악인들의 무모한 열정과 명예심이 맞붙은 한편 국가 간에는 위신의 대결이기도 했다.


1909년 아브리치(Abryzzi)의 이탈리아팀이 南東陵을 거쳐 7500m까지 진출했다. 南東陵에는 아브리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K2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흔적을 남긴 셈이었다.


그뒤 1938년 찰스 휴스턴이 이끄는 미국팀이 기대를 모았다. 여기에는 유명한 셰르파 파쌍 키쿠키가 참여했다. 그러나 7925m까지 전진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 1939년 프리츠 위에스너가 있는 미국팀이 재도전했다. 셰르파 파쌍은 이번 원정에도 참가했다. 그해 719일 위에스너와 파쌍은 頂上 공격에 나서 8380m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다시 공격에 나섰으나 또 후퇴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頂上 공격에 나선 사이 공격캠프로 보급품 공급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베이스 캠프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대장 위에스너의 명령에 불만을 품고 보급품을 나를 셰르파들을 모두 철수시켜 버린 것이다.


위에스너와 파쌍은 하산했지만, 캠프7에는 몸상태가 나쁜 대원 울페가 식량도 없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결국 파쌍과 셰르파 2명은 울페를 구하러 다시 캠프7로 올라갔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이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비극의 등반은 끝났다.


1953년 찰스 휴스턴이 이끄는 미국팀이 다시 도전했다. 8명의 대원이 7750m의 캠프8까지 올라갔으나, 또 기상 악화로 발이 묶이게 됐다. 결국 대원 한 명이 고소병인 肺水腫(폐수종)으로 숨지고, 나머지 대원들은 5일간의 사투 끝에 생환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인 1954,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인 아르디토 데시오와 마리오 푸초즈는 K2 등반에 성공하려면 군대식뿐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원정대원 21명을 대상으로 신체검사, 기압 테스트 등을 거친 뒤 알프스 몽블랑의 4000m 지대에서 체력 테스트를 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10명을 선발, 해발 4500m에서 훈련캠프를 차렸다.


이런 군대식 훈련 과정을 통해, 731일 이탈리아 원정대는 아브리치능선을 타고 첫 등정에 성공한다. 당시 頂上을 밟은 대원의 이름은 공표되지 않았다. 등정한 대원 못지않게 이를 도와준 대원들도 똑같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귀국하고 나서야 뒤늦게 리노 라체델리, 아칠레 콤파뇨니였음이 밝혀졌다. 등정한 대원의 영광을 감췄다는 것은 역시 군대식이다. 그뒤 1977년 일본산악협회 원정대가 제2·3의 등정을 했다.


누가 먼저 처음 頂上을 밟았느냐는 그 영광의 무게만큼 역사적으로 논란과 시비를 불러온 적도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의 경우가 그렇다. 1953529일 영국 원정대 소속인 뉴질랜드힐러리가 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頂上에 오르는데 동반자는 셰르파 노르게이였다. 양봉업자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는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 뒤 뉴질랜드의 5달러짜리 지폐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시점 함께 올랐던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는 인도와 네팔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浮上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 둘 중 누가 먼저 에베레스트의 頂上을 밟았는가는 그 뒤로 끊이지 않는 화제가 됐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인도나 네팔로서는 이 역사적 에베레스트 登頂을 이뤄낸 텐징 노르게이를 국가적 자존심과 결부시켰다.


1986년에 국내 첫 登頂


하지만 당시 원정대장은 이러한 과열된 경쟁 분위기를 우려, 등정과정에 대해 대원들이 개인적으로 발설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먼저 에베레스트 頂上을 밟은 산악인이 힐러리냐, 노르게이냐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은 없다.


다만 노르게이가 진짜 초등정자라는 설이 확산되자, 힐러리는 마침내 자신의 책을 통해 내가 頂上에 올라서 보니 발 밑에서 뒤따라 올라오는 노르게이는 허덕거리는 물고기 같았다고 썼던 적이 있다. 노르게이는 이에 대해 불쾌한 심기를 보였으나 맞대응하지는 않았다. 노르게이는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로는 더 이상 高山 등반을 하지 않았고 인도에서 살다 1986년 숨졌다.


오는 731일로 初登(초등) 50주년을 맞는 K2으로 산악인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었다. K2를 처음 등정했던 이탈리아에서만 산악인과 트레킹족 900여 명이 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다 2001년 이후 3년째, 20여 개의 원정대가 도전했으나 K2를 등정한 적이 없어, 이번 산악인들의 도전 의욕을 더욱 불태우고 있다. 세계 여섯 번째로 800014좌를 완등한 바스크의 산악인 호니토(48)도 다시 K2을 찾았다.


국내 원정대의 경우 19868K2을 첫 등정했다. 세계에서 11번째 성공이었다. 당시 86아시안게임 기념을 위해 전국에서 베테랑 산악인 16명을 선발했다. 이들 중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씨 등 3명은 새벽 5시쯤 캠프5(8,250m)를 출발, 11시간 16분간의 사투 끝에 頂上을 밟았다. 당시 K2에는 13개의 원정대들이 들어와, 모두 27명이 등정했다. 이 과정에서 셰르파를 포함해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뒤로 2000년 영·호남 합동대에 의해 국내 再登이 이뤄져, 당시 8명이 등정했다. 이 해에는 별도로 嚴弘吉의 원정대가 K2를 등정하면서 14좌 완등의 위업을 달성했고, 韓王龍도 이 원정대에 참여해 頂上을 밟았다.


韓王龍은 이 등반 과정에서 목숨과도 같은 자신의 산소통을 선배 대원에게 넘겨준 일화가 있다. 나중에 나는 젊으니 다시 올 수 있지만 선배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러다가 下山 과정에서 치명적인 위험에 빠졌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눈보라에다 의식이 몽롱해져 길을 잃은 것이다. 결국 7000m 지점에서 하산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그럴 즈음 바로 앞에 노란 오줌자국이 보였다. 하산하던 누군가가 오줌을 누었던 모양이다. 그걸 이정표로 삼고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왼쪽 대각선으로 50발자국, 다시 반대쪽으로 50발자국씩 걸으며 더듬더듬 내려와 생환했다. 하지만 그는 고소증세로 인해 네 차례나 뇌혈관 수술을 받았고, 1년을 쉬었다. 그런 뒤 바로 그 ()의 산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포스코 팀 3명의 참변


우리는 라왈핀디 시내에 있는 샬리마르 호텔에 묵었다. 요리사 덴지(39)와 셰르파 다와(31)가 네팔에서 비행기를 타고 건너와 원정대에 합류했다. 덴지는 한국 주부보다 더 한국 음식을 잘 만드는 친구였다.


점심식사 후 한국대사관에 갔다. 파키스탄에는 교민이 통틀어 400명이 채 안 된다. 최혁규 참사관이 원정대가 가는 지역에 종교 간 분쟁으로 야간통행금지가 내려졌으며 위험하다고 걱정했다.


이날 중국 티베트 지역에서 K2로 올라가는 포스코 산악팀 중 3명이 6600m에서 실종됐다는 다음과 같은 悲報(비보)가 전해졌다.


<8일 새벽 해발 6600m 지점의 캠프2에서 대원 4명과 셰르파 2명이 텐트 2동을 친 채 잠자던 중 눈사태가 발생해 한 텐트의 대원 3명이 실종됐다(나중에 숨진 채 발견됨). 다른 텐트에 있었던 대원 한 명과 셰르파 2명은 무사히 빠져나와 베이스 캠프로 귀환했다. 생존자에 의하면 사고 직후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동료 3명이 함께 잠을 자고 있던 텐트가 눈 속에 사라져 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 뉴스로 인해 국내에 있던 내 아내는 상당히 우울했다고 한다. 같은 지점에 텐트 2동을 쳤는데, 그중 하나만 눈사태가 휩쓸어 갔으니 운명이란 무엇인가. 하필이면 남편이 K2로 향하던 날에 다른 원정대가 그런 변을 당하다니, 이게 무슨 전조인가. 그날 밤 괴상한 꿈까지 꿨다고 했다.


눈사태에 의한 포스코 원정팀의 비극을 이야기하던 중, 韓王龍19949월 초오유(8201m) 원정 때 캠프2의 텐트 안에서 밥 먹다가 눈사태를 만난 경험담을 꺼냈다. 그날은 원정대들이 원래 텐트를 치는 지점보다 위쪽으로 200m 높은 곳에 쳤다. 대원들은 전국에서 선발된 경험 있는 최강의 산악인들이었다. 캠프3을 치지 않은 채 곧바로 頂上 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가능한 한 캠프2를 높이 쳐야 頂上에 올라가는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텐트 지점은 지형상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문제될 것으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경험 있는 산악인이라면 지형을 보면 텐트를 쳐서는 안 되는 곳을 안다. 눈사태를 피할 수 있는 데를 직감적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하지만 등반 중 육체적으로 지치고 판단이 흐려지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순리를 벗어나게 된다. 도저히 칠 수 없는 지점인데도 오늘 하룻밤은 괜찮을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텐트를 쳐버린다고 말했다.

그 지점에 텐트 2동을 쳤다. 그중 한 텐트에서 막내 대원이었던 韓王龍이 식사 준비를 했다. 양곱창 찌개를 끓였다. 텐트 문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그는 양말까지 벗고 있었다. 그런 뒤 옆 텐트에 있는 嚴弘吉, 朴英碩 등에게 식사준비 다 됐다며 건너오도록 했다.


한 텐트 안에 8명의 대원들이 모여 들었다. 텐트 문쪽에 앉은 韓王龍이 먼저 찌개 맛을 봤고, 이어 嚴弘吉이 숟가락을 든 채 맛을 보려는 순간, 하는 굉음이 났다. 눈사태가 텐트를 덮친 것이다. 그는 열린 텐트 문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런 뒤 아래쪽에 있는 다른 외국인 텐트가 있는 장소 근처로 굴러갔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마주치는 순간 사람의 행동은 본능적으로 나옵니다. 저는 눈깜짝할 사이에 마치 바퀴벌레처럼 두 손으로 50m를 기어서 다른 외국인 텐트 안으로 얼른 들어갔어요. 너무나 겁나고 두려워 다른 대원을 구출할 마음도 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정신차렸을 때도 텐트 문으로 얼굴만 내밀고 외국대원들이 우리 텐트로 뛰어가 구조하는 광경을 벌벌 떨며 지켜봤을 뿐이었습니다.


굴러 내려온 눈사태의 눈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습니다. 눈사태를 맞으면 눈 속에 묻혀 질식사하기에 앞서 강한 타격을 받아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사태의 눈은 너무 단단해 삽으로 파내기도 어렵습니다. 외국 원정대가 없었다면 몰살했을 겁니다. 당시 운좋게 구출된 嚴弘吉 선배는 왼손에 원래 들고 있던 숟가락을 그대로 들고 있었어요. 워낙 창졸간이라 숟가락을 놓을 사이도 없었던 겁니다


버리고 온 쓰레기를 줍기 위해서


다음날 우리는 파키스탄 관광청에 등반허가증을 받으러 갔다. 히말라야 高山 등반을 하려면 등반허가료를 내야 한다. 7인 기준 원정대의 경우 등반료가 12000달러이다. 에베레스트의 경우에는 5만 달러여서 富者만이 에베레스트에 올라갈 수 있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한다. 베이스 캠프까지 트레킹을 할 경우에는 1인당 50달러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K2 등정 50주년을 맞아 등반 허가료를 절반으로 깎아 주고 있었다. 그래서 6000달러, 여기에 환경훼손 예치금 200달러가 더 붙는다. 하지만 이번 K2 청소등반에는 파키스탄 정부에서 등반 허가료를 면제해 줬다.


디지털 카메라의 사용은 엄금됐다. K2는 인도와의 국경지역이므로 디지털 카메라를 허용할 경우 군사기밀이 즉시 전송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요즘 카메라치고 디지털 아닌 게 있는가.


관광청 측은 즉석에서 배석한 정부연락관인 소령 아씸(31)에게 500달러를 미리 지불하라고 명했다. 원정대와 동반하는 정부연락관은 도시에 머무는 동안 하루 30달러, 산 속에 있을 경우 15달러로 일당이 책정된 것이다. 그의 등반 장비 구입비로 1000달러가 지급됐다. 물론 그는 장비를 사지 않았다.


이날 韓王龍이 청소등반을 위해 파키스탄의 환경단체 MGPO(산과 빙하 보호기구)와 함께 한 공동회견은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000K2등반 때 비록 나는 죽을 뻔했지만 당시 우리 원정대는 頂上을 밟는 데 성공했어요. 頂上에 오르고 나면 뒤에 남은 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우리 몸만 빠져나와 철수했습니다. 텐트·식량 등은 산 속의 쓰레기가 돼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얼음 속에 묻힌 채 얼어붙어 이제 피켈로 뜯어 내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2년 뒤 브로드피크원정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K2베이스 캠프에 있는 일본 원정대의 텐트로 놀러갔지요(브로드피크 베이스 캠프와 K2 베이스 캠프와는 1시간 거리). 식사대접을 받았는데, 녹슨 통조림을 내왔습니다. 캠프 1에서 다른 원정대가 버리고 간 것을 텐트 속에서 주워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산 깻잎·마늘장아찌가 담긴 통조림이었습니다. 한국원정대가 버린 것들이었어요.


등반의 끝은 頂上을 밟는 게 아니라 살아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금껏 용케 저는 살아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이 산 속에서 버린 쓰레기를 되갖고 오는 것이야말로 제 등반의 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등반 과정에서 남긴 제 흔적을 지우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2.5~3t의 등반 쓰레기를 갖고 내려오고 이 중 한국 쓰레기는 반성의 계기로 삼기 위해 국내로 들여와 전시하겠다고 덧붙였다. 피켈로 얼음 속에 꽁꽁 얼어붙은 등산 장비 및 식량을 캐내어 그만한 양의 쓰레기를 모을 수 있을지, 결과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포터와 임금협상


611일 금요일, 새벽 430분에 눈을 떴다. 오전 8시 스카르두(Scardu)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드디어 카라코람 산맥으로 들어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산은 끝없이 산으로 중첩됐다. 검고 윤기나는 지구의 근육이었다. 산맥 속의 평지 마을 스카르두, 공항의 맞은편 돌산에 Welcome to SCD라고 쓰여 있었다. 마을 주변에는 온통 부대였다. 섭씨 22,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쾌적했으나 길바닥에 먼지가 너무 많이 났다. 발을 내딛거나 자동차가 지나가면 가스실처럼 변했다.


공항 근처의 파이오니아 여관에 묵었다. 우리가 오자마자 현지 주민 4명이 일자리를 달라고 찾아왔다. 이 마을 주변으로 1만여 명이 산다. 마을 중심에는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야채가게, 조악한 옷가지를 걸어 놓은 가게, 음료와 과자류를 파는 슈퍼마켓,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상점들이 먼지 속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앞으로 베이스 캠프에서 한 달 반 이상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준비해 온 장비 및 물품 중에 빠진 것을 여기서 구입했다.


원정은 대대적인 살림살이의 이동이다. 원정대 물품 항목을 일별하면, 취사도구(석유버너·가스버너·압력솥·식칼·행주·수세미·밥그릇·접시·보온병·감자깎이·밥주걱·국자 등 38), 개인 등반구(피켈·아이젠·헬멧·카라비너·헤드랜턴·의류·텐트·눈삽 등), 주식류(·라면·밀가루 등), 부식류(김치·깍두기·고등어캔·미역·배추·감자·양파·달걀 등), 양념류(고추장·된장·간장·마늘, 식초·다시마·후추·고추 등), 간식류(비스킷·사탕·초콜릿·생강차 등) 등이 있다.


이들 장비와 식량은 25kg 단위로 나눠야 했다. 현지포터들은 이 무게 이상의 짐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짐을 지고 갈 포터는 120명쯤 쓰기로 했다. 1인당 일당 240루피(1달러는 58루피)와 장비비 200루피, 이들 포터가 먹고 자는 식량과 텐트를 지고 갈 포터도 이 안에 포함돼 있다. 베이스 캠프 위에서 짐을 나르게 될 高所(고소)포터는 10명을 뽑아 일당 1000~600루피, 장비 구입비로 35000루피를 지급하기로 했다.


네팔의 히말라야 봉우리를 원정한 산악인치고 포터들과의 임금 협상을 둘러싼 힘겨루기에 시달리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이들은 산을 잘 올라가다가 중도에 짐을 던져 놓고 주저앉으며 일당을 올려 달라는 스트라이크를 벌인다. 이럴 때 원정대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파키스탄 포터들은 네팔의 포터와는 달리 한번 맺은 계약을 번복하지 않는다. 좀더 신사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고 온 짐이 소모품이어서 나중에 더 이상 지고갈 게 없으면 그 때까지의 일당을 계산해 받고는 하산한다.


무모한 열정


어쨌든 고산등반은 자본주의적 계산으로 따져보면 낭비적 면에서 어처구니가 없다. 이번 청소등반에는 LG청소기 싸이킹이 자신의 제품과의 이미지가 맞다며 8000만원, 韓王龍이 소속된 등산장비업체인 에델바이스가 장비와 2000만원을 협찬했다. 1억원을 들여 힘들게 K2청소를 하느니, 차라리 파키스탄 정부에 그 돈을 환경기금으로 기부하는 게 경제적이지 않을까.


등반행위는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모한 열정이랄 수밖에 없다. 산악인이란 목숨까지 담보하며 올라갔다가 결국 내려와야 하는 무의미한 행위에 인간이 얼마나 집착할 수 있으며, 그 집착이 때로는 인간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자들인가, 아니면 편집증이나 자기도취에 함몰되어 있는 자들인가. 그럼에도 분업의 인간 사회란 가끔 무용한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밥을 허락하고 밥 먹을 권리를 눈감아 주고 있으니 다행스럽다.


이날 머리를 감고 나니 감기 기운이 돌았다. 파키스탄에서는 물을 조심해야 한다. 3년 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여기에 왔던 종군 기자들은 하나같이 설사로 고생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공포의 설사 증세가 보였다. 이날 하루 화장실만 다섯 번 갔다.


새벽 2시쯤 눈을 떴다. 배 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화장실을 다녀와 감기약과 비타민 C 한 알을 복용하고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깨어나니 감기 기운이 많이 가셨다. 그러나 설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같은 방을 쓴 이인성군의 증세는 좀더 심했다. 모처럼 TV와 신문, 책을 안 보고 술을 안 마시니,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다음날 대원들은 현지에서 구입한 배추와 무로 김치를 담갔다. 나는 마을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햇볕이 작열하는 도로변에서 주민들이 쭈그리고 앉아 돌과 흙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 마을에는 흐르는 물이 없었지만, 백양나무와 뽕나무가 뻗어 서있다. 둘러앉아 시커먼 오디를 먹고 있던 마을 처자들이 낯선 이방인을 힐끗 쳐다보며 자기네들끼리 웃었다.


이번 원정 일정을 준비해 온 트랑고(트랑고은 산악인 사이에 巨壁등반코스로 유명함) 여행사의 마부 사장(40)이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스카르두가 고향인 그는 여기서 토호 집안이다. 이번 원정대의 단장인 문영식 히말라얀 클럽 회장의 칠순 생신 잔치를 열어 주겠다는 것이다. 케이크와 위스키가 준비되고, 염소 바비큐를 내왔다.


마부는 스물네 살 때부터 여행업을 시작했다. 그는 1980년부터 한국원정대와 인연을 맺어 왔고, 1988년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작년에 한국알파인클럽 초청으로 한국 방문을 위해 비자 신청을 냈으나, 대사관 측이 불법체류를 의심해 꼬치꼬치 묻자 자존심이 상해 서류를 그냥 챙겨 들고 나왔다고 한다. 10시쯤 여관으로 돌아와, 꾸려놓은 짐을 모두 지프 5대에 실었다.


천길 낭떠러지 드라이브


다음날 새벽 5시에 기상했다. 아스콜리캠프로의 출발이다. 나는 韓王龍과 함께 차양막이 없는 지프(jeep)에 올라탔다. 차양막이 없으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건 되돌릴 수 없는 판단착오였다. 직사광선은 곧바로 머리를 내리쬐었다. 그 직사광선은 암벽을 관통해 그 속에 박혀 있던 바위들을 허물허물 돌부스러기로 만든 놈들이다. 산기슭과 계곡에는 그렇게 해서 부숴지고 굴러 내린 잡석과 흙들이 쌓여 있었다. 내 머리와 몸통도 직사광선에 거의 녹을 뻔했다. 지독한 하루였다.


게다가 지프는 깎아지른 직벽과 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간신히 나있는 峽路(협로)를 달렸다. 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는 노폭이었다. 운전사가 이리저리 핸들을 꺾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래로 밀크커피색의 탁류가 거세게 굽이쳐 흐르는 계곡 양편에 나무를 줄로 엮어 만든 다리를 건널 때도 있었다. 빙하 녹은 물이 계곡을 타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이로 지프는 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작은 마을을 지날 때면 한 떼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할로우 오케이를 외치며 따라왔다.


오후 445분쯤 목적지인 아스콜리마을(3,000m)에 닿았다. 마을 주변으로는 초록의 밀밭이 펼쳐 있고 염소를 많이 길렀다. 이곳 염소들은 등반대와 포터를 위한 식량이다. 마을을 끼고 흘러가는 계곡물(인더스상류)에는 석회와 황토가 뒤섞인 분말액 같았지만, 현지 주민들은 그냥 식수로 마셨다. 아스콜리는 카라코람 산맥의 숱한 高峰으로 들어가는 등반대의 이정표에서 마지막 마을이다. 이후 산 속으로는 사람 사는 마을이 없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캐러밴(원정대가 베이스 캠프까지 며칠 동안 산 속을 걸어가는 것)이 진행된다.


텐트 생활이 시작됐다. 기압이 내려가는 高山에서의 밤은 조심스러운 것이다. 자칫 고소병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밤중에 두세 차례 깨긴 했으나 아늑한 잠자리였다. 새벽 4시 기상, 빙 둘러싼 高峰들의 틈 사이로 난 한 조각 창공에 초승달이 희미하게 걸렸다. 동은 터있었다. 포터들은 텐트도 없이 그냥 한데서 침낭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침낭 위로 두꺼운 푸른 비닐 덮개를 여럿이 함께 덮고 있었다.


아침에는 포터들에게 짐 분배를 했다. 저울로 짐무게가 25kg을 초과하는지를 일일이 체크하느라 시간이 소요됐다. 캐러밴을 시작한 것은 오전 840. 이미 햇볕은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韓王龍은 쉬엄쉬엄 걸었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선배님 좀 쉬시죠. 빨리 도착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저 오늘 밤 중으로 가면 됩니다며 붙잡곤 했다. 원정대 안에서는 통상 엄격한 규율이 있지만, 그는 대원들에게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리는 걸 즐겼다. 타고난 천성인지,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嚴弘吉朴英碩이라는 두 선두주자의 그늘에 묻혀 넘버 3로 오래 지낸 탓인지 그는 매사에 각박하게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嚴弘吉·朴英碩에 대한 추억


嚴弘吉朴英碩이 그 명성에 힘입어 기업체의 후원을 받을 때, 그는 산을 가기 위해 직장에 다니며 후배들과 원정경비를 모았다. 그가 꾸리는 원정대는 2~3명으로 늘 빠듯했다. 그는 산을 타는 것은 누구에게 고용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여서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게 싫었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에게는 스폰서가 없었다.


게다가 嚴弘吉朴英碩은 아직도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朴英碩의 경우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이후 8년 만에 8000m급 봉우리 14좌를 완등했다. 하지만 그는 頂上에 올라간 뒤로 더 초조함에 쫓기는 것 같았다.


독보적인 존재가 돼야겠다는 명예욕, 뭔가 더 놀라운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 욕망이야말로 성취의 원동력이다. 14좌 완등 이후 그는 7대륙 최고봉을 찾아다니며 올라갔다. 이제 남은 것은 북극점과 남극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히말라야 8000m14좌 봉우리와 7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의 도달에 성공하면 이른바 모험의 그랜드슬램(Grandslam)이 될 것이다. 세계 누구도 하지 않았던 초유의 기록이다. 그는 2003년 북극점에 도전해 실패했으나, 올해 초 남극점까지 걸어가는 데 성공했다.


나는 1998嚴弘吉의 마나슬루원정대와 2003년 북극점 원정대에 동행 취재한 바 있었다. 팔자에도 없는 이런 극지 원정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사나이의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내 각박한 인생은 참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인연으로, 풍문으로만 듣던 高山 등반과 전문산악인의 세계에 접근하게 됐으며, 이 야심만만한 산악인 朴英碩을 한 인간으로서 곁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국내 처음으로 200014좌를 완등한 嚴弘吉도 강박감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씨는 나와 동갑의 나이다. 그는 원정을 가면 후배 산악인들에게 엄하고 까다로운 것으로 소문났다. 그러나 산을 떠나오면 소탈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14좌 봉우리를 다 오르고 나니 갑자기 내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이후로 그는 살아가는 목표를 정하지 못해 한동안 방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는 공인된 14좌봉 주위에 있는 8000m급 위성 봉우리 2개를 더 오르겠다고 선언했다. 산악계 일각에서는 위성봉 2개를 더 오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말도 나왔지만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세계 최초로 8000m16개 봉우리 도전이라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


그는 2003년 원정대를 꾸렸고 먼저 로체남쪽에 붙어 있는 로체샤르(8,400m)에 도전했다. 하지만 눈사태로 대원 2명을 잃은 뒤 눈물을 머금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하고 돌아온 그에게 14좌 완등 위업으로 만족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솔직히 14좌를 완등하고 난 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도 되는가라며 온갖 망상에 시달렸다. 몇 달 동안 내리 술만 마셨다. 그러면 함께 원정하다가 숨진 후배들이 어른거리며 형은 왜 여기 있어요?라며 말을 걸어왔다. 위성봉 2개를 더 오르는 것은 별로 주목받지 못할지 모르나 나는 산에 가지 않고는 할 일이 없다. 비록 올해 로체샤르 원정에 실패했지만 내년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그의 선언대로 嚴弘吉은 얼마 전 히말라야 캉첸중가의 서쪽 위성봉으로 분류돼온 얄룽캉(8,505m)를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넘버 3韓王龍200314좌 완등을 하고 난 뒤, 더 이상 새로운 도전에 뛰어 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주변에 집념의 산악인들만 보아왔기 때문인지, 이렇게 맥없이 말하는 산악인이 참으로 예외처럼 느껴졌다. 통상 그 정도 성취를 이룩한 산악인이라면 자신의 행위, 심지어 별 생각없이 한 습관 같은 행위에 대해서까지 깊은 의미를 붙이고 싶어하는 법이다.


14좌 완등은 제가 좋아서 했고 스스로에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줬으니 몇 번째 기록이든 상관없어요. 2003년 브로드피크(8,047m)頂上에 올라 14좌 완등을 이루었을 때, 베이스 캠프에서 무전기를 통해 頂上에 선 제게 소감을 물었어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 아무 생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내심 기뻤지요. 앞으로는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제는 사회 속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계속 하려면 결혼은 왜 했고, 아이는 왜 낳았는지…』


산은 계속 있는 것이고…』


내가 韓王龍과 처음 만난 것은 1998114일이었다. 당시 朴英碩 대장의 원정대를 동행해, 마나슬루(8,163m)으로 갔을 때였다. 마나슬루기슭의 마을인 사마가웅까지 우리는 헬기를 타고 갔다. 장비와 식량을 모두 내린 헬기가 막 이륙하려고 할 때, 검붉은 얼굴에 잡초처럼 자란 수염을 매달고 있던 두 사내가 다가왔다. 韓王龍과 나관주 대원(37·이번 K2 원정대원)이었다.


이들은 40일 동안 마나슬루 속에 있었다. 그런 뒤 결국 頂上에 올라서지 못하고 하산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우리 일행이 타고 온 헬기로 하산하기 위해 하루 동안 내려갔던 산 길을 되돌아왔다고 했다. 헬기를 타기 전에 선 채로 그를 인터뷰했던 적이 있었다.


이처럼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곳곳에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가 숨어 있고 눈사태가 일어났어요. 살아 있다가 죽는 게 순식간입니다. 죽음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언제라도 이곳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걸 의식하니 두려웠습니다


나는 이 강인한 산악인의 엄살처럼 들리는 공포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의 말은 계속 됐다.


캠프3에서 야영을 하던 중, 갑자기 텐트를 날려 버릴 듯한 강풍이 불었어요. 탈출해야 하는데 텐트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켈(pickel)로 텐트의 천장을 찢고 탈출했습니다. 우리는 頂上 공격을 두 번이나 했으나 기상이 나빠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다른 팀들이 모두 하산하고 떠나자, 텅빈 산에서 그렇게 외롭고 무서웠던 적이 없어요. 우리만 남아 있다는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이제 내려간다고 아쉬움은 없어요. 그런 느낌보다 지금 살아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더 좋습니다. 산은 계속 있는 것이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언제라도 올 수 있어요. 산에 오면 늘 떠나온 집이 그립고,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이놈의 산에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도시로 나오는 순간 다시 배낭을 꾸리게 돼요.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지요. 어쨌든 내 생활은 산과 연결된 게 분명합니다


당시 그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상 없는 행위는 드물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명성인가, 자기만족인가라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설령 제가 14좌를 완등한다고 해서 무슨 큰 명성이 있겠습니까. 처음으로 완등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른 산악인들에의해 이뤄졌어요. 등반은 스포츠가 아닙니다. 전문 산악인은 인기 스포츠의 스타가 아닙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좀더 강렬한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시절 저는 국내 산을 탔어요. 그러다가 더 큰 재미를 원했고 히말라야까지 오게 됐을 뿐입니다. 저는 등반을 통한 보상이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알게 된 그가 결국 10년에 걸쳐 14좌 완등을 이뤄낸 것이다.


끝없는 모레인지대


빙하와 함께 떠밀려 내려온 바위와 잡석으로 구릉과 계곡을 이룬 모레인지대를 걸었다. 그것은 광활한 채석장이었다. 작열하는 햇볕은 바위를 쪼갰다. 잡석의 표면은 달아오른 ()로 번들거렸다. 등산화가 밟고 지나가면 자글자글소리가 났다. 발바닥에서는 불이 났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넓은 카라코람 산맥 안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산맥은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 K2봉을 숨겨 놓은 뒤 우리의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날 점심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스킷 몇 조각을 먹고 계속 걸었다. 우리는 목마르고 지쳤지만 걸어야 했다. 체력으로 걷는 게 아니라, 그렇게 걷도록 다리의 근육세포에 입력된 대로 자동인형처럼 걸었다. 이날 목적지인 졸라캠프(3,400m)는 산 속의 어둠이 찾아온 오후 6시쯤 닿았다.


615일 화요일, 오전 6시에 출발했다. 한낮의 태양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가능한 오전 중에 걷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제와 비슷한 모레인 지대가 을 따라 한없이 계속됐다. 고개를 쳐들면 빙 둘러싼 채 직립한 高峰들의 연속이고, 高山의 구성성분이란 초록 식물 하나 키우지 않으려는 바위와 잡석들이다. 고개를 숙여도 보이는 것은 高峰과 빙하에서 흘러 내려온 바위와 잡석들이다.


이 삭막하고 단조로운 광경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이 꼼짝없이 겹겹으로 갇히는 듯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더욱 등반 속도를 빨리했다. 韓王龍은 김영미, 이인성 대원들과 한 조가 되어 어제처럼 쉬엄쉬엄 올라왔다. 로키산맥의 암벽 등반 경력을 자랑하던 오성훈 대원은 이 대열에서도 탈락해 뒤로 처졌다.


회의주의자 산악인, 나관주

 

나관주 대원은 방송카메라를 든 채 대원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속도를 조절했다. 그는 1998년 낭가파르밧(8,125m) 등정을 시작으로 8000m급 봉우리 7개를 등정한 베테랑이다. 작년에는 브로드피크(8,047m)과 가셔브룸2(8,035m)을 올랐다. 하지만 이번 원정에서는 촬영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등반을 하면 대원 중 누군가는 촬영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頂上에 올라서 있는 장면의 사진은 登頂 여부의 증거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高山에서의 촬영은 등반능력이 필요하다. 일반 방송맨들이 무비 카메라를 들고 베이스 캠프 이상을 따라 올라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높이 이상은 카메라를 다룰 줄 아는 대원이나 셰르파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나관주는 주로 韓王龍의 파트너로서 카메라를 맡았다. 그와 韓王龍은 같은 전주개척산악회 출신이다. 그는 처음 스틸 카메라만 했으나, 1993년부터 방송국의 등반 다큐멘터리 수요가 있자 무비 카메라를 배웠다.


1995년 에베레스트北東陵을 등반할 때도, 그는 방송국의 요청으로 촬영하기 위해 따라 올라갔다. 공격전진캠프에서 고정자일을 잡고 올라가는 도중 눈사태가 덮쳤다. 앞선 대원들이 매달린 중력 때문에 하켄(바위에 박는 못)과 스노-바가 빠졌고 자일이 풀어지자, 그는 몸 앞의 바위를 꽉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나 한순간에 그의 몸은 빨려들 듯이 눈사태에 휩쓸렸다. 눈 속에 파묻힌 그는 숨을 쉴 공간을 만들려고 애썼다. 이렇게 죽는구나. 다행히 눈사태가 크지 않아 모두 몰살하지는 않았다. 앞서 올라가던 셰르파 4명 중 2명을 잃었다.


눈더미 속에서 구출되면서 고글(눈 보호 안경)이 벗겨졌던 모양입니다. 그걸 의식 못 하고 내려왔는데 雪盲(설맹: 눈에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각막이나 결막에 염증이 생겨 앞이 안 보이는 현상)에 걸렸어요. 그날 밤 눈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밤새도록 신음했습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雪盲은 보통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진정됩니다


그는 이번 원정에서 촬영하는 조건으로 500만원을 받기로 했다. 30후반이 된 그는 이제 산만을 쫓아다닐 나이가 지났다.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산에 오지 않으면 결혼예식장에서 비디오 카메라 촬영을 해주고 먹고 산다.


등반을 시작할 때는 히말라야에 한 번 오는 게 꿈이었지요. 처음 히말라야를 대할 때의 가슴 설레던 기억은 여전합니다. 벌써 히말라야를 15번이나 다녀갔습니다. 한때 저도 14좌 완등의 욕심을 냈던 적이 있지요. 하지만 이제 히말라야를 동경했던 시절이 지났듯이, 그런 14좌 완등도 제게는 의미가 퇴색했습니다.


선배들이 14좌 완등을 위해 지나치게 경쟁을 벌이는 모습도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솔직히 14좌 완등을 위해서는 산에 대한 열정이나 등반 능력보다는, 스폰서를 끌어모아 원정대를 꾸리는 행정능력이 중시됩니다.


저는 지방전문대 산악부 출신으로 뒤를 봐줄 기반이 없었습니다. 궁핍하게 산을 다녔어요. 선배들에게 돈을 빌려 원정을 갔고 다녀와서 일을 해 돈을 갚는 식이었지요. 그렇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의 원정대에 묻혀서 따라가게 됩니다. 내가 꿈꿔 왔던 산도 없고, 내가 품었던 꿈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사회로 돌아오면 나는 생활인으로서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할 만큼 모아놓은 게 없습니다


1950년 안나푸르나(8,091m)을 등정함으로써, 인류 최초로 8000m급 봉우리에 오른 프랑스 산악인 모리스 에르조그(1919년생)산악인들은 자신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원정 후에도 그 어떠한 물질적 보답이 없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적었다.


사실 에르조그가 안나푸르나를 등정한 뒤 내려오는 과정은 처참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凍傷(동상)으로 손발이 썩어 들었고 雪盲의 고통으로 외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셰르파들에 업혀서 그는 반쯤 죽은 상태로 산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그의 손가락들은 마디 하나씩만 남긴 채 모두 잘려 나갔고 발가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첫 번째 기록을 가졌기 때문에 불멸의 명예를 얻었지 않는가. 그는 살아서 귀환한 뒤 체육장관과 샤모니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선두주자인 嚴弘吉朴英碩은 각각 그 명성에 힘입어 등산장비업체의 임원으로 영입됐고, 韓王龍도 에델바이스의 홍보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산에 머물면서 세간의 명성을 얻지 못했던 여느 전문산악인들은 나관주의 삶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날 점심은 감자와 삶은 달걀 두 개였다. 단조로운 모레인지대로 쭉 내려오다가 후반부에 고도가 500m쯤 높아지는 산을 넘었다. 그 뒤편에 나무와 물이 있는 산기슭이 나왔다. 오후 230분쯤 목적지인 빠유(3,480m) 캠프에 도착한 것이다.


빠유 캠프에는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팀 등 등반대의 텐트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빠유 캠프에 도착하면 원정대는 무조건 하루를 더 묵어야 한다. 파키스탄 관광청이 그렇게 정해 놓았다. 이 쉬는 동안 포터들은 자신들의 주식인 짜파티(밀가루를 반죽해 화덕에 구워 호떡처럼 얇고 넓게 만든 것)를 만들고, 원정대는 포터에게 염소를 잡아 줘야 한다.


구토증세


빠유 캠프에서 나는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라면 한 그릇을 비웠고, 좀 과식한 느낌이 있었지만 저녁도 잘 먹었다. 이 캠프에는 이강오, 전명호씨 등 대학산악부 OB들인 국내 트레킹팀도 들어와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이들 트레킹팀과의 술자리가 열렸다. 현직에서 퇴역한 이들 중년 사내는 그동안 산을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였던 만치 산길을 걷는 데 강자였다. 이번 트레킹을 오면서 소주 페트병을 9개나 갖고 와 끝없이 마셔댔다.


이들은 국내에서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며, 술을 권했다. 나는 술을 조심했다. 그런데도 이날밤 침낭 속에서 아랫배가 거북했다. 여기저기 텐트마다 묶어 놓은 염소들이 매매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속이 불편해 깨어나 밖으로 나왔는데 자정무렵이었다. 캠프장은 깜깜했다. 염소의 燐光(인광)만이 반짝거렸다. 이놈들을 몰래 풀어줘야 하나. 그렇다면 과연 달아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새벽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겁고 구토증세까지 있었다. 아침 식사에는 김치·깍두기·젓갈·미역국이 나왔는데, 전혀 식욕이 일지 않았다. 간단히 미역국에 밥을 조금 말아 먹고 텐트로 들어왔다. 누워 있는데 구토를 참을 수 없었다. 텐트 문으로 고개만 내밀고 속의 내용물을 모두 토해 냈다. 양치질을 하고 돌아오니 문영식 단장이 링거를 한 대 맞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다. 대신 촬영팀으로 온 임영재씨가 링거를 맞았다. 그의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오지 원정 경험이 처음이라 캐러밴 운행 중 계속 뒤처졌고, 그의 개인배낭은 포터가 대신 지고 왔다.


나는 잠시 텐트 안에서 잠들었는데 그 사이에 염소가 죽었다. 포터는 부엌칼로 염소의 목을 땄다고 한다. 내가 잠에서 깼을 때 한 포터가 염소의 갈비짝을 들고 텐트 앞으로 지나갔다.


617일 목요일, 설사가 그치질 않았다. 히말라야 원정 경험이 많은 韓王龍과 나관주를 빼면, 대원들은 저마다 고소증세를 앓기 시작했다. 오성훈과 이인성군은 눈 주위가 퉁퉁 부어 올랐다. 이날도 채석장이나 다름없는 돌밭길이 계속됐다. 초록의 풀과 나무는 보이지 않고, 다만 바위와 잡석들이 뿌려지고 흩어진, 숨가뿐 구릉과 계곡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따금 만년설을 이고 있는 高峰들에서 낙석이 우르르 굴러 내려오고, 허연 눈가루를 털썩거리며 눈사태가 나는 소리만 들렸다.


高所病


우리가 걷고 있는 왼쪽으로는 그 유명한 거벽의 트랑고 山群(산군)이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를 향해 一瞥(일별)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몸은 탈진해 있었다. 이날 운행은 우르두카스캠프(4,064m)까지 10시간 이상 지속됐다. 캠프는 수직의 가파른 산 중턱에 있었다. 몇 년 전 한 원정대의 단장은 너무 탈진해 이 산의 바로 아래까지 왔으나 캠프 지점까지 300m를 더 올라가지 못해 그냥 산 아래 돌밭에서 텐트를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도착한 뒤 두 시간쯤 더 지나서야 촬영팀의 임영재씨가 부축받고 올라왔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시커멓고 입술은 하다. 체력적으로도 문제였지만 그는 고소병을 앓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그의 정신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텐트 안에 눕혀 링거 주사를 맞혔다.


나머지 대원들도 얼마간 고소증세를 앓고 있었다. 가파른 산 중턱에 있는 우르두카스 캠프에 밤이 오면 상당수가 더 심한 고소병을 앓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만 해도 기분은 우울해졌다. 高所에 대한 적응력은 사람마다 생래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심한 경우 훈련과 경험, 체력에 의해서도 개선되지 않는다.


고소병은 산소를 충분히 호흡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대기권은 고도 1m까지 형성되어 있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공기의 밀도는 감소하고 그만큼 산소의 절대량도 낮아진다(공기는 질소 80%, 산소 20%의 비율임). 高山에서 인간이 산소 부족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공기 속 산소의 절대량 감소 때문만은 아니다.


기압 저하로 인해 체내에 흡수되는 산소가 줄어 드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호흡이란 산소가 肺包膜(폐포막)을 통과해 허파혈액 안에 용해되는 현상이다. 산소에 압력이 가해지지 않으면 산소는 폐포막을 통과할 수 없다. 가령, 고도 5000m에서 대기압은 400mmHg(지표에서는 760mmHg)이다. 이는 지상에서보다 산소량을 절반밖에는 몸 안으로 빨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몸에서는 산소를 더 운반하기 위해 적혈구를 추가로 생산하려고 한다. 적혈구가 많아지면 체내의 산소 운반은 쉬워지지만 혈액의 농도가 짙어져 결과적으로 혈액 순환을 어렵게 만든다. 高所에서는 인체전기분해의 균형이 크게 지장을 받는다.


이럴 경우 보통 腎臟(신장)을 거쳐 분비되는 나트륨(오줌)이 쌓여, 이것이 세포와 세포 사이에 물을 고이게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병이 水腫(수종)이며 몸이 붓는다. 다리나 얼굴이 탱탱하게 붓는 것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나 뇌나 폐로 가면 치명적이다. 수종 증세는 높이 4000m부터 나타날 수 있다.


高所를 극복할 수는 없지만, 얼마간 적응은 가능하다. 高所에서는 혈액 순환을 위해, 오줌을 계속 나오게 하기 위해, 하루에 물 4이상을 마실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느릿느릿 움직여 심장에 무리를 덜 줘야 한다.


10분 후 사망


세계에서 두 번째로 8000m14좌를 완등한 폴란드의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1989년 사망)14번째 하늘에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히말라야 등반의 경우 산의 초입에서 베이스 캠프까지 가는 캐러밴은 高所 적응을 위해 아주 좋은 기회다. 이 단계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건강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7500m 高所에 놓이게 되면 10분 후에는 의식을 잃고 얼마 있다 죽는다. 그러나 高所 적응에도 한계가 있다. 몽블랑 頂上에서는 자기 능력의 70%쯤을 발휘할 수 있고, 에베레스트에서는 20%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여기서 생리적 죽음의 한계로 간주되는 7400m 이상에서는 2, 3일 이상 머물 수 없다


나는 1998년 마나슬루 원정 때 심한 高所체험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캐러밴을 하지 않은 채 막바로 헬기를 타고 들어갔다. 高所 적응 과정이 생략됐던 것이다. 그런 뒤 하루 만에 1000m 이상을 올라갔다. 그 뒤 베이스 캠프에서 나는 음식은커녕 물을 마셔도 다 토했다.


내게 高所증세는 술을 처음 배운 사람이 밤새도록 술을 잡탕으로 섞어 마시고 두 시간쯤 자고 깨어난 뒤에 앓는 기분 나쁜 宿醉(숙취)와 같은 것이었다.


이날 밤 트레킹팀으로 온 한 약사가 내게 구토와 설사 증세에 대해 듣고서는 약을 한움큼 주었다. 단번에 복용하라고 했다. 나는 머리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털모자를 덮어쓰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상당히 개운했다. 이날 운행거리는 짧았다. 오후 130분쯤 고로 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정상적인 컨디션을 회복했다.


다음날은 콩코르디아(4,700m) 캠프를 지났다. 콩코르디아 캠프를 기점으로 8000m급 봉우리 K2, 브로드피크, 가셔브룸1·2의 베이스 캠프로 가는 길이 나눠진다. 우리는 고드윈 오스틴빙하를 따라 걸었다. 빙퇴석 능선 위로 난 소로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아래 낭떠러지에는 허연 빙하의 계곡물이 소용돌이쳤다. 이날 브로드피크의 베이스 캠프에서 1()했다.


가파른 산비탈을 넘으니 얼음꽃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세락(얼음탑) 지대가 나왔다. 나는 그 너머로 푸르스름한 K2을 보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산의 덩어리였다. 이 산의 덩어리는 호흡할 공간을 막아버렸고, 심지어 위로 창공마저 이 봉우리의 꼭대기에 찔려 찢겨졌다. K2의 굵은 아랫도리는 지상을 위로 빨아당기듯이 깊고 힘차게 박혀 있었다. 저 강인한 바위 몸통은 어디로든 인간의 발걸음을 결코 허용할 것 같지 않았다.


, 여성산악인 지현옥


620일 일요일 오전, 드디어 베이스 캠프(5,140m)에 닿았다. 베이스 캠프는 K2의 남벽 기슭을 따라 길게 자리잡고 있었다. 베이스 캠프는 마치 장터 같았다. 이탈리아·일본·스페인·중국·파키스탄팀 등 외국원정대의 텐트들이 밀집했고, 산악인들은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이날부터 베이스 캠프 생활이 시작됐다. 대원들은 텐트를 친 뒤 한 달 반 동안 먹고 살아야 할 식량·부식류를 분류했다. 한편 피켈, 자일, 벨트, 이중화 등 등산장비 점검도 이뤄졌다. 저녁에는 포터들이 베이스 캠프까지 끌고 온 염소를 마지막으로 잡았다. 이들이 남겨 준 고기로 요리사 덴지가 된장을 푼 염소탕을 끓여 왔다. 나는 식욕을 느꼈다.

 

이날 바스크팀(바스크는 스페인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나라)의 호니토(48)를 만났다. 그는 한때 嚴弘吉과 파트너가 되어 히말라야 등반을 했던 사내다. 1998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8000m14좌 완등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는 완등의 기록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그러고나서 8000m급 봉우리를 계속 올라가 이제 총 20회나 登頂하게 됐다. 그는 1994K2을 등정했다. 이번에는 에스파뇰 TV의 요청으로 등정 50주년에 맞춰 다시 이 봉우리에 오르려고 왔다. 마치 8000m급 봉우리를 오르는 게 직업인 것처럼 됐다.


내가 14좌 완등을 했는데도 당신은 또 오른다. 언제까지 오를 거냐라고 묻자, 그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아직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의 영어는 너무 짧아 인터뷰 진행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는 숨진 여성산악인 池鉉玉(지현옥)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는 1997년 지현옥과 함께 가셔브룸1頂上을 밟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그는 頂上으로부터 하산하던 중, 힘들게 올라오는 池鉉玉을 봤다. 그녀가 너무 탈진한 모습이어서, 여기서 내려가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인연


순간 나는 電流(전류)에 감전된 것 같았다. 19993월 중순경, 池鉉玉은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됐다. 나는 그녀를 실물로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다.


안나푸르나으로 떠나기 전 그녀는 나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녀는 내게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내가 당시 月刊朝鮮에 썼던 짧은 등산 긴 하산이란 제목의 마나슬루의 등반 기사에 대해 그녀는 불만이었다. 고산등반에 한 번 참여해 본 당신이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썼다는 말인가. 아마 목숨 건 히말라야 등반을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오르는 것처럼 여긴다라는 불만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내게 진정한 산악인의 세계를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만남은 서로의 일정 때문에 연기됐다. 그녀는 원정 준비를 하느라 바빴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바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안나푸르나등반을 마치고 돌아올 때 한번 만나자고 했다. 嚴弘吉의 원정대와 함께 그녀는 떠났다. 나는 서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그렇게 떠난 그녀는 안나푸르나의 깊은 얼음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녀는 무엇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녀는 원정 출발에 앞서 知人(지인)들과 이별할 때 언론에서 떠드는 걸 벗어나 조용히 산에 가고 싶고 산과 둘이서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1993년 여성산악인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했고, 1997년에는 역시 원정대장으로서 가셔브룸1(8,068m), 1998년에는 단독으로 가셔브룸2(8,035m)에 올랐다. 그녀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주)을 거의 마시지 못했지만 산과 연결됐을 때는 엄격했고 고집스러웠다. 충북 서원산악부 시절, 그녀는 산에서 장성한 남자 후배를 몽둥이질하고 오리걸음 시키는 기합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의 한 산악부 후배는 결혼하고서도 현옥이에게 엉덩이가 시퍼렇게 되도록 맞은 적 있다산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두려웠기 때문에 반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크레바스에 빠지고


621일 월요일, 밤새 눈보라가 쳤다. 텐트 위로 눈이 무겁게 눌렸다. 아침에도 눈발이 멈추지 않았다. K2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오전 10시쯤 지나 햇볕이 비치자, 순식간에 돌바닥에 쌓인 눈들이 녹았다. 눈 녹은 물은 지표면 아래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고소증세로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른 이인성 대원은 텐트에 누워 있었고, 김영미 대원은 생리불순을 일으켰다. 문영식 단장은 고혈압을 걱정했다. 나는 귀국 일정을 계산했다. 신문사 조직에 매인 내게는 많은 날짜가 주어지지 않았다. 韓王龍에게 오늘 당장 전진캠프로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점심 무렵부터 다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강행을 고집했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이 높고 깊은 산 속에는 눈보라가 칠 것이다. 그러면 내게는 시간이 없고, 여기서 그냥 하산해야 할지 모른다.


오후 130분쯤 수제비로 점심식사를 마친 뒤 해발 5500mABC(전진베이스캠프)로 출발했다. 韓王龍과 셰르파 등 10여 명은 이중등산화와 스패치(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등산화 바깥에 차는 각반)을 착용하고, 하켄(바위에 박는 못)과 구명로프 등을 준비했다. 바람을 타고 눈발이 뿌렸다. 우리는 눈 덮인 구릉과 계곡을 헤치고 위로 향했다.


나는 이들의 속도를 쫓아가느라 헉헉거렸다. 곳곳에 작은 크레바스(갈라진 틈)가 숨어 있었다. 발을 잘못 내딛는 순간 허리까지 쑥 내려갔다. 그럴 때마다 뒤따라오던 셰르파가 나를 끄집어내 줬다. 마지막 빙벽 구간에서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일곱 발자국쯤 위로 전진하고 주저앉곤 했다.


頂上 공격을 위해 설치하는 전진캠프는 잡석이 마구 쏟아져 내린 경사진 너덜지대였다. 여기서 중국 쪽이 보인다고 했지만 눈보라로 한치 앞을 보기 어려웠다. 캠프 바로 아래에는 외국원정대의 빈 텐트 두 동이 서 있었다. 눈발 속에 춥게 보였다. 頂上 공격을 시도하던 이들 대원은 이미 베이스 캠프로 퇴각했을 것이다.


우리 대원들은 준비해 간 배낭자루를 메고 흩어졌다. 여기저기 시커멓게 녹슨 깡통과 산소통, 가스통, 폐건전지들이 널려 있었다. 텐트의 천조각, 바닥 비닐깔개, 장비를 담았던 박스 등도 보였다. 나는 둔해진 몸짓으로 사진촬영 작업을 마쳤다. 눈보라는 더 세차고 날은 어두워졌다. 이날은 K2에서 치워야 할 쓰레기의 일부를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우리는 곧 철수했다. 하산 과정에서 나는 탈진해 10여 차례 작은 크레바스에 빠졌다. 베이스 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베이스 캠프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식당텐트에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나는 갑자기 두개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나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내 텐트 속으로 들어가 침낭 안에서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5시쯤 눈을 뜨니 송곳으로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메스꺼움은 완화됐다. 식당텐트로 가 따뜻한 차를 마셨다. 눈은 계속 내렸다. 강풍이 불면서 눈은 따따따-라는 소음을 냈다. 아직도 외국 원정대의 텐트 주위로는 人影(인영)의 자취가 없다. 포터들의 텐트에서만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곳 포터들은 낙천적이고 놀 줄을 알았다. 거의 밤마다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일당제이기 때문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하루가 저무면 일당 지급은 된다.


암벽에 매달린 그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밥에 김을 얹어 명란젓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할일이 없어졌다. 우리는 서서히 깨닫게 됐다. 눈 덮인 高山에서 피켈로 얼음을 파헤쳐 등반 쓰레기를 되갖고 오는 게 간단한 작업이 아니며, 이번 원정의 앞날이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화제는 지난 5월 에베레스트 頂上 부근에서 숨진 촉망받던 산악인 박무택(계명OB·35) 3명에게로 옮겨갔다. 씨의 시신은 아직도 에베레스트 頂上으로 올라가는 8750m 지점의 고정자일에 묶여 있다. 이 산악인의 시신을 끌어내리는 임무가 국내 산악계에 주어졌다.


당시 함께 등반했던 여성산악인 오은선씨(38)에 따르면, 씨의 시신은 북동릉 루트 중 해발 8750m의 두 번째 스텝(능선에 계단처럼 돌출한 곳)을 막 올라선 지점에서 발견됐다. 씨는 암벽 위 고정 로프에 숨진 채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오씨는 다가갈 수 없는 암벽에 매달려 있는 그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고 전했다.


당초 그의 사망이 확인된 뒤 장례 일정이 통보됐다. 하지만 장례식은 끝내 유족들에 의해 열리지 못했다. 아들의 시신이 찬 얼음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아는데 어느 부모인들 그대로 시신 없이 장례를 치르겠는가.


결국 올 하반기에 산악인들은 씨의 시신을 끌어내리는 원정을 꾸릴 계획이라고 한다. 과연 그냥 서서 숨쉬기도 어려운 8750m 지점에서 시신을 끌어내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다. 그쪽 루트로 오르는 산악인들은 頂上 길목의 고정자일에 묶인 씨의 시신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씨는 지난 518일 오후 130분쯤 대원 한 명과 함께 頂上을 밟은 후 해발 8300m 지점의 캠프5로 이동 중이었다. 같은 날 오후 6시쯤 씨가 雪盲 때문에 캠프까지 내려갈 수 없다는 무전연락을 해왔다. 다른 한 대원이 이 둘을 구조하러 현장에 갔으나 결국 모두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숨진 씨는 1996년 가셔브룸2(8,035m)과 히말라야 8000m 이상 6개 봉우리를 등정한 베테랑으로, 에베레스트는 2002년에 이어 두 번째 등정이었다.


에베레스트의 고정자일에 묶여 있는 젊은 박무택의 시신을 생각하면서, 나는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됐던 전설적인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당시 38)를 떠올렸다. 신문기자로부터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툭 던졌던 인물. 그는 앤드류 어빈(22)과 함께 1924년 중국 티베트 지역에서부터 에베레스트을 올랐다.


조지 맬러리의 주검


68일 아침 일찍 그는 에베레스트의 北壁(북벽) 해발 8170m의 캠프4를 출발했다. 오후 1250분 그들은 頂上을 불과 240m(고도 차이)를 남겨놓은 지점에서 올라가고 있는 장면이 아래쪽 베이스 캠프에서 포착됐다. 이것이 생전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몇 분 뒤 눈보라가 쳤고 그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올라가면서 실종됐을까 아니면 눈보라 때문에 頂上에 가지 못한 채 되돌아오면서 실종됐을까, 그렇지 않으면 頂上을 밟고 내려오면서 실종됐을까. 만약 그가 頂上을 밟았다면,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의 에베레스트 초등정 기록은 정정돼야 하는 셈이다. 1999년 영국 BBC방송이 이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등반대를 구성했다.


당시 다큐멘터리의 프로듀서로 등반에 참여했던 피터 퍼스트브룩은 그래도, 후회는 없다(지호)라는 책에서, 75년 만에 찾아낸 전설적인 산악인의 주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일곱 내지 여덟 겹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두께로 따지면 6mm에 불과하다. 이는 오늘날 등산가들이 갖춰 입는 옷의 10분의 1도 안 된다. 바깥에는 촘촘하게 짠 綿()으로 만든 방풍 새클턴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은 모직 카디건이었다. 내의는 얇은 면과 비단 두 겹이었다.


맬러리의 주검은 제1스텝 아래 해발 8170m 고지에서 발견됐다. 그는 이보다 약 435m 높은 곳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다. 이것은 그가 하산을 하다 추락했음을 보여준다. 이 고도에서는 죽은 지 몇 시간 내에 몸이 얼어붙는다. 추락 때 입은 부상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분명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맬러리는 오르막을 향해 엎드려, 몸이 산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두 팔을 뻗고 있었다. 이런 자세는 그 구역의 다른 주검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등산가가 거친 지형에 추락하면 보통 즉사하고 주검은 무작위적인 형태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맬러리의 자세는 훨씬 더 안정되어 있으며, 몸도 외상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그의 자세는 얼음이 덮인 비탈에서 통제력을 잃고 미끄러져 내리는 와중에 맨손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속도를 늦추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장갑들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던 도중에 벗겨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등산복은 등을 제외한 상체에 많이 남아 있었다. 등은 어깨까지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이곳이 햇빛에 가장 많이 노출된 부분이었다. 주검이 눈()에 덮이지 않은 짧은 기간에 고산지대의 강렬한 자외선과 감마선으로 인해 자연산 직물은 삭아 버렸을 것이다.


주검의 허리 윗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얗게 표백이 되어 마치 대리석처럼 보였다. 세월도 그의 근육질 체격은 바꾸지 못했으며, 그의 팔과 어깨는 그가 얼마나 강한 등산가였는지 보여주었다. 그의 손등은 갈색이었는데, 아마 죽기 전에 햇볕에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허리 아랫부분은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아마 고산지대의 노란부리까마귀들이 엉덩이 주변을 쪼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 발에는 여전히 징이 박힌 녹색 가죽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는 발목 위의 종아리뼈와 정강이뼈가 골절 상태였는데, 이것은 등반하다가 다리가 부러질 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의 왼쪽 다리는 멀쩡했으며, 부러진 다리에 올려놓고 있었다>


下山


맬러리가 과연 에베레스트의 첫 등정자인지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지 못했다. 이들은 그 자리에 놓인 맬러리의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맬러리의 주검은 실질적으로 에베레스트 산비탈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등반의 역사가 됐다. 이를 옮기는 것은 역사에 끼어드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서 맬러리의 주검에 돌을 얹어 무덤처럼 만들었다. 산이 좋아 산에 미쳐 산을 탔던 산악인이 그 산에서 숨진 것은 어쩌면 운명이요 업보일 수도 있다. 숨진 자는 제 자리를 찾았다고 할지 모르나, 어찌 세속의 산 자들이 그 뜻을 알겠는가.


이번 원정대의 단장인 문영식 히말라얀클럽회장과 오인환 부회장이 이날 하산했다. 문영식 단장은 칠순의 나이에 K2베이스 캠프까지 캐러밴을 해냈다. 그는 숱한 의약품을 준비해, 빠유캠프에서 70여 명의 포터들을 치료해 줘 슈퍼 닥터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도 떠나야 할 시점이다. 이제 떠나면 내 삶에서 다시는 이런 고산등반을 못 하게 될지 모른다. K2에서 마지막까지 나의 한계를 더 시험해 볼 수 없는 일정의 촉박함에 탄식했다. 하지만 나는 조직으로 복귀해야 한다. 조직은 가장 안전하게 먹고 살고 부양하는 방식을 제공해 왔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남아 언젠가는 캠프1·2·3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왔던 길로 그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콩코르디아 캠프에서 곤도고라 패스(5,600m)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나는 여기를 통과해 다른 루트로 하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은 대원들은 눈발을 보니 곤도고라 패스 쪽은 아마 눈사태가 나거나 통제될 것이라고 말렸다.


점심을 먹고 1130분쯤, 나는 작별했다. 34일 혹은 45일이 될지, 하산하는 동안 생존에만 필요할 라면 4, 비스킷 3, 초콜릿 3, 누룽지와 사탕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나는 이제 혼자였다. 물론 길을 안내할 포터가 동행하지만, 나의 의식은 혼자가 됐다.


한 시간 만에 브로드피크의 베이스 캠프를 지나자 그렇게 퍼붓던 눈이 잠시 그쳤다. 팍팍한 돌길이 계속됐다. 등락하는 돌길은 숨을 헐떡거리게 하고, 마치 물 속의 물고기가 땅바닥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발바닥과 무릎에 심한 통증을 가져왔다. 콩코르디아 캠프(4,700m)까지 내려왔을 때, 날은 어둑해졌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 혼자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밤새 귓전으로 눈발이 텐트를 두들겨 패는 소리를 들었다.


629일 화요일, 나는 귀국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현지 영자신문을 보다가, <이탈리아 원정대의 포터 5명이 신깅쇼 마을의 시가계곡의 인더스에 빠져 숨졌다. K2 베이스 캠프로 가던 중이었다. 지난 26일밤이었다. 비가 와서 강물은 불어 있었다. 이들이 계곡의 다리를 건너다가 숨졌다고도 한다. 이들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라는 1단짜리 단신기사를 발견했다.


분명 내가 지나갔던 길이었는데, 地名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들 포터를 본 적 있었을까.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누구나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름 없이 피었다 지지 않겠는가. 나도 그렇듯이. ●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