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기획시리즈『元老를 만나다』徐圭錫고문

풍월 사선암 2017. 7. 13. 13:35

기획시리즈『元老를 만나다


元老께서 MBC에 얽힌 인연과 함께 기억하고 있는 ‘MBC 歷史’의  한 토막 등을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두 번째 만난 분은 徐圭錫고문입니다. 6~70년대 편성과 제작에 대한 얘기를 중심으로 고문님의 방송생활에 얽힌 회고를 듣습니다.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보 내셨는지요?

고려대 법대 2학년 때 6.25가 나서 통역장교로 복 무했는데, 휴전이 됐는데도 보내주질 않아 그래서 1955 년에야 예편하고, 다시 학교 로 돌아가 그동안의 공부에 대한 갈증 때문에 2년 동안 매일 하숙집-강의실-도 서관 생활만 했더니 폐결핵에 걸려서 친구의 주선으로 마산요양소에서 1년 정도 치료받고 나았어요. 서울로 올라와 女苑사에 잠시 근무 하면서 당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 닥터 지 바고의 번역대조와 출판에도 참여하고 그랬 지.


-방송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셨나 요?

1958년 어느 날에 공보실에서 3급 공무원을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했는데 엄청난 경 쟁 속에 4명중의 한명으로 합격해서 1959년 에 방송관리국 관리과 사무관대우 촉탁이 돼서 방송문화연구실에서 근무를 했어요. 여기는 방송의 제도, 편성, 제작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 연구기관이라서 방송에 관해 본격적인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됐는데 월 간지, 주간지, 모니터등을 발행하느라고 무 척 바빴어요. 1961년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 계장으로 2개월 근무하다가 콜롬보플랜에 의 해 호주에 가서 6개월 연수를 받게 됐는데, 이 때 호주방송(ABC)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게 됐 지. 1963년 공보부 지도계장을 하는 중에 당시 민방들의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 아서 자율적인 기구로 방송윤리위원회’(위원 장 姜元龍)를 조직하고 그 뒷바라지를 내가 했 어요.


-공보부 계실 때 승진을 사양한 에피 소드가 있던데요?

그게, 어느 날 고등학교 동기인 임성희(중 앙대 총장)씨가 장관으로 왔는데, 같은 층에서 매일 보는 게 불편했던지 날 승진시켜서 KBS TV편성과장(서기관)으로 보내려한다고 인 사과장이 귀띔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장관실로 가서 내가 공채로 들어왔는데 동창이 장관으 로 왔다고 내가 좋은 자리로 가면 그 꼬리표가 계속 내게 붙어다닐 거 아닌가. 호의는 고마우 나 난 싫네라고 사양했는데 그 얘기가 어떻게 소문이 났어요, 허허


-MBC에 오신 때가 1964년이셨죠?

그렇죠. 당시 MBC에서는 회사가 5.16장학재 단으로 편입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직원 들이 꽤 많았던 상황인데, 三星라디오서울이라는 民放을 시작하면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 는지 정환옥전무를 비롯해서 많은 직원들이 대 거 그쪽으로 옮기는 바람에 회사가 초토화됐어 요. 사실은 내게도 그 쪽에서 오라는 권유가 있 었는데 나로서는 첫째, 방송이 일개 私企業의 앞잡이가 될 것이 뻔한데 내가 거기에 충성해 야하는 상황이 싫었고, 두 번째는 내가 공보실 에 있을 때 함께 근무했던 金某씨가 거기 조직 책임자로 있었는데 날더러 와서 조사업무를 하 라는 거야. 일언지하에 거절했지. 또 하나, 당시 모라는 공보부장관이 경향 신문 여적의 필화사건을 빌미로 신문을 폐간 시킨 뒤 전 직원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경향신 문이라는 호랑이를 내가 가진 권총으로 사살했 다고 호언하는 모습을 보고 장관이라는 사람 의 언론관이 저런 수준인가하고 엄청 충격을 받아서 이런 정부에서 공무원을 해야 하나?’라 는 회의감에 젖어있던 때였어요. 그런 상황인 데 MBC에서 편성책임자로 오라는 제의를 받 으니까 나로서는 장학재단이 운영하는 방송국 이라면 방송의 공공성을 발현하는데 더 적합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 때문에 흔쾌히 수락한 거지요. 박종민씨랑 둘이서 고원증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직위나 직책을 따지지 않겠다. 다만 좋은 방송을 할 것인지만 약속해달라고 말했어요.


-MBC에 오셔서 처음 하신 일은 뭐였 나요?

와서 봤더니 한마디로 쑥대밭이더라구. 나 간 사람들이 당장 내일 나갈 방송 테잎도 안 넘 겨주고 가서 펑크가 나게 될 지경이었어요. 이 성규 아나운서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방 송을 하는데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어. 당시에 는 아나운서가 회사의 얼굴인데 얼굴이 없으니 어떡해. 할 수없이 옛날에 근무했던 인연으로 KBS로 갔지. 고려대 선배 장기범 아나운서실 장을 만나 새로운 출발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 유했더니 나도 생각은 있지만 명색 KBS의 간판인데 어떻게 옮기나고 사양해요. 그래서 그러면 후 배 중에서 누구를 데려가도 허락해주겠소?”했 더니 그러라는 거야. 그런데 다음 날엔가 임 택근 아나운서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종 로2YMCA 지하 다방에서 만났더니 “MBC 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회사의 얼굴마담이니까 거기에 걸맞는 대우 가 필요하다. 모든 기획이나 실무는 서이 하 시되 대외적으로 필요한 타이틀을 내게 줄 수 없느냐.”라고 신사협정을 제안하는 거야. 그래 서 고 사장에게 가서 회사에서 당장 필요한 사 람이 아나운서인데 임택근씨가 명분만 주면 오 겠다고 하니 그에게 방송부장을 주고 나는 차 장으로 일하겠소라고 했더니 내 손을 움켜쥐 면서 그렇게 해주면 정말 고맙겠다고 반색을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임택근씨가 MBC로 왔 는데 여담이지만, 그 때의 신사협정이 그 분과 일하는 동안 줄곧 지켜졌어요. 80년도 해직 당 할 때까지 여러 직책으로 그 분과 어울렸지만 일하는데 있어서만큼은 내 의견을 늘 존중해주 고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어요. 참 확실한 신사였지.


-1964년 개편 때부터 편성이 종전과 는 확연하게 달라지던데요?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편성은 일본 민방의 복사판이었지. 음악, 코미디, 공개오락이 주축 을 이뤘고 프로그램의 제목도 예컨대 석양의 프롬나드식으로 겉멋에 치우친 것들이 수두 룩했어요. 이런 오락 프로그램을 줄이면서 당 장 필요한 게 편성의 기본 틀을 세우는 건데, 내 평소의 지론은 나라가 분단된 상태에서 대 중매체가 해야 할 역할 중의 하나는 한국의 근 대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었어요. 이른바 계몽사상이라고 할까. 당시의 근대화는 8할이 농민인 이 나라에서 가급적 농 민의 숫자를 줄이고 사회도 대중사회로 나아가 야 한다는 것이라서, 그러자니 교육적, 교양적 인 내용이 주를 이룰 수밖에. 대표적인 게 농어 촌 대상 프로그램 밝아오는 우리마을인데 이 프로그램 하나를 위해서 농촌진흥청 연락관이 상주하다시피 했어요. 조증출사장이 와서는 이 프로그램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서 본인이 밖 에 나가 홍보도 하고 아는 분들을 방송에 소개 도 하고 했지. 자문위원회도 만들고....상업방송 치고는 방송규모가 KBS를 능가할 정도였으니 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상방송을 시작했 는데, 새벽에 밝아오는..”을 방송하고 아침이 되면 영이네 집이라는 대화극(對話劇), 출근 시간에는 푸른 신호등에서 교통정보와 문제 점을 토론하는 등 탄력성 있게 편성을 꾸렸어 요. 오락도 경박하지 않은 한밤의 음악편지라 든지 고전의 향기’, ‘일요잡지등을 심었고. 그 때 내가 가장 역점을 뒀던 게 절망은 없다라 는 프로였어요. ‘폭풍이 지난 들에도 꽃은 피고 지진에 무너진 땅에도 맑은 샘은 솟아 흐릅니 다로 시작되는 절망은 없다, ‘절망이라는 否定없다라고 다시 한번 否定하는 즉 부 정의 부정의 철학이 담긴 프로그램으로 처음 엔 취재해서 방송하고 이어서 소재공모를 했는 데 절망을 극복한 갖가지 사례들에 대한 반응 이 폭발적이어서 회사의 품격도 높이고 청취율 도 올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어요. 처음 편성 을 제안할 때 경영진에게 自主放送(sustaining program)'을 하자고 시작한 거라서 광고가 없 었는데 인기가 올라가니까 광고주들이 난리가 났어요. 할 수 없이 나중에 유한양행 단독 스폰 서를 붙인 걸로 기억나는데 박수복, 김진희, 최 원PD들이 애를 많이 썼지요. 나중에 책으로 나 왔는데 내가 총무국장 하면서 판권도장을 찍어 준 게 생각나네

 

-다음 해에 駐日특파원으로 가신 거죠?

초대 정순일씨 다음으로 일본 특파원이 됐는 데 조증출사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뉴스야 뭐 통신이 잘 전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가서 장차 설립할 TV에 관해서 공부 좀 해와요그러더라 구. 근데 내가 일본에 가는 것 관련해서 어이없 는 이 있었어요.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후


당시 전무라고 새로 왔는데 그 분이 출근부 를 수위 앞에 놔두고 사원들에게 거기다 도장 을 찍으라고 한거야. 마치 수위가 감시하는 격 이 된거지. 그랬더니 어느 날 사원들이 내 방 에 와서 모욕적인 조치라서 앞으론 출근부 에 도장 안 찍겠다고 반발하는데 나도 뭐 적 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위에서 는 서 아무개가 사주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찍혀서 일본으로 간거 다 이런 소문도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암튼, 일 본에 있으면서 일 참 많이 했어요. 틈나는 대로 NHK,TBS,후지TV에 가서 제작현장을 답사하 고 조직 현황도 살펴보면서 TV공부를 많이 했 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팝송 음반을 구하기 어려워 일본에서 구입하곤 했는데 음반 조달업 무도 직접 했고, 이종환씨가 진행하는 세계의 톱싱거라는 음악프로그램에서 일본을 연결하 면 내가 받아서 당시 일본의 팝송 인기순위를 전해주고 그 음악도 보내주는 식의 리포터도 했어요.


-2년 후에 돌아오셔서 편성국장이 되 셨죠?

그렇지. 여담인데, 정순일씨와 나는 방송문화 연구실 때부터 나중에 방송위원회까지 다섯 번 에 걸쳐서 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어요. 1967 년에 서울로 돌아와서 또 그 분이 하던 편성국 장을 맡게 됐지. 그 무렵 TV개국이 임박하다 보니까 TV준비위원회에서 기간요원을 뽑는데 라디오 사람들 가운데 유능한 친구들만 골라 간단 말이야. 그렇게 되니까 라디오가 제대로 안되겠더라구. 그래서 조사장에게 사장님, 라 디오 PD 열 사람만 뽑게 해주시고 저에게 3개 월만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3개월 이후에는 누 구를 데려가도 좋습니다라고 했지. 그렇게 라 디오PD 2기생 열 사람을 한꺼번에 뽑아서 맹 훈련을 시켰어요. 그 중에 고무송씨 같은 분은 신문사 기자를 하다가 온 사람인데 인쇄매체에 서 온 사람은 방송에 대해서 뭔가 허허로움을 느낄 것 같더라구. 그래서 라디오 매체는 이런 메리트도 있다는 뜻으로 롱펠로우의 화살 과 노래를 일부러 들려줬는데 나중에 얘길 들 으니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다고 하드만. 암 튼 그 열 사람 중 한명도 TV쪽으로는 안갔고 이들이 결국 TV시대에 라디오의 중심 인력이 됐어요

 

-TV개국 임박해서는 TV편성국장으로 가 셨구요.

그렇지. 정순일씨하고 또 자리바꿈을 한건 데 TV편성국장은 오래 못했어요. 왜 그런고니 TV개국요원을 뽑는데 나는 가급적 이쪽 직급 과 맞는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스카우트하려다 보니까 시간이 좀 걸린단 말이지. 근데 경영진 에서는 아니, 개국은 다가오는데 언제 다 하려 고 하느냐면서 어느 날 TBC에서 이기하씨 외 열 몇 명을 무더기로 데려오는 거야. 내가 뒤 통수 맞은거지. 게다가 이기하씨가 국장급이라 서 대우를 해야 한다고 TV제작국을 신설해서 그이를 국장으로 하고 나는 편성국만 하는 걸 로....그렇게 되니까 내부적인 반발도 있었고 나 도 경영진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경영진과 갈 등이 생겨서 내가 이틀인가 회사를 안 나갔어 요. 그랬더니 조사장이 좀 보자고 하더라고. 그 래 만나서 좋은 사회 만들자고 하면서 이런 야 바위 짓까지 하면서 TV를 하면 뭐합니까?”라 고 사정없이 대들었지. 그랬더니 당신 기분은 알겠다. 일본 속담에 능력있는 매는 발톱을 감 춘다는 말이 있어. 다른 생각 말고 낼부터 나 와그러는 거야. 할 수 있나, 내가 졌지.


이환의 사장, 임택근 전무와 함께


-총무국장과 관리국장도 하셨나부죠?

그게 글쎄, 정동으로 사옥을 옮긴 뒤에, 당시 경리부와 자재부에 조사장과 가까운 사람을 책 임있는 자리에 앉혔었는데 두 군데 모두에서 사고가 발생한 거야. 어느 날인가 사장이 날 부 르더니 당신이 총무국장을 좀 맡으라고 간청 하는 거라. 내가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하면서 두 번이나 거절했더니 일방적으로 발령을 내버리더라구. 한술 더 떠서 관리국장 까지 겸직이야. 할 수 없이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지하 기계실 방수가 잘못돼서 비상 발전기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몇 초간 정파사고가 있었어요. 관리국장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그래 징계위원회를 열어 2개월 감 봉을 결정해서 공고를 했는데 그렇게 되니까 징계를 당한 사람은 관리국장 서규석, 징계 사 항을 공고하는 사람은 총무국장 서규석, 이렇 게 되는 웃지못할 사연도 있었어요. 총무국장으로 있을 때는 정동 사옥 건설할 때 끊었던 어음이 매일 돌아왔는데 조사장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나 몰라라하니까 갚 을 수가 없는 거야. 할 수 없이 김석겸전무랑 둘이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찾아가서 방송국이 부도가 나는 꼴을 보고만 있을거요?”하고 협박 반 애원 반으로 매달려 겨우 돈을 융통해서 여 러 건의 어음을 해결할 수 있었지. 그래도 빚이 정리가 안됐는데 이환의사장이 와서 이후락씨 의 도움을 받아 MBC 주식을 열 개 기업들에게 강제로 인수 시켰고, 그 바람에 나중에는 흑자 가 나서 세금을 22억 냈다고 사원들이 자랑스 런 22이라는 리본으로 비꼬는 일도 있었어 요. 암튼 흑자로 전환된 것이 나중에 경향신문 을 인수하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지. 총무국 장 시절에 했던 일 중에 회사의 모든 규정들을 다 뒤져서 재정비한 것도 업적이라면 업적이라 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년 후에 다시 TV로 옮기셨죠?

이기하씨가 모종의 문제로 퇴사를 하자 TV 제작국장과 편성국장을 합쳐서 TV총국장으 로 만들고 거기로 간 거지. 이때에 했던 일들 이 많은데, 뉴스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의 제 목을 우리말로 정한 거라든지(: 웃으면 복이 와요) 심야에 하는 명교수 명강의에 출연하는 교수들에게는 출연료를 악 소리나게 드린다든, 허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개국 초기에는 사랑하는 갈대라든지 개구리 남편같은 윤리 적으로 비난을 받은 드라마가 많았는데, 나는 그런 드라마 대신 일상의 생활을 그리는 건전 한 홈드라마를 하고 싶었어요. 주일특파원 때 일본TV에서 방영된 홈드라마를 재미있게 봤 던 기억도 있고 해서 김포천씨, 김수현씨와 머 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만든 게 김수현씨의 새 엄마라는 드라마였어요. 내용은, 새 엄마가 한 가정에 들어가서 그 가정을 부흥시킨다 뭐 그 런 평범한 얘긴데 그러다 보니까 주위에서 그 런 게 먹히겠냐고 많이 우려를 하는 거야. 그 래서 내가 그랬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실 패해도 좋으니까 실패를 겁내지 마라’. 이건 내 지론(持論)인데 윗사람에게는 내게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오. 아랫사람에게는 모든 책 임은 내가 질테니 옳다고 믿는 바를 밀고 나가 라”. 이게 한 조직의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이 라고 나는 생각해요. 암튼, 그렇게 해서 새엄 마가 나가게 됐는데, 맨날 치정과 갈등에 얽힌 드라마만 보다가 쌈박한 드라마를 보니까 신선 했던지 당장 신문이 달라지고 요즘 말로 대 박이 난 거야. 근데 이 드라마 땜에 이환의사장 과 갈등이 생긴 게, 당초 예정은 100회였는데 이게 뜨니까 사장은 연장하자는 의견이고, 나 는 일단 100회로 끊고 다른 드라마를 하겠다는 거로 여러 차례 다퉜어요.


◀방송문화상 수상식장


-꽤 오래 했던 걸로 기억나는데요?

그럼. 장장 411회까지 갔으니까 오래 했어요. 그 이후에 같은 작가의 작품 신부일기’‘강남가 족등이 연속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홈드라 마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작가가 홈드라마만 쓰다보니까 지루했던 지 나중에 청춘의 덫이라는 멜로드라마를 썼 는데 불과 몇 회 만에 윤리의 덫에 걸리고 말 았지. 허허.


-RR3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드셨는 데요.

그게 1973년인데, 회사가 TV개국하느라 고 라디오 쪽에 신경을 덜 썼더니 청취율 조 사가 형편없게 나왔나봐. 사장이 부르더니 가 서 라디오 살려내라는 거야. 그래서 다시 라 디오국장으로 갔지. 가자마자 ‘RR30’(Radio Renaissance로 청취율 30%를 이루자)을 기치 로 내걸고 SONY가 신제품 개발할 때 쓴다는 기법을 원용했어요. 뭐냐면, 토요일 오후에 전 직원을 회의실에 모아서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 고, 주제를 정해서 그룹에 속한 각자가 의견을 돌아가면서 개진하는 거야. 나온 의견들을 여 러 장의 카드에 익명으로 모두 기재한 다음에 그걸 모아서 몇 개로 분류해서 정리하면 어느 정도 문제점의 윤곽이 나온다 이거지. 짧은 시 간에 한 것치고는 효과가 좋아요.


-그래서 나온 문제점들은 어떤 것이었 습니까?

당시 회사의 관심이 TV에 쏠리다 보니 라디 오는 완전히 무풍지대가 돼서 해먹고 싶은 거 다 해먹고, 특히 일부 간부들의 행태를 예로 들 면 내일이 내 딸 생일이야라고 직원들에게 공 표하는 사람도 있더라구.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를 정리하고 외부적으로는 라디오와 국민들과의 접점을 찾는 일에 주력했 지. 그때 나온 게 가을맞이 가곡의 밤같은, 방 송도 되고 사업도 되는 일이었어요. 암튼, 30% 청취율 달성은 다 못했지만 새로운 기풍, 라디 오의 활력소를 찾는 일 등은 큰 수확이었어요.


-MBC의 사시(社是)를 고문님께서 지으 셨다면서요?

이환의 사장이 오셔서 간부사원들을 대상으 로 사시 공모를 했는데 난 평소 매스컴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자유, 책임, 품격을 쓰고 설 명까지 덧붙였어요. 그런데 내 기억에, 같이 있 던 박근숙씨가 나라가 분단상태이고 사회통합 을 이루는데 언론도 큰 역할을 해야 하니까 단 합을 추가하면 좋겠다해서 자유, 책임, 품격, 단합이 사시로서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는 거 지. 지난번 신사옥에 가보니까 로비에 飮水思 源을 크게 써놨던데 그것보다는 社是를 거기 에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자유, 책임, 품격을 거론한 뜻은 그것이 매스컴이 가져야 할 정신인 동시에 실천을 통해 그것을 우리 것 으로 만들자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거든.


-임원이 되신 때가 1974년이죠?

라디오국장을 하던 어느 일요일에 등산을 갔 는데 사장이 좀 보자고 하더니 이번 주총에서 당신을 이사로 선임하려고 한다고 통보를 받 았어요. 그때 두 사람이 이사가 됐지, 나는 내가 방송담당을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사장이 부르더니 당신은 총무국장도 해봤고 하니 기 술과 관리담당을 시킬테니 양해하라고 하더라 고. 그래서 아니 제가 언제 뭐 시켜 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죠라고 대답했는데, 그런 일이 나중에 경향신문 합병했을 때도 반 복됐어요. 신문담당 이사를 정하는데 전혀 신 문 경험이 없는 날더러 신문담당을 하라고 하 면서 또 양해를 구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저는 여러 분야를 하니까 좋습니다. 제가 언제 뭘 시켜달라고 합디까?’라고 허허 웃었지. 사실 나는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은 언제나 주인의식 을 갖고 임했기 때문에 보직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뭐든 열심히 한다는 생각 이었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시절


-신문담당 이사를 하시면서 애로가 많 으셨죠?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큰 문제가 호 봉 조정문제였어요. 당시 MBC는 근무년수(年 數)에 따른 호봉을 받고 있었는데, 초도순시 때 사장이 신문도 MBC와 같은 호봉을 적용하겠 다고 별 생각없이 약속을 해버린 거야. 근데 경 향은 오래 된 신문이다 보니 근무기간들이 많 잖아? 호봉 조정하던 관리 쪽에서 난리가 난거 지. 너무 차이가 나거든. 그걸 조정하느라고 1 월 초부터 시행하려던 계획이 4월로 미뤄지니 까 신문 쪽에서 또 야단이야. 내가 그 차액을 계산해보니까 몇 백이 나오더라고. 그래 가불 증을 써서 조용중전무와 내 도장을 찍은 다음 에 전재옥 관리상무에게 현금으로 이 돈을 가 불해주시오해서 받아가지고 편집국장에게 전 해주는 것으로 해결을 했지. 그러다가 방송담 당 상무로 가게 됐고 그게 MBC에서의 마지막 보직이었어요.


<후기> 1980, 서고문께서는 신군부에 의 해 강제로 방송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실무에 능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하는 방송인으 로 유명한 그를 대학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어 서 이후 18년간은 교수님으로 변신했고, 1988 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을 시작으로 시청자불 만처리위원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MBC시 청자주권위원장 등 방송계의 요직을 섭렵하시 고 2004년에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셨다. 1929년생이지만 아직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 고 등산을 즐기고 방송에 관한 얘기에 열을 올 리는 영원한 청년서규석고문님의 만수무강 을 기원합니다.


대담.정리: 편집장 / mbcsau.com 2015315일 제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