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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딸, 선거여왕으로 권좌 올랐으나 국민손에 쫓겨나

풍월 사선암 2017. 3. 11. 08:56

대통령의 딸, 선거여왕으로 권좌 올랐으나 국민손에 쫓겨나

 

-박근혜가 살아온 길-

영부인으로 국정참여최태민과 잘못된 만남

‘18년 칩거울분·배신감으로 이분법적 세계관

보수정당 위기 때 등장해 선거의 여왕등극

최순실과 헌정 문란탄핵심판으로 권력 박탈


34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의 딸은, 이후 4년 만에 파면된 대통령의 신분으로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 2017310일 오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탄핵 인용을 선고하면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부녀 대통령, 민주화 이후 최초로 과반 지지율(51.6%)를 얻은 대통령의 영광은 국민에게 쫓겨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에 가려지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65년 삶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관통한다. 19748월 피살된 육영수 여사 장례식 엿새 뒤 가슴에 상장을 달고 퍼스트레이디로 데뷔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되며 보수의 신화로 자리매김해왔다.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일방적인 동경환멸모두 박 전 대통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재료로 활용됐다.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이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박정희 신화의 종말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박근혜는 1974년 피살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1110일 일기)고 다짐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은 197910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영부인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근원인 최태민(1912~1994)씨를 만난 것은 19753월이다. 최태민씨가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서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편지를 세차례 보냈고, 이후 최씨와 그 일가는 박 전 대통령의 주변을 에워쌌다. 수천억원대로 추산되는 최씨 일가의 재산은 박 전 대통령과 함께 한 구국봉사단과 육영재단 운영 개입 등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직후인 19791121일 두 동생(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를 떠나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8월 신기수 전 경남기업 회장이 마련해준 성북동 집으로 옮겼다가 1990년 현재의 삼성동 집에 입주했다. 삼성동 사저의 계약 주체는 최태민씨의 부인이자 최순실씨의 어머니인 임선이씨로 알려졌다.

 

18년 동안 칩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마음은 울분과 배신감으로 채워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이루셨던 일을 폄하하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무덤 속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신공격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사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박 전 대통령이 주변 인사를 판단하던 배신의리의 이분법은 이 당시 형성됐다.

 

정치권의 잇딴 러브콜을 마다하던 박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다. 이 후보의 패배 뒤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정호성·이재만·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 채용된 것도 이 무렵이다.

 

2006520일 오후 서울 신촌 현대 백화점 앞에서 거리유세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갑작스런 괴한의 공격에 얼굴을 다쳤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 전 대통령은 초선의원 3년차이던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2002년 미래한국연합을 창당해 9개월 동안 외도한 것을 제외하고, 박 전 대통령은 언제나 보수정당의 중심에 서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적이 없는 그가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 향수, 대구·경북(TK)를 기반으로 한 지역감정, 강력한 반공 정서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구원투수로 당의 중심에 섰다. 당 대표로 선출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50석도 어려울 것이라던 총선에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6월 대표를 물러날때까지 2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2006520,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 11가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병상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이 이후를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서 성과를 발판으로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했다.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하며 차기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양쪽의 갈등은 고조했다. 특히 20084월 총선 당시 김무성 의원 등 친박근혜계 인사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자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명박-박근혜의 갈등은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정치 입문 이후 처음으로 반대연설까지하며 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충청권의 민심도 얻을 수 있었다.

 

여당 내 야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얻은 그는 201112, 당의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된다. 한나라당은 앞서 8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과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어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박 전 대통령은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외부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외연확장을 모색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 역시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완전히 바꿨다. 당헌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가했다. 한나라당과 다른세력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성공하면서, 2012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 확보에 성공했다. 이어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를 마치고 돌아서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의 난제는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김재원 전 새누리당 의원)의 말처럼, 박 전 대통령은 유신, 인혁당 사법살인 등 아버지 문제에 있어서만은 명쾌한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도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아버지 시절에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에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족한 면도 있었다는 부분이 유일하다.

‘100% 대한민국을 외치며 대통합을 내세운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부활, ‘배신의 트라우마에 따른 공조직 불신, 공포·공작정치로 일관했고, 결국 국민들의 분노에 밀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으로 남게됐다.

 

한겨레신문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최순실 이익 위해 대통령 권한남용이 하나로 충분했다

 

탄핵사유 3가지는 증거부족등 불인정

국정농단 허용, 대통령 중대한 헌법 위반

삼성돈 수뢰혐의는 일체 판단 안해

국민의 신임 배반,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왼쪽 다섯째)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대해 선고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용호·강일원·김창종·김이수·이정미·이진성·안창호·서기석 재판관.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유 중 단 한 가지만 직무 집행에 있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하나만으로도 박 대통령의 파면을 정당화할 만큼 중대한 법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89쪽 분량의 ‘2016 헌나 대통령 박근혜 탄핵결정문에서 5가지였던 탄핵소추 사유 중 뇌물수수 등 형사법 위반을 제외하고 사인의 국정개입 허용과 대통령 권한 남용 공무원 임면권 남용 언론의 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 의무와 직책 성실수행 의무 위반으로 재구성해 판단했다. 이 중 공무원 임면권 남용, 언론의 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 의무 등 같은 소추사유를 헌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이 피청구인(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책성 인사를 당한 것 등은 인정된다면서도 그 이유가 최서원의 사익 추구에 방해되기 때문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관련 소추사유에 대해서도 피청구인의 대응이 미흡하고 부적절한 면이 있다고 하여 곧바로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도 원칙적으로 사법적 판단이 되기는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 사정을 잘 아는 법조계 관계자는 부족한 증거를 찾으려면 증인을 더 부르고 증거 제출도 요구하면 되지만, 그러면 선고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확실한 파면 사유가 있기 때문에 신속한 심리에 중점을 둔 것 같다고 말했다.


 

헌재는 사인의 국정개입 허용과 대통령 권한 남용에 이르러서야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헌재는 박 대통령이 김종 전 문체부 제2차관 등 최순실씨가 추천한 인사를 공직에 임명하고, 이들이 최씨의 이권 추구를 돕는 역할을 했다고 인정했다. 또 박 대통령이 최씨와 최씨 지인들의 회사 지원을 대기업에 요구한 사실도 확인했다. 헌재는 이런 행위가 최씨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서 공정한 직무수행이라 할 수 없다헌법 제7조 제1(공익실현 의무), 국가공무원법 제59(친절·공정의 의무), 공직자윤리법 제2조의2(이해충돌 방지 의무) 3,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제2조 제4(부패행위) 가목, 7(공직자의 청렴 의무)를 위반했다고 밝혔다. 기업에 미르·케이스포츠 재단 출연 요구 등도 헌재는 해당 기업의 재산권(헌법 제23)과 기업 경영의 자유(헌법 제15)를 침해했다고 못박았다. 박 대통령이 최씨에게 대통령 일정·외교·인사 등 직무상 비밀 문건이 유출되도록 지시 또는 방치한 것도 국가공무원법 제60조 비밀엄수 의무를 위배했다고 헌재는 정리했다.

 

이처럼 박 대통령의 헌법과 법률 위반을 확인한 헌재는 박 대통령이 파면당할 만큼 중대한 법 위반을 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헌재는 피청구인이 최서원의 국정개입을 허용하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남용하여 최씨 등의 사익 추구를 도와주는 한편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은폐한 것은 대의민주제의 원리와 법치주의의 정신을 훼손한 행위로서 대통령으로서의 공익실현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했다고 밝혔다. 이어 헌재는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대신 국민을 상대로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아 헌법수호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매듭지었다. 이를 종합해 헌재는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라며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지적했다.

 

다만 헌재는 탄핵소추 사유였던 박 대통령의 뇌물수수 등 형사법 위반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 6일 박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등을 도와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받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으로부터 미르·케이스포츠 재단을 통해 204억원의 뇌물을 수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헌재는 이런 행위를 뇌물수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강요죄 등 형법의 어떤 조항을 위반했는지 판단하지 않고 어떤 헌법 조항을 위반했는지만 따졌다. 또 박 대통령과 공범 관계인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이 공무상 기밀누설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헌재도 박 대통령이 청와대 비밀 문건을 최씨에게 유출했다고 인정했지만 형법이 아닌 국가공무원법 위반을 적용해 피해갔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가 신속한 판단을 위해 뇌물수수를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칫 형사재판의 확정 판결이 헌재 결정과 달라질 수 있는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뇌물 혐의는 판단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헌재는 탄핵심판 초기부터 형사법 위반 부분은 큰 무게를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