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행복은 있다

풍월 사선암 2016. 11. 24. 23:32

행복은 있다

 

우리를 절망케하는 가난·실패·암이 지독한 악마마저 끌어안으면

곧 은혜로운 천사가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데

지위, 신분, 재산이 뭐라고 저 난리들인지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주임신부


! 참 오래 살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놀란다.

“권 신부, 아직도 살아있어?” 하고 놀라 묻는 것만 같다.

무슨 소문들이 얼마나 퍼졌기에.


그도 그럴 것이 5년 전 대장을 잘라내고 그 후유증으로 장이 협착돼 사경을 헤맸다.

겨우 좀 살 만하다 했더니 이번엔 후두암.

33번의 방사선치료가 끝날 즈음 이젠 나아지나 했는데 이번에는 암이 기관지로 옮아갔다.

목숨이 오가는데 혼자 온 나를 보고 “아니, 혼자 왔어요?” 하고 의사가 화를 낸다.


33번의 방사선치료로 목 연골이 약해져 더 이상 방사선치료는 불가능하니 다량의 항암제를 투여하고 그 기관 주위를 냉동시켜보자고 한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 그러자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때 그 심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링거로 다량의 물을 투여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준비된 주사 구멍으로 항암제가 투여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은 끝이다. 그 후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갈 것이며 내 일상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오랜 병원 생활 덕택에 익히 잘 아는 터다.


, 이 밤이 마지막이다.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삶은 이 밤이 마지막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후미진 병원 뒤뜰을 홀로 걸었다. 내 생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아니 십중팔구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기도했다.


차분히 조용히 묵주 알을 굴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도,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서럽지도 원망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기쁨이 샘솟고 죽음까지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한 사건으로 다가올 뿐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묵주 5단을 마칠 무렵 나는 노래하고 있었다. “찬미하라. 찬양하라. 기뻐 노래하며 춤추라.”

그 밤! 마냥 행복한 밤이었다. “그래 암! 너로 인해 난 많이 아프리라. 그러나 너로 인해 나의 이 행복마저 빼앗기진 않으리라.

암아! 이 몹쓸 놈의 암아! 사실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나?

이 작은 심장의 박동을 멈추게 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니?

그래 어쩔 수 있나. 같이 살아야지. 이 몸뚱이 살아있는 그날까지는 같이 사는 수밖에. 오라 어서 와.”

 

20여 년 전 꼭 이맘때 익산의 한 나환우 정착촌에서 살 때다.

성탄 전 4주 대림 피정이 끝나는 날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나는 물었다.


“여러분 중에 혹 자신의 병을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 순간, 나는 그때 성당의 분위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싸늘하고 적막하고 엄숙했던지.

잠깐의 그 적막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던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사실 그녀는 시력을 잃었다혼잣말처럼, 그러나 차분히 고백했다.


“네, 이 몹쓸 병은 나에게 큰 은총이지요.”


그러자 “맞아요. 은총이죠.”은총이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그 미사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른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간신히 그 미사를 마쳤다.


성당을 나오는데 한 자매가 수줍은 듯 다가와 속삭였다.


“신부님, 이 몹쓸 병은 저에게 큰 은총이죠. 이 몹쓸 병이 아니었으면 나, 이 좋으신 하느님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은총이죠. 은총이에요.”


핏기 없는 피부에 그냥 그려놓은 눈썹이 무척 고왔다. 그 고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늦가을 파아란 하늘, 벌거벗은 감나무에 매달린 빠알간 홍시, 너무도 아름답다. 그 많던 감잎이 그냥 바닥에 다 누웠다.

자기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잎사귀가 다 죽었다고? 아니다. 한 잎 예외 없이 저 빨간 홍시 속에 다 농축돼 살아있다.


하여 때가 되면 다시 산다. 황금빛 들녘이 빈 들이 되었다. 나락이 다 죽었다고? 천만에 한 톨 볍씨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때가 되면 다시 산다. 때가 되어 그 모습이 바뀔 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으니 나도 곧 죽는다고? 아니다. 암도 나병도 심지어 죽음도 앗아갈 수 없는 생명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이토록 힘차게 자라고 있는데 죽어 사라지다니, 틀린 얘기다.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난, 실패, , 나병 등 우리 인간을 절망하게 하는 이 지독한 악마들. 그런데 이 악마들마저도 끌어안고 입 맞추면 곧 아름답고 은혜로운 천사가 되어 이 죄 많은 나를 새로운 세계새로운 생명로 인도한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참 정겹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행복한가. 낡은 나 허물 벗어 새로운 나 되니, 드디어 보이는 이 새로운 세계, 그 진리 안에 머무름. 이것 말고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지위·신분·재산 그런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저 난리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