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가시밭길 선택한… 내 피 중의 피, 민아

풍월 사선암 2016. 9. 19. 17:38

가시밭길 선택한내 피 중의 피, 민아

 

이어령 장관 부인 강인숙 교수, 딸 이민아 목사 추모글 펴내

 

민아야.”

 

부르면 아직도 엄마, ?”라고 되물을 것 같다. 어머니는 생명이 움트는 봄이 싫다. 딸 민아가 나날이 목숨이 축나다가떠나간 계절이어서다. 봄을 못 견디는 마음은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지만, 어머니는 딸에 대한 글을 정리해서 세상에 내보내기로 했다.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사진)민아 이야기’(노아의방주)를 최근 펴냈다. 4년 전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의 이야기다. 강 교수의 남편이자 이 목사의 아버지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고인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와 검사로 일했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큰아들의 죽음을 겪은 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는 등 고인의 삶은 굴곡이 컸다.

 

강 교수는 책에서 딸 민아엄마 민아에 대한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준다. 어머니 강 교수가 보기에 어릴 적 딸은 추상적 사고는 잘하는 우등생이지만 현실 감각은 턱없이 모자랐던 아이였다. 살림도 못하고 돈 계산도 싫어했지만 남을 돕는 일엔 늘 나서는 이였다.


고인의 큰아들은 뇌수막염으로 고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 자폐증을 앓는 둘째 아들로 오래 가슴앓이를 했다. 고인은 갑상샘암에 이어 망막 박리로 실명 위기를 겪기도 했다.

 

강 교수는 그 애가 가시밭길을 걸었지만 운명의 길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길이었다고 돌아본다. ‘in my fashion(내 나름의 방법으로)’이 딸의 좌우명이었음을 떠올리면서 어머니는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한눈을 팔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올인하며 사는 것이 민아의 fashion이었다고 말한다.

 

위암으로 투병하던 딸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강 교수는 딸의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21.5cm의 작은 발. 구둣주걱만 한 예쁜 발의 온기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강 교수는 딸의 죽음을 비로소 알아차렸다고 말한다.

 

먼저 간 딸을 향해 강 교수는 고백한다. “내게 민아는, 변호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다. 그냥 딸이다. 내 피 중의 피요, 살 중의 살인 내 피붙이. 쉰이 돼도, 예순이 돼도 내가 사랑해 주어야 할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동아일보  입력 2016-09-19 / 김지영기자



내 딸이 기구한 인생? 모든 삶 스스로 선택한 것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만났으면 엄마와 딸이 되는가. 무슨 인연으로 만났으면 엄마와 첫아기가 되는가. 딸의 울음소리는 저승까지 들린다는데, 엄마의 울음소리는 어디까지 들릴까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민아 이야기

4년 전 잃은 이민아 목사 사녀곡


딸을 잃는 엄마의 절절한 그리움이 사녀곡(思女曲)’으로 출간됐다. 강인숙(83) 영인문학관 관장의 민아 이야기(노아의방주). 강 관장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이민아(19592012) 목사를 4년 전 위암으로 잃었다. 갑상선암과 실명의 위기를 이겨냈던 딸에게 더이상의 기적은 없었다.


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내게 민아는 내 피 중의 피요, 살 중의 살인 내 피붙이라고 했다. 딸을 그리워하는 모성이 사녀곡(思女曲)’ 속에 깊이 흐른다.


7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난 강 관장은 민아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깊이 알리고 싶어 책을 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딸 이 목사는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다가 간 희귀종 인간이다. “어떤 손해가 따라와도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일만 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이 목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하고, 졸업한 다음 달에 들어가 살 방 한 칸도 없는첫사랑 남자와 결혼했다. 미국 유학 1년 만에 아기를 가져 낳았고, 싱글맘에 된 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도 법대를 제 기간에 졸업했다. 미국변호사 시험에 최상위 성적으로 합격해 대형 로펌에 취직했지만, 오후 430분이면 업무가 끝나는 검사로 직업을 바꿨다. 아이 기르는 시간을 더 가지고 싶어 수입이 절반으로 깎이는 손실을 감수한 것이다. 재혼 후 갑상선암으로 고생하면서도 두 살 터울로 세 아이를 낳은 것 역시 딸의 선택이었다.

 

강 관장은 누군가 민아에게 팔자가 기구라는 표현을 써서 웃은 적이 있다. 그건 민아를 너무 모르는 말이다. 팔자는 불가항력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민아의 고생은 한번도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민아 스스로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엄마에게 딸의 상식적이지 않은선택은 당연히 걱정거리가 됐다. 강 관장은 배를 끌고 산으로 가는 것 같아 매번 말려봤지만 소용없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 애를 오래 지켜본 우리 부부에게는 그 애의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옳은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책에는 딸 이 목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2007년 스물다섯살 첫째 아들을 갑작스레 잃은 참척의 고통, 엄마를 그리워하는 손자·손녀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딸에 대한 생각이 차오를 때마다 하나씩 썼던 글이다.

 

강 관장은 추상담론을 좋아한 민아는 아빠와 호흡이 가장 잘 맞던 말친구였다. 남편 앞에선 민아 이야기를 되도록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인 이 전 장관도 지난해 딸을 추모하는 글을 모아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를 펴냈다. 부모에게 이 목사는 그렇게 각별한 존재였다.

 

강 관장은 딸을 두고 고맙다”“미안하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항상 웃으며 긍정적으로 살아서 고맙고, 고통이 극심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다움을 잃지 않아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원했는데 기독교인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아직도 깊은 밤이면 딸이 그리워 목이 메지만, 조금씩 견뎌가는 힘도 생긴다. 딸이 늘 마중나왔던 LA공항에 갈 수 없어 2012년엔 LA에 가면서도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용했지만, 올해는 LA로 곧바로 갔다. 그는 1때 엄마를 잃은 막내 손녀가 매년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오더니 올해는 안 왔다면서 할머니집에서 뒹굴지 않아도 될 만큼 회복이 됐다는 얘기 아니겠냐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중앙일보] 입력 2016.09.08 01:02 / =이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