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는 깊다 - 광주의 聖女, 서서평>
엘리자베스.쉐핑 (Elizabeth J. Shepping)은 간호사로 온 선교사입니다. 그녀는 1880년 독일의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배경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쉐핑이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쉐핑을 할머니에게 맡긴 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쉐핑은 할머니 밑에서 외롭고 가난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시자 어머니의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를 들고 뉴욕으로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 카톨릭 배경의 미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미국 시민권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녀는 진로를 결정할 때 병자 간호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01년에 정식 간호사(R.N)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살 즈음에 뉴욕시립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간호학교 시절 동료 간호사의 초청으로 개신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때 명쾌하게 제시되는 구원관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때의 감동으로 그녀는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문제의식을 갖고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을 떠나 개신교로 개종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개신교를 이단으로 여기고 있던 어머니는 ‘다시는 너를 딸로 여기지 않겠다’며 쉐핑과 연을 끊었습니다. 결국 가족을 잃고 외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간호사로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유대인 요양소, 유태계 결핵 환자 수용서,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사회봉사를 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조선에서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쉐핑은 뉴욕시 성서교사 훈련학교를 다니며 야간에는 병원 일을 했습니다. 이 신학교는 SVM에 속해 있던 화이트 박사가 개발한 귀납적 성경 연구방법을 교육에 적용했습니다. 쉐핑은 이때 학교 교육을 받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적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으며, 새로운 생명이 마치 포도주처럼 내 핏줄들을 가득 채웠다.” 이 공부를 통해 쉐핑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에 불탔고 화이트의 제자로서 선교 열정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실제 쉐핑은 이미 뉴욕에 있을 때도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rler’s Aid Missionary)에서 사역을 했고 YMCA 운동에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주었습니다. 쉐핑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조선에 왔을 때 쉐핑에게 영향을 받은 최흥종, 김필례가 YMCA와 YWCA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쉐핑은 1911년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함께 졸업한 학생들이 일본, 뉴멕시코, 중국 등 곳곳으로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이때 쉐핑은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간호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광주 제중원의 윌슨 선교사가 간호 전문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선교부에 청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쉐핑이 지원했고 합격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1911년에 한국 행 여객선을 탔습니다. 쉐핑은 꿈에도 그리던 선교사의 길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20일 동안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고 배에서 조선 입문, 조선 선교 역사, 조선 교회 현황을 집중적으로 배웠습니다. 미국에서 간호학과 신학, 교육학을 이미 공부한 이런 그녀였기 때문에 쉐핑은 한국에 와서도 이 모든 분야에서 크게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쉐핑이 한국에 파송된 때는 한일 합병 직후로 그녀의 나이 31세였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조선의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그리고 차별받는 여성들을 위해 29년 동안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교사로서 이 땅의 많은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자를 양성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쉐핑은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주 발음도 좋고 말도 유창하게 잘했습니다. 후에 정신여고 교장이 되었던 김필례 씨는 쉐핑이 “한국말 발음도 한국 사람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하였고 웅변가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자도 배워 한자와 한글이 섞인 구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일본어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러한 그녀는 한국인이 되고자 애썼습니다.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된장국은 그 독특한 냄새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가장 혐오했지만 쉐핑은 된장국을 먹으면서 한국에 동화되기를 기꺼이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아들을 등에 엎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의 고아, 병든 자를 양육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 처녀 선교사들이 광주 양림동 선교사 촌에 많았습니다. 쉐핑을 비롯해 수피아 여학교 교장이었던 플로랜스(Florence Root), 도슨(Dodson), 맥퀸 (McGueen, Anna), 프리차드(Pritchard, Margart) 등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당신을 기억합니다
1921년,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전라도 일대를 한 달여간 순회한 뒤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어멈 등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발을 내디딘 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의 기록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염병으로 병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던 그는 서양식 삶을 고수하던 여러 선교사와 달리 조선말을 익혀 '서서평'이라 이름 짓고, 한복을 입고 된장국을 먹으며 헐벗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 그러나 서서평은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걸인들을 데려와 씻기고 옷을 사 입히는가 하면, 나환자가 버린 아이를 수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운 아이가 14명, 아이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습니다.
한번은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어느 집에 맡겼는데 잘 키우겠다는 약속과 달리 술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고 그동안의 양육비를 주고 데려 오기도 했습니다.
서서평이 이일학교와 조선 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를 세운 것도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 헌신하다 휴가를 받아 잠시 미국에 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는 고된 생활에 찌든 딸을 보고 “몰골이 부끄러우니 돌아가라!” 하며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전부였습니다.
거적떼기를 덮고 자는 사람에게 그의 담요 반쪽을 찢어주고 남은 반쪽으로 가냘픈 몸을 가린 채... 이승의 삶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그의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 명은 통곡하며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추억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月刊좋은생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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