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소이 부답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1> 이후락과 남북회담

풍월 사선암 2015. 7. 2. 23:59

처처처 청산가리 들고 평양 갑니다이후락, 박정희 가슴에 파고들어 우쭐해진 HR

국가보안법 폐지하자” JP “어불성설 무슨 생각하나면박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1> 이후락과 남북회담

 

6년 가까이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를 누렸던 이후락(영문 이니셜 HR)1969103선 개헌 직후 해임됐다. 701월엔 주일대사로 나갔다. 그러나 그의 공백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해 12월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했다. 권력의 핵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이후락은 독특한 책사(策士)형 인물이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되는 문제를 꾸며서 존재를 과시하고, 그것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박 대통령도 이후락의 이런 재간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필요한 때가 많았기에 알면서도 중용했다. 육영수 여사는 이후락의 정보부장 임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주일대사 시절 그의 염문설이 육 여사의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육 여사는 박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의 여성 문제에 민감했다. 육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왜 그런 사람을 자꾸 기용하시느냐. 대통령 옆에 둘 사람이 아니다. 내쫓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 이후락 본인도 이런 사실을 알고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특유의 재주를 부려 본인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을 만한 큰일을 저질렀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는 일이었다.

 

1986326일 민족중흥동지회 주최로 열린 자신의 귀국환영회에서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왼쪽)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615·16 직후 구속됐던 이후락을 군사 정부에서 일하도록 끌어들인 사람이 JP였다. 머리 회전이 빨라 제갈조조란 별명이 붙었던 이후락은 특유의 수완으로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에 오르며 70년대 초반까지 권력을 누렸다.

 

72426일 오전 8시 국무총리였던 나는 청와대의 호출을 받았다. 박 대통령과 이후락 정보부장, 최규하 청와대 외교담당 특보, 김용식 외무장관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후락의 방북 계획에 대해 처음으로 보고를 받았다. 그동안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석했던 중앙정보부 간부 정홍진이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과 비밀접촉을 벌여왔고, 이후락과 김영주(金英柱·김일성의 동생)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의 회담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회담 장소는 평양이었다. 이 놀라운 발상은 순전히 이후락과 그 그룹이 낸 것이었다. 이후락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박 대통령에게 말했다. “제가 평양에 가는 것은 후세의 사가(史家)들에게 각하가 얼마나 평화통일에 열의를 가졌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의 경우 저는 결사(決死)의 각오가 돼 있습니다.”

 

1972113일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의 내각청사 집무실에서 김일성을 만나 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그래, 죽을 각오를 하고 김일성을 만나겠다니 한번 가서 해봐라며 동의했다. 대통령은 아마 이후락이 평양에 가면 김일성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또 당돌한 생각을 하고 연극을 꾸며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후락은 준비해온 결재서류를 내보였다. 서류 제목은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건이었다. 적성국가인 북한을 방문하려면 외무장관과 국무총리의 허가가 필요했다. 김용식 장관과 내가 차례로 서명을 한 뒤 박 대통령에게 서류를 올렸다.

 

52일 아침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대통령께 인사하러 온 이후락을 청와대 집무실에서 만났다. 이후락은 윗옷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봉투를 꺼내 박 대통령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처처처 청산가리입니다. 가서 여차하면 이거 먹고 죽어버리겠습니다.” 그는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용기를 높이 산 듯했다. “가서 잘해봐라며 격려해줬다.

 

52~5일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은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났다. 전해지기로는 이후락을 만난 김일성은 그를 민족의 영웅이라며 치켜세웠다고 한다. 회담을 마치고 개선장군처럼 서울로 돌아온 이후락이 내 의견에 김일성이 매우 찬동을 하고 나를 칭찬했다고 자랑스레 보고했다. 이후 김영주 부장의 대리 자격으로 박성철 제2부수상이 529일부터 61일까지 서울에 왔다. 박 대통령은 박성철을 신중하게 대했다. 대통령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한 일을 하나도 우리 국민은 믿을 수가 없다. 말은 평화다 뭐다 하면서 김신조 일당을 청와대 앞까지 보내 나를 없애려 하지 않았는가. 말보다 하나하나 실천해서 하나씩이라도 믿을 수 있게 하라. 이런 말을 북한에 가거든 전해라.” 남북 간 극비 교차 방문은 이렇게 두 달간 진행됐다.

 

7274일 오전 10시 이후락 정보부장이 이문동 중앙정보부 강당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다.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같은 시간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도 이를 발표했다. 온 국민이 충격과 감격에 휩싸였다. 이후락과 김영주가 합의한 이 성명은 7개 항으로 이뤄졌다. 핵심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의 3원칙이었다. 국내외 언론은 남북, 사반세기 만의 정치 대좌’ ‘민족역량 보인 중대 거보’ ‘새로운 시대에 알맞게 법·제도 정비 필요등 통일이 눈앞에라도 올 것처럼 들떴다.

 

이튿날 나는 7·4공동성명에 관한 국회 대정부 질문 자리에 나갔다. 신민당 김영삼 의원은 외세 간섭 없는 자주적 통일원칙에서 외세란 무엇을 말하는가. 정부가 이제 북한이 하나의 정권임을 대등하게 인정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유엔은 외세에 포함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와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역사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그들의 얘기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대화는 평화 모색의 한 방법이지 전부가 될 수 없고 우리의 이념체제와 생활이 조금도 달라질 수 없다고 답변했다.

 

박성철 

 

조국통일 3원칙을 둘러싸고는 이후 남북 간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7210월 시작된 남북조절위원회에서 북한 측은 이 3원칙을 근거로 미군 철수와 보안법 폐지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우리 측이 김일성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서 3원칙에 합의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그런데 사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란 원칙을 먼저 내놓은 것은 김일성이 아닌 이후락이었다. 한 건 올리려는 목적으로, 김일성이 동의할 만한 좋은 문구를 안출(案出)해서 제안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7·4남북공동성명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남북이 합의한 성명 내용이 그대로 이행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로 인해 남북 관계에서 의외의 결과가 조성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신(維新)을 단단히 결심하고, 준비작업을 한창 밀어붙이고 있었다. 7·4성명의 평판과 명성은 이후락이 독점하는 분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이와 상관없이 유신을 추진했다.

 

7·4성명이 나온 뒤 청와대 별관 회의실에서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안보장관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이후락 부장이 난데없이 북한이 우리와 대화를 하겠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국가보안법을 없애야겠습니다라는 의견을 내놨다. 국무총리인 내가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라고 들고 일어났다. 나는 그를 향해 고함치듯 말했다. “국가보안법은 개인의 생활을 제한하거나 억제하는 법률이 아닌 거요. 규정에 위반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설사 공산주의자라도 처벌받지 않는 법이오. 충실하게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지 않소. 이것을 없애자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오.” 나는 그에게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마시오. 당신이 북쪽에 또 갈 일은 없을 거요라고 소리쳤다. 국무총리와 중앙정보부장의 언쟁은 뜨거웠다. 박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후락의 보안법 폐지 주장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대통령은 화가 나도 면전에서 이후락을 혼내지는 않았다.

 

한바탕 말싸움이 끝나자 김정렴 비서실장이 옆방에 계시던 박 대통령을 모시고 와서 회의를 속개했다. 대통령의 눈치를 보더니 이후락은 더 이상 보안법 폐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없었던 일로 됐다. 내가 그 자리에서 야단을 하지 않았으면 다른 장관들이 그의 말재간에 넘어가서 보안법 폐지로 나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왜 보안법을 없애기 위해 준동(蠢動)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평양에서 김일성과의 만남이 보안법을 없애야겠다는 이후락의 생각에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김일성이 자신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칭찬하자 자신도 그쪽에 어떤 선물을 주려고 그런 발상을 내놓은 듯했다. 이후락은 나 같은 사람은 생각도 못하는 잔재주를 부렸고, 그것으로 박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곤 했다.

 

인물 소사전 김영주(93)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 소련 유학 뒤 1954년부터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62년 당 요직인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고, 70년 정치위원 겸 비서로 승진하며 실세로 떠올랐다. 72년 이후락과 7·4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고,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을 맡았다. 742월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인되자 정무원 부총리로 밀려난 뒤 75년 이후 물러났다. 18년간 자강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93년 명예직인 부주석으로 복귀했다. 2014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에서 유임됐다.

 

[중앙일보] 입력 2015.07.01 00:53 / 전영기·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