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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죄 폐지로 관심 커지는 혼전계약서

풍월 사선암 2015. 3. 10. 10:25

간통죄 폐지로 관심 커지는 혼전계약서

 

'불륜 저지르면 재산 100% 포기'이런 조항은 효력 없다

 

혼인서약 시대에서 혼인계약 시대로-.

 

지난달 26일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 결정 이후 불륜은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됐고 형벌도 받지 않는다. 죄와 벌의 주홍글씨는 사라졌다. 아쉬워하는 쪽에선 부부생활의 마지막 심리적 안전장치가 무너졌다는 한탄이 나온다. 이제 주례선생님 앞에서 되뇌는 혼인서약이 가정을 지켜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하는 건지 모른다. 그보다는 결혼생활의 민법상 계약 강화가 해법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아직 생소한 혼전계약서가 새로운 심리적 안전장치가 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혼전계약 세미나 등을 진행해온 법무법인 세종의 조정희(40) 변호사는 간통죄가 폐지됨으로써 앞으로는 법원이 혼전계약서에 적시된 사항을 폭넓게 받아들일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인정 범위가 확대되면 혼전계약서 작성이 새로운 결혼 풍속도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A씨 부부는 지난해 결혼에 앞서 이혼 시 재산분할 방식 등을 규정한 부부재산 약정을 맺었다. 약정에 따르면 남편은 서울 강남 요지 두 곳에 부동산이 있다. 아내는 예금 3억원 등 총 45000여만원이 재산이다. 이들은 결혼 후 각자의 집에서 받는 상속·증여 재산은 특유재산으로 한다고 약정했다. 결혼생활 중 자력으로 취득하는 재산은 공동명의로 하되 한쪽 동의 없이 처분하거나 담보로 제시해선 안 된다는 점도 명시했다. 생활비는 나눠 내기로 했다. “사소한 감정적인 문제로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혼 시 공동재산의 분할은 협의하거나 법원의 판결을 따른다는 조항도 넣었다.

 

혼전계약서의 근거는 A씨 부부가 활용한 민법 제829조 중 부부재산 계약조항이다. 결혼에 앞서 재산과 채무를 정리한 뒤 법원에 등기를 해 두도록 한 것이다. 결혼이 깨져도 특유재산은 안전하다. A씨 부부처럼 혼전계약서를 쓰는 경우는 아직 흔치 않다. 대법원에 따르면 부부재산 약정 등기는 201111, 201216, 201326, 지난해 28건에 그쳤다. 앞으로는 늘어날 전망이다. 황혼·재혼이 늘고 만혼 추세가 이어지면서 재산 관계가 복잡해지는 영향도 적지 않다.

 

혼전계약서의 장점은 뭘까. 일단 결혼 상대의 재산과 채무 파악이 가능하다. 재산 외적인 부부간 약속도 선택조항으로 넣을 수 있다. 만약 불륜이 걱정된다면 성실한 부부생활을 강조하는 조항을 넣으면 된다. 자녀 교육 및 양육 방법, 종교, 거주지역 등에 관한 협의도 가능하다. 아직은 법적 효력이 제한적이다. 하지만 결혼할 당시 부부가 어떤 목표를 갖고 있었으며 파탄이 났을 경우 책임 소재를 따지는 데 유용한 근거가 될 수 있다. 2000년대 초 재혼하며 부부재산 약정을 맺은 B씨 부부는 남편의 외도는 이혼 사유이며 외도엔 전처와의 전화 및 동침, 원나이트 스탠드도 포함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혼전계약서 어떻게 쓰나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의 한 장면. 부잣집 딸 효진(손담비)과 결혼하게 된 차강재 선생(윤박). 예비 장모 허양금(견미리)이 내미는 혼전계약서를 들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장모는 태연하다.

 

너무 시리어스(serious)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냥 나중에 이혼이라도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재산권·양육권, 뭐 그런 문제 깨끗이 정리해 놓자는 뜻이니까. 사람 일, 아무도 모르잖아요?”

 

기센 부잣집 사모님들이 신분이 맞지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들일 때 들이대는 무기라는 혼전계약서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또 다른 드라마인 백년의 유산에서는 이혼 시 혼수비용의 다섯 배를 물어준다 부부관계는 1주일에 1회씩 하고 지키지 않을 경우 회당 1000만원을 준다 어머니와 아내가 싸울 경우 아내 편을 든다는 조항이 담긴 혼전계약서가 등장했다.

 

두 드라마 속 혼전계약서는 법원에서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혼 전문 변호사들은 사회의 상식에 반하는 사항이 들어간 혼전계약서는 쓰나 마나라고 조언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양육권을 미리 정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법원은 양육권자와 친권자를 정할 때 부모의 의지보다 자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따지기 때문이다. 이는 이혼소송에서 등장하는 각종 각서의 효력이 제한적인 것과 같은 이치다. 일방적인 강요를 담았거나 상식에 어긋나면 무용지물이다. 최근 아나운서 김주하의 이혼 소송에 등장한 각서는 남편이 다시 외도하면 모든 재산을 김주하에게 주겠다는 파격적인 재산 포기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가정법원은 이 조항을 인정하지 않았고 재산 분할은 기여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최근 서울고법에서 진행된 한 30대 이혼 부부의 이혼·위자료 소송에선 부부싸움 후 작성된 각서에도 남편은 생활비로 1년에 1억원을 준다는 항목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법률사무소 더함의 김우석 변호사는 혼전계약서에 대한 문의가 늘고 있지만 대부분 불륜을 저지르는 쪽이 재산의 100%를 포기한다는 식의 조항을 넣고 싶어한다이런 혼전계약은 나중에 효력이 없다는 점을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혼전계약서 인정 범위 확대될까

 

혼전계약서의 장점 중 하나는 결혼생활의 문제를 미리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조 변호사는 혼전계약서는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생활 습관을 갖고 살아온 남녀가 혼인생활 중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미리 고민하고 대비할 수 있는 장치라고 말했다. 반드시 변호사를 통해 작성할 필요는 없다. 단 법률전문가가 아니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판단하기 힘들 수 있다. 계약서 작성 비용은 재산 규모와 계약서에 포함될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계약서당 평균 1만 달러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선 300~500만원 선에서 책정된다.

 

법원은 앞으로 혼전계약을 보다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간통제 폐지를 계기로 혼인관계가 사실상 깨졌다고 판단되면 이혼을 인정해 주는 이른바 파탄주의로 대법원 판례가 바뀔 가능성이 커져서다. 배금자 변호사는 법원은 외국처럼 혼인을 파탄 낸 사람에게 징벌적 위자료를 부과하고 재산분할에도 책임을 반영해야 간통죄 폐지로 인한 공백을 막을 수 있다민법을 개정해 혼전계약서의 효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S BOX] 기자가 혼전계약서 써보니, 외도·변심 항목이 힘드네요

 

기자가 결혼과 이혼의 안전장치라는 혼전계약서를 써봤다. 재산과 관련된 사항은 간단하다. 각자 결혼 전 모은 재산과 진 빚을 밝히면 된다. 막막한 건 그 다음이었다. 결혼과 관련해 발생 가능한 불행은 수만 가지.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결국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정하고 결혼생활의 유지와 해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되도록 많은 상황을 포괄할 문장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한 공간에 거주하되, 따로 살아야 할 경우 협의한다(1) 결혼으로 확장되는 인간관계를 받아들인다(2) 결혼으로 인한 변화·문제·즐거움은 공동 과제다(3)3개의 조항을 쓸 수 있었다. 이어 결혼 중 가장 괴로울 상황 하나를 택했다. 역시 외도·변심이 문제였다. 혼인 지속 의사가 없을 경우 반드시 배우자에게 고지한다(4)고 정했다. 이어 결혼 유지·해제 논의에 제3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책임이 큰 쪽이 합리적인 위자료를 지급한다 등의 별도 항목을 마련했다. 이혼 시 특유재산(결혼 전 각자의 재산)은 분할하지 않고 공동 재산은 절반씩 나눈다(5)고 못 박았다. 그 밖에 양육·교육 비용은 절반씩 부담한다(6)고 하고 유언·상속·증여에 앞서 배우자와 우선 상의한다(7)고 정했다.

 

[중앙일보] 입력 2015.03.07 0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