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좋은글

아버지 마음 - 김태익

풍월 사선암 2014. 12. 17. 12:34

 

아버지 마음 - 김태익

 

고등학교 때 읽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는 사춘기 소년을 생각에 잠기게 하는 슬픈 풍경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 있다.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를 발견했을 때”. 빛 바랜 편지에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고 쓰여 있다.

슈낙은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稚氣)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 그 숱한 허물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아버지는 그 때문에 가슴 태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엊그제 팔순을 넘긴 원로 국어학자의 편지를 한 통 받았다. 하얀 종이 위에는 노학자가 아들 일로 밤을 밝히며 썼을 것 같은 글이 잉크로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제사 때는 오십이 넘도록 앞치마를 두르고 제수(祭需)를 장만했습니다. 30명 넘는 형제·사촌·팔촌 가운데 맏이로서 자주 만나 사이좋게 지내왔습니다.” 노학자는 당신의 아들이 대학교수로서 “학생들과 자주 어울리고, 여러 학생에게 장학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과세(過歲)에는 남녀 학생들이 세배 와 함께 새해를 축하했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학자의 하나로 뽑아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노학자의 자랑스럽던 아들은 지난여름 세계수학자대회 이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존재가 됐다. 오랫동안 여학생들을 성적(性的)으로 희롱하고 추행한 혐의로 감옥에 갔다. 노학자는 평소 술을 삼가던 자식이 실수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색마(色魔)가 됐다.”벼락을 맞은 것 같다.”고 했다. 집안 식구들은 처음부터 실수를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모든 것이 용납되지 않으면 깨끗이 물러서기로 각오하고 있습니다. 일단 수감됐으니 법대로 처리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노학자는 두 개의 문장을 덧붙였다. (아들이) 수감됐다 하더라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식구들은 믿고 있습니다.” 옥사(獄死)만 안 한다면 전화위복으로 삼아 학자로서 재기(再起)할 것입니다.”

 

편지 내용을 아들에 대한 변명이나 아들을 잡아들인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歎願)도 아니다. 믿었던 아들로 인해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이렇게 써서 누군가에게 전하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여기엔 있다. 남들은 손가락질하지만 끝까지 아들에 대한 믿음을 이어가고 싶은 아버지 마음이다. 아들은 그가 밖에서 저지른 일과는 별개로 아버지에게 이런 아픈 시간을 안겨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잘못을 했다.

 

자식에게는 부모가 모르는 것들이 많다. 잘난 것은 자식의 몫이고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어디 노학자와 그의 아들뿐이겠는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들을 내 아버지에게 안겨 드렸을 것인가.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부모의 가슴 태운 밤을 떠올리고 슬픔을 느끼는 게 인간인지 모른다. 사람이 좀 더 일찍 부모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면 세상이 지금 이 모양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김태익 논설위원

첨부이미지

'행복의 정원 > 좋은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이라는 여행  (0) 2014.12.18
감사라는 말의 위력  (0) 2014.12.17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다림  (0) 2014.12.15
가장 소중한 약속   (0) 2014.12.08
행복의 법칙  (0) 201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