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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의 속도 - 문태준

풍월 사선암 2014. 10. 31. 00:01

 

걸음의 속도 - 문태준

 

마음이 낸 길을 호롯이 걸었습니다.

내 걸음의 속도를 자연의 속도에 맞춰 걸었습니다.

걸음 속도를 늦추자 주변도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길이 원하는 대로, 나의 몸이 견딜만하게. 맞춘 속도로.

 

그러고 보면 참 서둘러 걸어온 것입니다.

두서도 없이 까닭도 없이 누군가 나를 뒤에서 보았다면

대단히 급한 용무가 있겠거니 했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잔뜩 고집을 세우고서

당나귀처럼 걸어 왔으니 말입니다.

 

당장의 물을 피하고 당장의 불을 피하겠다는

반딧불 같은 소견만 있었던 것입니다.

견고하게 고집한 것이므로 스스로 피곤함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무모하게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바위처럼 서 있어도 좋았습니다.

갈길이 멀고, 돌아올 길이 멀어도 좋습니다.

돌아보건대, 수많은 길을 오갔지만

내가 걸어온 길에는 조금의 대화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수없 파하고 동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그 걸음의 속도로 나는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 강을 만나면 강의 속도로 걸어갈 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뒤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면 서서 기다려 주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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