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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

풍월 사선암 2014. 4. 18. 08:26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

 

정주영 회장, 경부고속도로 공사상황을 묻는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 경부고속도로 건설

 

정주영은 한국경제 성장신화의 대명사이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국민소득이 80달러에서 26000달러까지 오르는 물꼬를 텄다. 참혹하고 열악한 당시 현실에서 엄두도 못낼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자동차 독자 개발, 조선사업, 중동 진출, 올림픽 유치 등이 모두 그랬다. 그가 희대의 사업에 출사표를 던질 때마다 사람들은 초등학교 밖에 못나와 뭘 몰라서 그런 무모한 일에 달려드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고 창조했다. 그리고 한국경제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내년 정주영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이 역사적인 인물의 업적을 시리즈로 짚어본다./편집자

 

정 사장,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공구가 난공사라고 하는데

고속도로 공사현장 상황을 들어보기 위해 현장에 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현대건설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얘기를 건네던 박정희 대통령은 순간 말을 멈추었다. 앞에 앉아서 얘기를 듣던 현장 작업복 차림의 정 회장이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모자란 데다 겹친 피로로 몰려오는 수마에 대책 없이 깜빡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대로 조용히 정 회장을 넌지시 바라고만 있었다. 몇 십초가 지났을까.

아이고 이런,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정 회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깨서 당황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니요 정 사장, 내가 미안하오, 그렇게 고단한데 좀더 자다 깨었으면 좋았을 것을.”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놓고 두 사람이 함께 쏟았던 열정과 집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잘 말해 주는 일화이다.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 부부(1964)./조선일보DB

 

아스팔트를 섞고 콘크리트를 개는 일부터 암반 굴착기를 쓰는 일까지 어떤 현장 인부들보다 실무를 잘 알고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가진 현장맨 정 회장에게는 공사 현장이 일터일 뿐 아니라 밥 먹는 곳이고 잠자리였다. 당시 50대 초반의 강철 사나이 정주영은 공사를 독려하고 공사 현장에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거의 하루 종일 현장에서 보냈다. 미군의 폐지프차를 개조해 만든 비좁은 탑차에서 그 큰 체구를 웅크리고 잠을 때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터널 굴착 시 수맥을 잘못 건드리면 폭발적인 강력한 힘으로 한꺼번에 토사가 섞인 이수가 분출되어 사람이 매몰되어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따르게 된다. 이럴 때 인부가 머뭇거리면 정 회장은 직접 착암기를 뺏어들고 앞장 서는 혈기를 보였다.

 

한편 청와대에서는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 공사 현황이 적힌 상황판을 집무실 뿐 아니라 침대 머리맡에도 비치해놓고 점검하며 수시로 착안점과 지시사항을 메모하는 열정을 쏟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예고 없이 현장으로 정 회장을 찾아가 현장을 함께 점검하고 막걸리를 나누며 격려해 주기도 했다.

 

5·16 군사 혁명 이후 5년이 남짓한 1960년대 중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권 기반 자체도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 당시 우리의 절대 부족한 식량은 미국 잉여 농산물 공여 계획인 PL 480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춘궁기에 끼니를 거르는 세대가 많은 형편이었다. 국방 부분에 있어서도 무기, 탄약, 차량, 연료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부분의 일반 보급품과 군 의료 부분에서도 붕대, 아스피린, 간단한 소화제까지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을 그 태동기부터 껄끄럽게 여기고 있는 점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박 대통령이 서울과 부산, 한국의 종축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물론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세계은행도 고속도로 건설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나섰다. 명분은 한국의 경제 수준에 비해 아직 시기상조이고 민생 부분 등 더 시급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 정치에서 오늘날 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 더우기 그토록 경제 국방 등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판단을 외면하고 재원 확보 대책도 없이 밀고 나간다는 것은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모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의지는 집요했다.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산업발전 기반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무엇보다도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동기로는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소위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이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 기반에 더하여 잘 구축된 아우토반 고속도로였다는 것을 독일 방문 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 군 시절 뛰어난 작전통 이었던 그가 전쟁에서 주 보급로 (MSR)구축이 얼마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인가를 절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고속도로 건설에 집착한 이유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직면한 도전은 여러 면에서 너무나 엄청난 것들이었다. 최우방국인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관계와 경제 부처는 내놓고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내 비치지는 못했지만 같은 입장이었다. 학계 등 전문가 집단도 반대했다. 야당은 물론, 당시 집권 세력의 주축인 5·16 혁명 주체들로 구성된 공화당 핵심 그룹에서도 반대의견이 거셌다. 우선 극도로 궁핍한 나라살림에 막대한 소요재원 조달 방안이 없다. 또 미국이 반대하는 마당에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국가 경제가 파국에 이르게 되면 앞으로 경제개발 계획의 성패는 차치하고라도 민생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결과 민심이 이반되면 혁명 자체가 실패할 수 있는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너무나도 확고한 의지와 그의 개성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도 먼저 나서서 박 대통령에게 반대 의사를 전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고속도로는 196511월 현대건설이 최초로 해외공사로 수주했다. 이 건설경험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조선일보DB

 

이때 이들이 생각해낸 인물이 있었다. 공화당 당의장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씨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대구사범 시절 그의 은사였다. 박 대통령은 그가 통치에 대해서 부정적인 조언를 해도 경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를 앞세우고 중진 몇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 철회를 위해 청와대로 대통령 설득 방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박 대통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박 대통령에게 큰 난제들을 가지고 압박해 왔다. 초기 예산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피땀어린 급여를 담보로 독일로부터 겨우 얻어온 차관,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받는 파월 장병의 피와 생명을 건 급여, 그리고 일부 시장에서 현금화한 PL 480 대금 등 성격으로 보아 참으로 가슴 저리게 눈물겨운 재원을 겨우 마련했다. 그러나 그 못지 않은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국내에 어느 누구도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이 있는 회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예산을 세울지, 설계는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확보할 지 막연한 상태였다.

 

이때 떠오른 것이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기 몇해 전인 1965년 현대건설이 처음으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의 짧은 구간 공사를 해 봤기 때문이었다. 이 공사는 현대건설이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현지기후, 지질, 장비, 기술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대비도 없이 그야말로 멋모르고 뛰어들어 엄청난 적자를 보며 겨우 공사를 끝낸 뼈아픈 경험을 하게한 공사였다. 이런 배경에서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가 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스런 귀결이었다.

 

우선 일차적으로 소요 예산을 파악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우리 국토의 지형적 특성상 유별나게 산과 계곡이 많고 뚫어야 될 터널도 많은데 누구도 이런 조건에서 일반도로도 아닌 고속도로 예산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현대가 태국서 해본 것도 규모나 지형 등 조건에서 너무 차이가 커서 크게 도움이 못되는 형편이었다. 박대통령은 넓게 의견을 구해 본다는 취지에서 정부 관련 기관에 예산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주무 부처인 건설부가 650억원, 수도권 도로 공사 경험이 있다는 서울시가 180억원, 예산 전문 부처인 재무부가 330억원, 군사도로 공사를 많이 해본 육군 공병감실이 440억원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민간 업체인 현대건설이 280억원을 제시했다. 되돌아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하기로서니 고속도로라는 국가적인 대역사를 앞에 놓고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인 전문기관에서 낸 예산계획 이란 것이 30~40%가 아닌 400% 가까운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이는 경부고속도건설이라는 대역사에 대하여 우리의 여건과 준비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미흡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일례였다.

 

◀19691210일 경부고속도로의 서울-대전 구간이 완공되어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관련인사들이 테이프를 끊고 있다(). 197077일 최종 공정을 끝내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경부고속도로(아래)./조선일보DB

 

이러한 어려움과 극적인 우여 곡절을 거친 경부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혼신을 다 바친 열정과 집념, 그리고 처음 해보는 공사지만 사력을 다해 열심히 일한 현장근로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힘입어 정 회장이 제시한 280억 예산에 근접한 비용으로 완성했다. 이것은 세계고속도로 건설역사상 단위 거리 대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그리고 수없는 난공사 구간에도 불구하고 최단 시일 내 완공이라는 대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경부 고속도로는 그 후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국가 대동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