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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무너지기 보름 前

풍월 사선암 2014. 1. 11. 10:59

베를린 장벽 무너지기 보름

 

·서독 화해 주인공 브란트 "유럽 통합 후에야 統獨 가능"

어른대는 통일 눈치도 못 채

서독 콜 "통일은 공상 소설" 동독 호네커 "100년 더 간다"

역사 한복판에선 앞길 안 보여

 

김창균 정치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1989119일 저녁, 동독 정부 대변인 샤보프스키는 정례 기자회견에서 동·서독 자유 왕래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여행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 기자가 "언제부터"냐고 묻자 샤보프스키는 "지금 당장(right now)"이라고 답했다. ()베를린 주민 수천명이 곧장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국경 수비대는 이들을 제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38년 동안 동·서 베를린을 갈라 놓았던 콘크리트 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독일 통일에 시동이 걸린 순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일을 언제쯤 예상했을까.

 

19891025일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서울에서 특별 강연을 했다. 그는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이 이뤄진 다음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브란트는 독일판 '햇볕정책'인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사람이다. ·서독 통일을 기다렸을 것이고, 그래서 희망적인 전망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 이후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브란트의 서울 강연이 있고 보름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년 만에 독일 통일이 이뤄졌다. 반면 유럽 통합은 1999년까지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89615,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나흘간의 서독 방문을 마치고 고별 기자회견을 가졌다. "독일이 다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고르바초프는 "유럽은 지금 거대한 변혁을 거치고 있다"면서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소식이 외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진 것은 늦은 밤, 시내판 신문 마감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필자는 입사 1년을 갓 넘긴 올챙이 기자로서 편집부 야근을 하고 있었다. 선배들이 이 뉴스를 어느 지면에 어떤 크기로 다룰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국제무대에서 뜨거운 뉴스를 몰고 다니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주제 역시 충격적이었다. 그런데도 이 기사는 조선일보 616일자 1면이 아닌 5면으로 밀려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는 전망이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 서독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은 대가로 립 서비스를 했다"는 게 조선일보 편집기자들의 판단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개월 전 일이다.

   

한 달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958일부터 사흘간 서(西)베를린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국제언론인협회(IPI) 총회가 열렸다. 전 세계 50개국 신문 방송의 고위급 언론인 수백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의 주제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였고, 동구 민주화 바람이 휘몰아치던 시점이었으며, 장소 또한 독일 분단의 최전선이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독일 통일에 모여졌다. 마이크를 잡는 사람마다 통독(統獨) 문제를 거론했지만 한결같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국내 언론인 참석자는 "10년 내에는 어림도 없다는 분위기였다"고 당시 일을 기억했다.

 

·서독 최고 지도자들의 전망은 어땠을까. 19891월 호네커 동독 서기장은 "베를린 장벽이 그 자리에 세워지게 된 배경이 있다. 50, 100년이 지나도 베를린 장벽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호네커의 호언장담과 달리 베를린 장벽은 10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호네커 자신의 정치 수명은 그보다도 짧았다.

 

헬무트 콜은 독일에서 '통일 총리'라고 불린다. 서독의 마지막 총리로서 통일 절차를 완수했다. 콜은 198810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을 지지해 주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콜은 "나는 공상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 질문은 일종의 판타지(몽상) 아니냐"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 몽상이 1년여 만에 현실로 다가왔다.

 

서독 일반 국민도 통일은 아득한 먼 훗날 일로 여기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두 달 전인 19899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56%"통일은 30년 내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독일 통일이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까지도 그 기척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서독 정상(頂上)과 지도급 인사, 일반 국민, 그리고 탈()냉전 현장을 예민하게 관찰하던 언론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뒤돌아보면 역사의 발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필연(必然)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때 그 자리에서 역사를 맞이했던 당사자들은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안갯속을 걷고 있었다. 2014년이 밝아오는 한반도에 어떤 운명의 그림자가 덮쳐 오고 있는지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 김창균 정치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 / 입력 : 2014.01.02 0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