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tree *8P(33.4cm x 45.5cm) 캔버스에 혼합재료 2013 김은경>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박 완 서
내 여학교 동창중 아들을 아주 잘 기른 엄마로 소문난 이가 있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를 때만 해도 중학교까지 시험 쳐서 들어갈 때였다.
그 입시 경쟁의 치열함이 지금의 대학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조금도 수월하지 않았다.
자식을 소문나게 잘 길렀다는 건 부모 걱정 시키지 않고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명문으로만 척척 들어가주었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아들만 둘인데 두아들이 다 그러했으니 부러워할 만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역의 의무까지 치른 아들들은 차례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더는 그 친구를 부러워할 일도 없이 몇년의 시간이 흘렀다.
큰 아들이 먼저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포스트닥으로 있은지 이 년만에 국내의 유수한 대학에서
자리가 나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지 일 년도 안돼
결혼 청첩장이 날아왔다.
그 전에 신붓감이 명문가의 규수란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결혼식도 굉장한 데서 올릴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것 같았다.
교외의 개인 집 마당인데 개별적으로 찾아가긴 어려울 테니
전세버스를 이용해달라고, 예식장 위치대신 버스타는 장소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넓은 전원주택의 호사스러운 정원이려니 하는
기대는 아직 남아있었다.
고가(古家)의 담도 없는 넓은 마당이었지만
운치는 있을지 몰라도 호사스럽지는 않았다.
신랑 친척어른이 지키고 있는 종가댁인데 마당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 곳의 자연을 좋아하는 신랑의 마음을 읽고 신부가 그런 안을 냈고,
바로 이웃에는 또 다른 친척이 맛갈스럽기로 소문난 국밥집을 하고
있어서 몇 가지 잔치음식을 보태 손님 대접을 해주겠다고 자청했기에
자연스럽게 그 마당에서 잔치를 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 모든 수수한 마음씨들이 어우러진 혼인잔치는 조촐하고 흥겨웠다.
그러나 그중 가장 보기 좋았던것은 주례 선생님 이었다.
주례라도 그 촌스러운 분위기를 휘황하게 빛내줄 저명 인사를
모실줄 알았는데 마음씨 좋아보이는 보통 아저씨였다.
신랑의 초등학교 적 담임 선생님이셨다고 했다.
초등학교 육년동안 같은 분이 담임을 맡았을 리는 없고
아마 신랑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선생님이셨을 것이다.
그 분은 주례를 많이 서보진 않은 듯 신랑 신부의 가문, 학력,
학위 들을 나열하는 의레적인 순서는 아예 빼먹고
신랑이 무척이나 개구쟁이였다는 어릴 적 얘기만 했다.
그러나 정직하여 자기 잘못을 남에게 미루는 법이 없었고,
속이 깊어 궂은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런 저런 일화를 신이나서 나열하며
선생님의 동안(童顔)은 연방 함박꽃처럼 벌어졌다.
하객들 또한 벙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 누구보다도 즐거운 것은 신부의 부모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될 중요한 시기에 누가 사랑을 주고
영향을 미쳤는지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시기를 사랑으로 지켜본 선생님의 증언에다 대면
명문학교나 박사학위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결과적으로는 가장 돋보이게 할 분을
주례로 모신 이 속 깊은 신랑이 선생님을 업고 식장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이 아름다운 혼인잔치의 흥은 절정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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