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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가을 이야기

풍월 사선암 2013. 10. 4. 10:49

 

법정 스님의 가을 이야기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 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 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볼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낮 동안은 바다 위의 섬처럼

저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가

귀소의 시각에는 같은 대지에 뿌리박힌

존재임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

우리들의 현실은 지나간 과거처럼 보인다.

 

이삭이 여문 논밭은 황홀한 모자이크

젖줄 같은 강물이 유연한 가락처럼 굽이굽이 흐른다.

구름이 헐벗은 산자락을 안쓰러운 듯 쓰다듬고 있다.

시골마다 도시마다 크고 작은 길로 이어져 있다.

아득한 태고 적 우리 조상들이 첫걸음을 내딛은 바로

그 길을 후손들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길을 거쳐 낯선 고장의 소식을 알아오고

그 길목에서 이웃 마을 처녀와 총각은 눈이 맞는다.

꽂을 한 아름 안고 정다운 벗을 찾아가는 것도 그 길이다.

길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맺어준 탯줄이다.

 

그 길이 물고 뜯는 싸움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끼리 즐기고 미워하는 증오의 길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 같지 않대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인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 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는 사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그런 것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아무게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 법정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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