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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31] 아차산(峨嵯山) 길 ②

풍월 사선암 2013. 6. 12. 14:08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31] 아차산(峨嵯山) 길

 

온달의 한() 평강의 사랑1400년 전 역사 묻어있다

 

마음 없이 지나가면 그저 평범한 바위일 뿐 아무것도 없는 돌덩어리다. 그러나 온달과 평강공주를 읽어내 온달(溫達)장군 주먹바위, 평강(平康)공주바위라는 이름을 지어준 우리시대 사람들은 1400 여 년 전에 떠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구나.

 

과연 온달장군은 이 곳 아차산성에서 전사(戰死)한 것이 확실한 것인가. 단양 영춘(永春)에 가면 온달산성과 온달동굴이 있고 온달장군축제도 열리면서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임을 기리고 있다. 과연 어느 곳이 온달장군 전사지일까? 서기 590년 고구려 영양왕 1년에 일어난 일을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편에서 읽어 보자.

 

영양왕(嬰陽王, 열전에는 陽岡王)이 즉위하자 대형(大兄)벼슬에 있던 온달장군이 신라가 빼앗아간 한북(漢北)의 땅을 되찾아 오겠다고 출전하게 된다. 그 때의 비장함이 기록에 남아 있다. “계립현(지릅재, 현재 하늘재)과 죽령 서쪽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鷄立峴 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고구려 대장간 마을 2013 CNBNEWS

 

절치부심 출전 앞둔 고구려 온달장군의 비장함

 

이 시대 삼국(三國)이 한강 주변을 뺏고 빼앗긴 전쟁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아야 온달의 각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한강 이북으로 천도(遷都)에 대한 보복으로 광개토왕(396)의 남하, 장수왕의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河南 慰禮城) 점령과 개로왕의 장살(戕殺).

 

이러한 전과(戰果)를 거두면서(475) 고구려는 백두대간의 죽령과 계립령을 경계로 하는 지역까지 그 영향권에 두게 된다. 이때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중원고구려비, 순흥벽화 고분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던 한강과 백두대간 사이의 땅은 백제의 성왕과 신라 진흥왕의 나제동맹(羅濟同盟) 연합군에게 76년 만에 빼앗겨 백제의 땅으로 돌아가고(551), 다시 2년 뒤 배신의 길을 선택한 신라 진흥왕의 급습으로 신라는 한강과 임진강을 아우르는 이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553). 이때의 흔적이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巡狩碑)이며 감악산 산정(山頂)에 있는 몰자비(沒字碑) 또한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로서는 76년 동안 지배하다가 빼앗긴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땅을 얼마나 되찾고 싶었을까? 더구나 한수(漢水)는 한반도의 중심이며 풍부한 물산의 산지이니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이 때 분연히 일어난 사람이 온달이었다.

 

온달은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 바보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온달열전에 따르면 평원왕(平原王 또는 平康王)의 따님 평강공주는 어려서 울보였다. 울 때마다 아빠 왕께서는 울음 안 그치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當歸之愚溫達).”고 농담을 했다.

 

이제 공주가 이팔청춘 16세가 되어 귀한 가문에 시집을 보내려 하니 공주가 그 아버지를 들이 받았다. “아버님께서는 항상 저를 온달의 부인되라 하셨는데 이제 무슨 까닭으로 말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식언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황당도 하여라. 딸 가진 이 입조심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해서 공주는 온달에게 시집가고 바보를 대형(大兄)이라는 장군 되도록 내조하니 온달 복이 넝쿨째 굴러 왔더라.

 

석실고분 2013 CNBNEWS

 

뭇사람의 존경을 받던 대형 온달장군이 어찌 나라의 숙원을 모른 척 하리. 분연히 옛터를 찾으러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아아~ 아단성(阿旦城, 阿且城의 판각오류로 봄) 아래에서 유시에 맞아 길에서 전사했다. (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아마도 오늘 필자가 걸어왔던 아차산성 아랫길 어디메쯤 아니었을까.

 

그런데 분하고 공주를 잊지 못해 장사를 지내려 해도 유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달려와 관을 쓰다듬으며 눈물 흘렸다. “삶과 죽임이 갈렸어요, 오호~ 이제 돌아 가셔야지요 (生死決矣 於乎 歸矣)” 관을 쓰다듬었을 공주의 손길이 봄바람 되어 길손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평강공주바위 아래 길은 작은 골짜기다. 진달래샘이라는 시원한 샘이 길손을 기다린다. 샘 아래쪽으로는 크지 않은 평탄지가 자리하는데 기와 파편과 도자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이름은 잊혀진 암자(庵子)터일 것이다.

 

배용준 주연 태왕사신기 촬영지 고구려 대장간 마을

 

온달샘 자리에 있던 큰 절에 부속된 암자였을 것이다. 아차산 안내지도에는 이 근처를 다비(茶毘)터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암자가 없어진 뒤 큰절에서 열반한 스님들을 이곳에서 다비(불교식 火葬)했던 모양이다.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 본다. 아랫마을 우미내(牛尾川)로 이어지는 계곡 길이다. 잠시 500m 내려오면 급격한 바위절벽이 되면서 물줄기가 떨어진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멋진 폭포수가 떨어질 것이다.

 

아래로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 보인다. 배우 배용준이 주연을 맡았던 태왕사신기를 촬영했던 곳이라 한다. 지자체에서 이곳을 관광명소 중 하나로 육성하고 있는 것 같다. 길을 우측 대장간 마을 방향으로 잡는다. 나무 층계 길을 잠시 내려가면 좌측으로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는데 큰 바위 얼굴이라는 설명서가 보인다. 계곡 건너편 경사면 바위에 마치 큰 어른 측면 얼굴 같은 형상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렇기야 하겠냐마는 설명서에는 배우 배용준이 발견했다고 쓰여 있다.

 

대장간마을에 흥미가 있으면 들렸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유료임)

 

필자는 여기서 발길을 돌려 폭포 위로 돌아온다. 폭포 바로 위에는 반대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오솔길이 있다. 이제부터는 재미있는 암릉 길이다. 위험할 정도의 길은 아닌데 운동화보다는 등산화가 안전하다.

 

큰바위 얼굴 2013 CNBNEWS

 

오르막길 다 오르면 바위가 평탄하게 펼쳐지는데 그 평탄부 정상에 반듯하게 자리해 한강을 굽어보는 석실분(石室墳) 한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이곳으로 안내하는 길 안내판이 없으니 길찾기에 신경 쓰실 것.) 규모도 만만치 않다. 길이가 2.4m에 폭 80cm 높이 90cm라고 한다. 좌우 각각 두 장의 석판(石板)으로 옆면을 막고 뒤 부분도 한 장의 석판으로 막은 뒤 두 장의 석판으로 지붕을 얹었다.

 

바닥은 평탄한 바위 그 자체를 바닥 삼았다. ()은 앞에서 뒤쪽으로 밀어 넣은 후 앞쪽을 석판으로 막았을 것이다. 이런 형식의 돌무덤을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 하는데 굳이 바위 위에다 이렇게 묘를 써야 했을까? 우미내 마을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을 택하다니. 내려다보아야만 할 사연을 간직한 이의 묘()는 아니었을까?

 

아차산에는 삼국시대나 그 이후 것으로 보이는 고분군(石室墳, 石槨墓)들이 대략 150여 기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체가 파악되지도 못하고 관리도 되지 못하니 아쉽게도 조금씩 파괴되어 가고 있다.

 

이제 아차산에 현존하는 절 대성암(大聖庵, 원래 절이름 梵窟寺)을 찾아 나선다. 바위길로 오르는 능선길에 등산로가 분명치 않아 잠시 길찾기가 망설여진다. 그러나 능선길 오르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대성암 앞 너른 평탄지가 나타난다. 평탄지 위쪽 아차산 정상 바위 기운이 뻗어 내린 곳에 대성암이 자리잡고 있다.

 

전해지기로는 진덕여왕 원년(647)에 의상대사가 범굴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한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는 나옹화상이 중창했다 하니 적어도 이때부터는 화양사(현 영화사), 사라진 은석사와 함께 아차산을 대표하는 절로 향불을 밝혔을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 초 학자 서거정(徐居正)이 이곳에 와 시() 한 수 읊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대성암 앞마당은 한강과 강동지역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경기도의 산줄기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이곳에서 맞으면 정말로 멋질 것이다. 그러나 대성암의 더 큰 매력은 법당을 뒤돌아 간 곳에 숨어 있다.

 

아차산 삼층석탑 2013 CNBNEWS

 

우선은 창고처럼 벽을 세우고 유리창을 달아놓은 곳,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시라. 감로수(甘露水)가 그득 고여 있다. 아차산 정상부터 이곳까지는 암반으로 이어졌는데 그 기운을 가득 담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석간수(石間水)가 모인 것이다. 바위의 기운을 가득 담은 물, 살다가 기()죽은 날 한 잔 마셔 볼 일이다.

 

삼국시대 전후 고분군 150여기 산재

 

이제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덮고 있는 바위를 바라보자. 바위에는 작은 구멍과 큰 구멍, 두 개의 구멍이 보인다.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한 쌀바위가 이곳에도 있는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의상대사께서 이곳에서 수행하실 때 굶어 돌아가지 말라고 꼭 세 끼 밥 먹을 만큼의 쌀이 작은 구멍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하늘이 주시는 쌀 천공미(天供米)였다.

 

젊은 시자(侍者)는 닭모이 만큼씩 먹고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배불리 좀 먹으면서 시봉(侍奉)하려고 옆에 큰 구멍 하나 더 뚫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부터 쌀이 뚝 끊겼다나. 에꾸 눈 꾹 감으시고 좀 더 주시지.

 

또 하나 숨겨져 있는 관심거리는 법당 뒤 암벽에 새겨져 있는 범굴사불량권(梵窟寺佛粮券)과 그 시주인(施主人) 명단을 새겨 놓은 암각문서이다. 불량(佛粮)이란 절 살림에 필요한 수입원을 그 때 그 때 신도들이 가져오는 곡식이나 금전에만 의지할 수 없기에 영구적으로 자체의 재정기반이 되도록 논과 밭을 구입해 절에 시주하는 것을 말한다. 사나사(舍那寺)나 개원사(開元寺)에도 불량비가 남아 있다.

 

대성암(범굴사) 불량권에는 이 때 시주한 농토의 내역과 가격 매매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어 재미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량을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도 옆에 정리해 놓았는데, 함거사법영유씨양주(咸居士法英劉氏兩主; 거사 함법영과 유씨 부부), 김윤하태씨양주( 金潤河泰氏兩主; 김윤하와 태씨 부부), 안국민고씨양주(安國民高氏兩主; 안국민과 고씨 부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남존여비사상이 극에 달했던 조선에서도 부처님 앞에서는 부부가 평등하게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분이 산뜻하다.

 

시주자들 중에는 또 하나 흥미를 끄는 이들이 있다.

 

상궁김씨수열(尙宮金氏守烈), 상궁김씨족금(尙宮金氏足今), 상궁양씨복련(尙宮梁氏福蓮), 상궁강씨육월(尙宮姜氏六月) 등이다.

 

상궁 김수열, 상궁 김족금, 상궁 양복련, 상궁 강유월, 지금 들어도 그다지 촌스럽지 않은 이름들이다. 조선 시대의 궁인들은 여염집 아낙들의 아명(兒名)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은퇴 후에 몸을 의탁하고 여생을 지낼 자신의 원찰(願刹) 하나씩은 인연을 맺고 지냈던 것이다.

 

대성암을 나선다. 좌측길로 방향을 잡으면 삼층석탑 가는 길의 이정표가 서 있다. 아차, 길따라 가면 삼층석탑과는 멀어진다. 이 이정표 앞 터밭처럼 보이는 풀숲 앞으로 휀스가 쳐져 있는데 이 휀스를 따라 골자기 방향으로 내려 간다. 이후부터는 길안내판이 없다.

관룡탑 2013 CNBNEWS

 

골짜기 방향 길에는 오래전에 잊혀진 돌층계 길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골짜기에 내려 서면 앞쪽 능선 방향으로 작은 평탄지가 보인다. 이 평탄지에도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아마도 예전 범굴사에 속했던 암자터였을 것이다.

 

이곳 암자터에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간다. 아래로는 국가시설물이 길을 막고 있어서 산길은 능선의 허리를 끼고 좌측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 또 다른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기와편들이 발에 걸린다. 암자터를 떠난 지 10분도 안 되는 지점에 또 다른 절터가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자연 암석에 파 놓은 돌절구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20m 앞 능선을 바라보니 언덕 위에 삼층석탑이 숨겨진 보물처럼 빛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205호로 지정된 고려 때 석탑이다. 형태를 아름답다 할 수는 없어도 종교적 위용이 느껴지고 아차산 정상 산줄기를 타고 내려 온 언덕에 우뚝 서 한강을 바라보는 모습은 묵직하다.

 

이제 아차산 4보루 방향으로 산을 오른다. 사람 발길에 닳은 등산로가 서북방향으로 이어지면서 산을 오른다. 탑을 출발한지 15분 남짓하여 작은 골짜기를 만나는데 숲 속에 평탄지가 보이고 발밑에 작은 기와편이 밟힌다.

 

4보루를 기준으로 동남쪽 능선줄기 200m 되는 지점이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축대의 흔적도 남아 있어 절터였음을 알 수가 있다. 달리 남아 있는 것은 없는데 온달샘 절터와 더불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은석사(銀石寺) 후보지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전설 가득한 쌀바위, 범굴사불량권 명단 새긴 암각문서

 

이제 아차산 4보루에 닿는다.

 

북쪽 연천에서부터 양주 포천 의정부를 거쳐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용마산 줄기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보루가 40여 기() 발견되었다. 특히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는 20여 기가 집중 발견됨으로써 고구려 관방시설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나제(羅濟)연합군으로부터 영토를 지키려는 고구려의 방어노력이 집중되어 있는 그날의 흔적이다.

 

여기에서 계속 북쪽 망우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4보루에서 길을 내려오면 고갯마루인데 좌측은 중곡동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긴고랑골이며 우측은 박완서 선생이 사시던 구리시 아치울 마을길이다. 계속 전진하여 용마산 갈림길 지나 망우산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저기 묘지들이 나타난다. 일제가 1933년 만들었다는 망우리공동묘지의 남쪽 부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능선길에는 작은 돌비석들로 개인들이 사용권리를 얻은 묘역을 구분하고 있다. 어떤 이는 앞면에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뒷면에는 불하받은 면적을 썼다. 百坪이라고 쓴 것을 보니 인총이 적었을 때는 흔히 100평은 묘역으로 썼던 것이다.

 

효빈 묘역 2013 CNBNEWS

 

사가정공원 내려가는 안부를 지나 망우산 1보루 지나면 우측으로 시루봉과 관룡탑(觀龍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이 길로 내려서기 10여 분, 잡석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형 관룡탑을 만난다. 40여년 전 어느 보살 부부가 쌓아 올렸다는 공덕탑(功德塔)이다. 화관암(花冠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자리하는데 주위를 둘러 보면 돌에 판 옛 절구와 자기편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이름은 잊혀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절터임을 알 수가 있다. (옛날 이곳에 있던 절 이름이 화관암이라는 말도 있음)

 

관룡탑에서부터는 하산길이 넓은 임도길이다. 10여 분 내려오면 마을 입구 개울을 만나는데 그곳에 효빈(孝嬪)묘소입구를 알리는 비석과 길안내판이 있다. 효빈묘소는 이곳에서 산길로 1km여 올라가 우측 산능선에 있다.

 

효빈 그 분은 누구였을까?

 

태종(太宗)의 가계도를 보면 경녕군(敬寧君)의 어머니 효빈 김씨가 기록되어 있다. 효빈 김씨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의 몸종이었다.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 사가(私家)에 있을 때 범하여 경녕군을 잉태했는데 원경왕후 민씨의 구박이 상식의 범위를 넘었다 한다.

 

아차산 용마산 일대 고구려 보루 20여기 발견

 

그 기막힌 마음이야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종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미우면 그 서방을 쥐어뜯을 것이지. 효빈 김씨에 대한 구박은 중전이 된 후에도 이어졌는데 실록에서조차 원경왕후 민씨의 투기를 기록하고 있다.

 

태종실록 2년조(1402)정비(원경왕후 민씨)의 성격은 투기가 심하다(靜妃性妬忌)”라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 진상의 일부가 실록에 남아 있다.

 

정비전(원경왕후)의 시녀·환관 등 20여 인을 내쳤다. 정비가, 임금이 궁인을 가까이 한다고 분개하고 노해, 가까이 한 궁인을 힐문하니, 임금이 노해 내치었다. (黜靜妃殿侍女宦官等二十餘. 靜妃以上御宮人憤恚, 詰所御者, 上怒而黜.)” 원경왕후가 임금과 가까이한 궁인들을 잡아다가 혼을 냈는데 이 일에 가담했던 원경왕후 수족을 잘라낸 것이다. 중전이 되어서도 이랬으니 사가에서 당한 효빈의 고통은 자못 짐작이 간다.

 

아차산 다른 줄기 아치울 마을에는 태종의 또 다른 후궁 명빈 김씨(明嬪 金氏)의 묘소가 있다. 명빈 김씨는 한성판윤을 지낸 김덕구의 딸로서 유일하게 정식으로 간택(揀擇)해 입궁한 빈()이었다. 명빈의 묘소는 구리시 사적 364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빈의 묘소는 그냥 일반묘소이다.

 

가여운 효빈은 세상을 떠난 지 560여년이 지난 뒤에도 후손들에게도 대접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효빈은 오늘도 셋째 손자 오성군(梧城君)과 손자며느리를 거느리고 한강을 바라보고 계신다.

 

약주 한 잔이라도 올려 죄송한 마음을 표해야겠다.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아차산 동쪽 세 번째 마을 한다리 마을(흰다리 마을, 韓橋, 大橋, 一橋, 白橋)로 내려온다. 큰 다리가 있던 마을이라는데 한자로 적으면서 그 표현에 여러 오해가 생긴 것이다. 굿당도 만나는데 액끼산이라고 적어 놓았다.

 

경기지 양주(京畿誌 楊州)조에 기록한 아차산의 또 다른 이름 악계산(嶽溪山)의 본명이 액끼산이었던 모양이다.

 

한다리마을 벗어나면 바로 워커힐과 구리를 잇는 큰 길이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수시로 지나간다. 광나루 나가 출출함을 달래야겠다.

 

교통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

 

걷기 코스

지하철 ~ 아차산생태공원 ~ 홍련봉보루 ~ 영화사 ~ 아차산성 ~ 온달샘절터 ~ 진달래샘절터 ~ 큰바위얼굴 ~ 석실고분 ~ 대성암 ~ 절터1 ~ 삼층탑/절터2 ~ 절터3 ~ 아차산 4보루 ~ 망우봉1보루 ~ 관룡탑/화관암터 ~ 효빈묘 ~ 대원사터 ~ 한다리마을

 

이야기가 있는 길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