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안심하고 애 키울 수 있는 나라 ① 직장맘의 비명

풍월 사선암 2013. 5. 31. 09:05

어린이집, 맞벌이 자녀 기피 "40곳서 거절당했다"

 

안심하고 애 키울 수 있는 나라 직장맘의 비명 () 무상보육의 천덕꾸러기

법으론 맞벌이 우선 제대로 안 지켜

 

중앙일보가 맞벌이 직장맘 30명과 보육교사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맞벌이 맘들은 어린이집을 구할 때부터 다양한 차별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육아카페 회원 20명을 취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서희영(가명·31·무역회사 근무)씨는 육아에 전념하려고 일을 그만뒀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와중에 괜찮은 일자리가 생겼고 석 달 전부터 다시 직장에 나갔다. 15개월 된 아이를 맡길 어린이집을 구하려고 연초부터 30군데 넘게 알아봤다. 직장이 서울인 탓에 서둘러도 오후 7시 반이 돼야 애를 데리러 갈 수 있다고 하자 대부분 늦어도 오후 6시까지는 와야 한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거나 기피했다고 한다. 서씨는 맞벌이 부부는 애 키우기가 정말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22개월 된 딸을 키우는 은행원 권미영(가명·32)씨 역시 어린이집 40군데서 거절당한 뒤 겨우 서초구의 민간 어린이집에 들어갔다고 한숨을 쉬었다. 출근시간이 일러 오전 8시 이전에 아이를 맡기고 오후 7시 넘어야 찾아갈 수 있다고 했더니 여러 어린이집에서 난색을 표했다. 권씨가 항의했지만 일부 원장은 규정과 현실은 다르다고 답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어린이집 실태조사(2012)를 보면 민간 어린이집이 보육하는 아동 중 43.4%가 맞벌이 부부 자녀인 반면 국공립 어린이집은 54.7%. ·유아보육법에는 부모가 모두 취업 중인 영·유아에게 우선적으로 보육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을 지키지 않는 민간 어린이집이 적지 않다. 15개월 된 아이를 둔 한 워킹맘은 인터넷 사이트에 맞벌이라고 써 냈을 때는 1년 넘게 연락이 없다가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잠깐 쉬는 동안 전업맘이라고 했더니 금세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의 가정어린이집 보육교사인 윤미경(가명·52)씨는 두세 자리가 빌 때가 있는데 직장맘 자녀가 문의하면 원장이 빈자리가 없다며 거부한다. 일찍 집으로 데려가는 아이를 고른다고 털어놓았다.

 

중앙일보 심층 인터뷰를 분석해 보니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어린이집을 구하기까지 1년 안팎 대기했거나 20~30군데를 수소문한 경우가 많았다. 보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맘은 어린이집 대기기간이 6.9개월로 전업맘(6.2개월)보다 길다. 또 하루라도 빨리 어린이집을 구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들은 대기기간이 긴 국공립 어린이집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마포구 직장맘 박미영(가명·34·마트 계산원)씨는 임신 7개월부터 구립 어린이집에 신청을 했지만 대기순번이 1000번으로 밀려 있어 포기하고 민간 어린이집을 구했다.

 

맞벌이 가정 아이의 보육 기피와 관련, 서울 송파구 민간 어린이집 최민희(가명·46·) 원장은 오후 3~4시에 아이를 찾아가든, 오후 7시 넘어 데려가든 지원되는 보조금은 같다보육교사의 입장에서 8시간 이상 근무하는 게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다 보니 맞벌이 자녀를 기피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맞벌이 가정 자녀에 대해 입소 거부를 하다 적발되면 시정명령과 최대 6개월 운영정지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서울 송파구청 관계자는 어린이집에서 맘먹고 맞벌이 가정 자녀를 기피하려면 다양한 방식으로 피해 갈 수 있다현장 점검 나가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휴가 내기 눈치보여아이 아파도 주말까지 진료 미뤄

 

안심하고 애 키울 수 있는 나라 직장맘의 비명 () 위협 받는 아이 건강

늦도록 어린이집 혼자 남는 아이

TV로 시간 때우며 방치되기 일쑤

부모에게 버림받은 느낌 들 수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직장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아이의 건강이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직장맘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친정·시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보모를 고용할 여유가 없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아이를 제때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해 병을 키우기도 한다.

 

중앙일보가 맞벌이 직장맘 30, 보육교사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대부분 그런 고충을 털어놨다. 18개월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서모(31·무역회사 근무)씨는 지난주에 아이 귀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감기 치료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속이 너무 상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명시 회사원 최모(32)씨는 아이가 좀 아파도 약을 먹여 어린이집에 보냈다가 주말에 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말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이의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이유는 갑자기 휴가를 쓰려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직장 분위기 탓이 크다. 서울 성동구 직장맘 박모(36)씨는 지난해 아이가 수두에 걸렸을 때 어쩔 수 없이 휴가를 썼지만 집에서 회사 일을 해야 했다. 회사 상사가 업무에 지장이 심하다. 집에서라도 일해서 보내라라고 해서다. 스웨덴은 12세 이하 아이가 아프면 연 120일 휴가를 쓸 수 있고, 임금은 사회보험에서 지원한다. 한국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김춘진 민주당 의원이 지난 3월 만 6세 이하 자녀가 독감·수두 등의 법정감염병에 걸렸을 때 부모가 사흘간 유급휴가를 쓸 수 있는 규정을 담은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발의해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아이가 아픈데도 어린이집으로 보내라는 원장 압박을 받기도 한다. 서울 강남구 한모(36·호텔 근무)씨는 최근 아이의 감기가 낫지 않아 어린이집을 한 달 중 나흘밖에 보내지 못했다. 이 경우 보육지원금이 25%만 나온다. 이 어린이집 원장은 제대로 출석하지 않으면 돈이 안 나오는데, 다음 달에 아이를 뺄 거냐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아이를 맡기는 부모의 고민은 더 크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 없이 TV 시청 등으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여서 아이의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받지나 않을까 우려한다. 서울 송파구 한 어린이집은 마지막 남은 아이 혼자만 두고 원장이 집을 비웠다가 부모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한 어린이집 교사는 오후 430분에 혼자 남은 아이를 두고 원장이 쟨 혼자 굉장히 잘 놀아. 그냥 노래 틀어주고 나와라고 말한 사실을 한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이 교사는 아이가 혼자 한 시간가량 방안에 누워 있었다. 애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밝혔다. 서울 관악구 어린이집 교사 최모(29·)씨는 맞벌이 가정 아이들은 욕구불만이 많아서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혼자 남은 기억은 오래 가기도 한다. 직장맘 이모(43·서울 영등포구)씨의 초등학교 6학년 딸은 요즘도 어린이집에 선생님하고 둘이 남았을 때 너무 깜깜하고 심심했다고 말한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노경선 박사는 딴 아이들이 귀가한 뒤 혼자 남는 아이는 엄마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라며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교사들이 책을 읽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보살펴야 아이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신철희 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0~2세 영아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좋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보낼 경우 정서 발달 상황을 체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이지영·고성표·장주영·이승호·강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