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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錢有罪 여전… 위철환 신임 대한변협 회장

풍월 사선암 2013. 2. 6. 23:42

無錢有罪 여전民事에도 국선변호인제 도입해야

 

위철환 신임 대한변협 회장

 

위철환 대한변호사협회 차기 회장이 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변협회관 사무실에서 법조개혁 방안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국 개업 변호사 12628명의 대표인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 당선된 위철환(55·사법연수원 18) 변호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오는 24일 퇴임하는 신영무 회장을 뒤이을 제47대 변협회장에 당선된 그는 서울대를 나오지 않고, 고위 판검사 출신이 아니며 경기지역 개업 변호사로서, 지난 121일 변협 역사상 처음으로 직선제로 치러진 변협회장 선거에서 당선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서울변호사회 소속 회원이 9000명이 넘는 상황에서 비서울 출신이 변협회장에 당선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취임일(225)과 같은 날 2년 임기의 변협회장직을 시작하는 위 변호사를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변협회관에서 만나 변호사 시장을 포함한 법조개혁 방안과 자신의 인생스토리 등을 물어봤다.

 

사법시험 존치를 공약으로 내세우셨는데, 그럼 로스쿨은 폐지하자는 주장입니까.

 

폐지하자는 건 아닙니다. 로스쿨이 시작된 지 2년 됐는데, 아직 출발하는 상황이니까 적어도 일정기간 해보고 그것에 대해서 뭔가 국민적인 합의가 결론이 나기 전에는 사시를 폐지할 순 없습니다. 적어도 결판이 나려면 10년 이상은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로스쿨의 성패를 좀 보고 나서 사시 폐지 여부를 판단하자는 말씀입니까.

 

로스쿨 자체에 대해 호불호를 떠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사시는 종래부터 과거(科擧)제 비슷한 거 아니냐, 이겁니다. 쉽게 말하면 저 같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야간고, 야간대를 다니면서 어떤 사다리, 탈출구, 문이 있었다는 겁니다. 설사 돈이 없더라도 혼자 도전해 볼 수 있는 그런 기회 말입니다. 계층이동을 위한 사다리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로스쿨을 못 가고, 법조인이 못 된다, 그렇게 되면 문제죠. 한 명이 되든지, 두 명이 되든지, 100명이 되든지 간에 적어도 그 문호는 열어놔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시와 로스쿨을 병행하자는 겁니까.

 

쉽게 말해 일본 같은 경우는 로스쿨 나온 사람들이 변호사가 되기 위해선 신사법시험을 봅니다(이 대목에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로스쿨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일정 숫자를 할애해 둔 예비시험에 합격한 사람도 신사법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로스쿨의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겁니다. 물론 비중은 로스쿨 출신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16년이 되면 사법시험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법시험의 명칭은 사라지더라도 적어도 사다리는 일정 숫자라도 남겨두자는 겁니다. 자꾸 언론에서 로스쿨과 사법시험을 갈등 구조로 끌고 가지 마세요. 소외계층에 대한 사다리를 남겨둔다는 데 초점을 맞춰야지 자꾸 갈등을 부추기면 안 됩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나 독재정권 때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민적 존경을 받은 변호사들이 상당했지만, 최근 들어 변협이 공익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익집단으로 사익만 추구한다는 지적들이 많다. 불편한 진실을 찔러봤다.

 

이번 변협회장 선거 때 법조개혁이나 사회헌신적인 담론은 안 보이고 공약들이 변호사 직역(職役)이기주의로 흘렀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종래에는 변호사가 희소성이 있고 사회적 존경도 받았고, 경제적으로 먹고살 만했습니다. 변호사 자격증만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부와 명예가 해결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변호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는 걸 넘어 먹고살기도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자살하거나 과로사하는 변호사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회원들을 상대로 선거를 하다 보니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공약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심층적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무료 법률지원 등 공익봉사를 하는 변호사들이 많습니다.”

 

변호사 업계도 빈익빈 부익부, 과당경쟁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사법불신이 상당한데요, 과거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런 게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민사소송 같은 경우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사사건의 경우는 국선변호사 제도로 꽤 많은 국민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데, 민사도 좀 그런 것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법률 구조기금을 마련해서 변호사 강제주의 같은 걸 도입해야 합니다. 예전에 이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가 폐지됐습니다. 당시에 재원마련이 안 되고 변호사 숫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호사가 한 해에 2500명이 나옵니다. 그 젊은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법률구조제도가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국선변호인 하듯이 강제주의로 묶어서 배당해 주면 됩니다. 젊은이들을 힘들게 변호사로 뽑아서 내팽겨치면 안 됩니다. 지금은 뭐 약사만도 못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좀 있으면 필리핀처럼 택시기사하는 경우까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호사를 많이 뽑지 말든가, 아니면 탈출구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박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면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변협회장은 검찰총장추천위원회의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다. 현재 최대 현안 중 하나인 검찰총장 인선이나 검찰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어떨까.

 

검찰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건 정치적 중립입니다. 정치적 중립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말썽이 나오는 겁니다. 검찰총장 임명 절차부터 중립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 다음 문제가, 검찰이 기소독점주의로 인해서 임의로 불기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견제책이 미약합니다. 재정신청 제도가 있지만 국민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낙마한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 소장과 검찰총장후보추천위에 검증동의서를 낸 안창호 헌재재판관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 사법부 최고지위에 오른 분들이 행정부로 옮겨가는 게 3권분립 정신에 맞지 않다는 지적인데요.

 

법으로 금지한 건 없지만, 법 이전에 헌재재판관이나 이런 분들의 권위라는 게 있으니까. 3권분립 이런 점에서 보면 사법부의 위신이랄까 권위나 이런 걸 국민들이 좀 걱정할 겁니다.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헌재재판관이나 헌재소장은 그 자리를 마지막 공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법원은 문제가 없습니까.

 

이거 하나는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법원에 심리불속행제도라는 게 있는데, 그거 폐지해야 합니다. 대법원에 상고하게 되면 대법관이 판결 이유를 길게 쓰지 않고 한두 줄 많으면 두세 줄로 이건 상고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고 기각해 버립니다. 상고를 한 번 하게 되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는데 그거 받고 왜 내가 기각을 당했는지납득이 안 됩니다. 대법관이 내 기록을 읽어나 봤는지 의심이 듭니다. 대법관들이 하루에 열 건 이상 사건서류를 봐야 하는데, 잠을 안 자고 봐도 소화하기 어려운 분량입니다. 그래서 심리불속행제도라는 방편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러나 그걸로 인해 국민들이 받는 피해는 말도 못합니다. 대법관 수를 늘리든가 고등법원에 상고심사부를 두자는 의견도 나옵니다.”

 

법조개혁에 대한 대화는 이쯤하고 영화나 소설 속에나 나옴 직한 파란만장했던 개인사로 화제를 옮겼다.

 

왜 중학교 졸업하고 16세 어린 나이에 맨주먹으로 상경하셨습니까.

 

내가 장흥 읍내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장평면 출신입니다. 중학교에서 전교 12등 했는데, 광주일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어요. 큰 충격을 받았어요. 큰물에서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먹고살기도 어려웠을 텐데 야간고에 가신 계기는 뭐죠.

 

어느 날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는데, 내 또래 고등학생이 창가에서 공부하고 있는 걸 보고 크게 느꼈습니다. 끼니 해결도 힘들었던 나는 거의 공부를 포기한 상태였는데, ‘, 이래선 안 되겠다. 다시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절 돈 없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상고나 공고를 많이 갔는데, ‘길게 보자고 생각해서 인문계를 갔죠.”

 

위 변호사는 중동고 졸업 후 서울교대를 들어갔다. 당시는 2년제였고, 국립대학으로 등록금이 적었던 것도 매력이었다. 이후 서울 미아리고개 넘어 청덕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성균관대 법대 야간에 편입학해 낮에는 선생님, 밤에는 학생이 돼 주경야독’ 5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교사는 만 6년을 했다.

 

문화일보 2013년 02월 06일(水) / 인터뷰=김세동 차장(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