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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치즈 40년, 임실 치즈마을

풍월 사선암 2012. 12. 10. 17:11

 

천안=호두과자, 성주=참외, 횡성=한우, 금산=인삼지명만 들어도 머릿속에 공식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지역 특산품이다. 그런데 전북 임실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치즈가 떠오른다. 서양 식품인 치즈가 우리네 땅에서 토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워낙 유명해서 이제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입에 착착 감기는 임실치즈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금성리를 찾았다.

 

서양 음식이 토종 특산품으로

   

눈발은 전라북도 임실에 다가갈수록 점차 굵어진다. 노령산맥의 동쪽 산간지대 임실, 하얀 옷을 입은 산촌의 풍경이 외지인을 반긴다. 이러한 산촌 마을이 서양의 '치즈'와 인연을 맺기까지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일까. “임실은 국내에서 처음 치즈를 생산한 곳이죠. 임실치즈는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큽니다눈의 나라로 변신한 마을 앞에서 임실 치즈마을 황성수총무가 옛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임실치즈는 임실성당에 부임한 지정환신부(본명: 디디에 세스테벤스)의 손에서 1967년 처음 탄생했다. 당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민을 돕기 위해 서양에서 산양 2마리를 들여온 것이다. 산과 풀로 이뤄진 마을의 지형이 치즈를 생산하기에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물론 치즈 생산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거듭 실패를 맛보고 유럽에서 비법을 배워오길 수차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지신부의 노력은 지금의 임실치즈를 만들었다. 벨기에 출신 신부는 현재 임실치즈 관련 사업을 모두 주민에게 넘겼다. 그래도 그의 특별한 한국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지신부는 건강이 악화됐지만 한국을 떠나지 않고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쫀득한 치즈 맛을 일궈낸 금성리 사람들

   

40년 한국 치즈 역사의 문을 지정환신부가 열었다면 그 쫀득한 힘을 지킨 건 바로 임실 주민이다. 임실군 임실읍 금성리 치즈마을에 들어서자 치즈와 관련된 간판과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성, 중금, 금당 세 부락이 함께 모여 있는 금성리는 원래 느티마을이었다. 마을입구까지 아름드리 늘어선 느티나무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마을 주민들은 1967년 지정환신부가 임실에 최초의 치즈공장을 설립하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치즈를 생산했다. 현재 마을 안에는 치즈 등 유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3곳이나 들어섰다. 그 중 ()숲골유가공은 전국 최초의 목장형 유가공 공장이다. 딸기 요구르트, 복분자요구르트, 호박요구르트와 대표상품인 모차렐라치즈를 생산한다. 그뿐 아니다. 치즈 아카데미를 열어 가정에서도 치즈를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숲골 대표 김상철씨는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각 가정에서 고유의 치즈를 만들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임실치즈를 통해 그런 문화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고요라고 말한다. 치즈생산 판매에 성공한 금성리는 2003년 농림부에서 주관하는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신청해 2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때부터 치즈 만들기체험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해 2006년에는 마을 이름도 치즈마을로 바꾸었다. 치즈만들기, 산양체험, 피자 및 먹거리 만들기 등 주민의 아이디어를 통해 특별하고 신선한 체험 프로그램이 채워져 갔다. 200610,348명이었던 마을 체험객은 200934,668명으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희망의 마을

   

사랑아, 예쁜아, 김냥아~” 산양체험장에 들어섰다. 주인 유덕자(38)씨는 40여 마리 산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있다. 이름을 부르면 신기하게 다가와 아는 체를 한다. “산양은 매우 순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체험하기에 참 좋죠. 처음엔 무서워하던 아이들도 먹이주기, 젖짜기 등을 해보면서 마음을 연답니다남편 심요섭씨와 함께 산양목장을 운영하는 유덕자씨처럼 마을을 돌다 보면 유독 젊은 부부와 어린이를 만나게 된다. 사실 치즈마을의 가장 큰 희망은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데 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230여 명의 주민 중 40세 미만의 주민이 100여 명이다. 그 중 어린이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수다. 마을에 초등학교가 따로 있을 정도다. 치즈마을에 젊은 세대가 많이 살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현재 주민의 소득원은 치즈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 1968년 임실제일교회 심상봉 목사는 '예가원'이란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환경농업을 실천하며 주민의 삶을 일으켜 나갔다.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환경농업을 실천하며 주민의 삶을 일으켜 나갔다. 이제 대부분의 주민이 자신의 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1990년에는 우렁이농법과 오리농법을 실천했다. 2004년에는 스테비아 농법도 받아들였다. 주민들은 마을 살림살이와 관련된 기관과 단체를 만들어 유기적으로 협력해 나간다. 치즈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일이 늘어나자 관련 업무 담당자를 따로 7명이나 두었다. 주민 대부분이 치즈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맡아 운영해 나간다. 마을의 모든 것이 맞물려 움직이다 보니 공동체의식이 클 수밖에 없다. 주민 스스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서 치즈를 맛보러 오는 사람까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에 반해 또 찾게 만드는 것일 게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지정환 신부(왼쪽)가 주민과 함께 치즈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벨기에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정환 신부(본명:디디에 세스테벤스)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959년 한국에 왔다. 첫 부임지 부안 성당에서는 간척사업을 통해 30만평의 땅을 일구고, 임실성당에 부임하고 난 뒤에는 산양 2마리로 임실치즈를 일궈냈다. 지 신부는 건강이 악화됐지만 한국을 떠나지 않고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임실 치즈마을 제공>

 

가는길

용산에서 임실역으로 오는 무궁화호가 하루에 4차례 있다. 임실역에서 마을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이다. 차를 몰고 온다면 호남고속도로 전주 IC로 나와 전주시내(동부우회도로)를 관통해 17번 국도를 탄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약 30km 정도 가면 좌측으로 임실역을 지나 다시 좌회전해서 솟대로 장식한 홍살문을 지나면 치즈마을이다.

 

·동영상 이윤정 / 경향닷컴 영상취재팀

, 사진, 영상 취재를 아우르는 1인 멀티플레이어 기자다. 대학에서 언론정보학과 공연영상학을 복수전공했다. 현재 직접 카메라를 메고 길, , 섬을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한국> 기획 취재를 하고 있다.

 

 

 

치즈는 인간이 목축을 하면서 자연스레 발견한 음식이다. 개발이나 발명이라 하지 않는 것은 우유는 효소의 작용, 산도의 변화 등 여러 조건에 의해 응고가 되는데, 이 현상을 자연에서 발견하여 식품에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의 식품에는 치즈가 반드시 있다. 까닭은, 우유는 금방 상하지만 치즈로 가공하면 몇 년을 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장식품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각종 문헌에서는 전 세계의 치즈 종류가 1,000여 종이 넘는다고 하는데, 더 섬세하게 나누면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숙성 치즈의 경우 어떤 세균이나 곰팡이가 관여를 하는가에 따라 맛과 색이 달라지며, 이 세균과 곰팡이는 셀 수도 없이 다양하므로 치즈 역시 그러하다. 집집이 된장 맛, 김치 맛이 다른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한반도 음식 역사에 이 치즈가 없었던 것은 목축이 발달할 수 있는 농업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치자 물을 들인 고다치즈이다. 임실치즈마을의 한 업체에서 시도하고 있는 치즈 한국화의 한 예이다.

 

한국 치즈의 역사가 시작된 곳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의 치즈, , 소시지 등이 한국 시장에 흘러들었는데, 햄과 소시지는 고기 맛이 강하여 크게 환영받았지만 치즈는 특이한 발효 향으로 인하여 거부되었다. 치즈가 한국 시장에서 크게 성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서양식 레스토랑이 번창하면서부터이다. 특히 피자가 치즈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치즈 소비는 피자 토핑으로 올리는 모차렐라, 연유 등을 넣어 맛을 부드럽게 한 가공 치즈에 한정되어 있다. , 맛보다는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치즈 전통이 전혀 없으며 치즈를 즐겨 먹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사는 이 땅에 벨기에에서 온 지정환 신부가 다소 엉뚱한 일을 벌였다. 1967년 전북 임실군 임실읍 갈마리라는 조그만 산촌에서 치즈를 생산한 것이다. 지역 농민의 소득 증대를 위해 벌인 사업이었다. 애초 그는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었다. 영국식인 체다 치즈와 프랑스식인 포르 살뤼 치즈, 그리고 이탈리아식인 모차렐라 치즈를 생산해 조선호텔 등에 공급하였다. 체다 치즈는 숙성 기간이 3개월 이상 되며, 포르 살뤼 치즈는 숙성 기간이 한 달 정도이다. 즉 향이 강한 치즈이다. 시장이 쉬 넓혀지지 않았다. 1981년 임실의 치즈 가공 농민은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산양유 대신에 우유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치즈 생산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마침 1980년대 중반부터 피자 붐이 일면서 모차렐라 치즈의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포션 치즈라 불리는 가공 치즈도 인기 상품이 되었다. 임실치즈신협은 임실치즈농협으로 거듭났으며 최근에는 대형 최신 설비의 공장까지 마련하였다.

 

임실 치즈는 임실의 자산이다

 

1990년대 말에 들면서 임실 치즈는 유명 브랜드가 되었다. 여러 피자 가게에서 임실 치즈라는 명칭을 내걸었다. 임실 치즈를 내건 피자 프랜차이즈만 20여 업체가 넘는다. 2000년대 들어 임실에 치즈 마을이 조성되었다. 치즈 마을에는 소규모 치즈 가공 공장이 섰고 치즈 가공 체험장도 만들어졌다. 치즈 체험이 인기를 끌면서 전국 곳곳에 이와 유사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체험장이 어디에 있건 임실 치즈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임실 치즈 개발자인 지정환 신부의 초상권과 성명권을 독점한 업체도 생겼다. 2011년 현재 임실 치즈 브랜드의 혼란은 극에 달해 있다. 임실군에서는 임실에서 생산한 치즈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임실N치즈라는 공동 브랜드를 만들었으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수많은 임실 치즈 피자 가게에서 임실N치즈를 사용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임실N치즈를 구입하여 소량 섞어넣고 임실 치즈 피자라 하여도 법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두고 부도덕한 상술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임실 치즈라는 브랜드가 온전히 임실만의 자산이 되게 하려면 그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확보하여야 할 것인데, 지리적표시제라는 제도를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소비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임실 치즈의 지리적표시품 등록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산이라도 이를 지킬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남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랜 제조 노하우가 있다

 

임실 치즈의 적자라 할 수 있는 임실치즈농협은 최근에 대형 설비를 갖추었다. 시설이 자동화되어 있는데, 공장형 치즈라 할 수 있다. 위생이며 제품 질의 향상, 균일화에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나 전통적인 수가공 치즈의 맛과 멋은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임실치즈농협 홍보 담당자는 오랜 제조 노하우가 있어 모차렐라는 스트레칭이 좋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하였다. 2000년대 들어 임실에는 목장형 치즈 가공 업체가 생겼다. 치즈 마을 등에서 모두 8개 업체가 운영되고 있다. 젖소 목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그 우유로 치즈를 가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치즈 수요에 비해 우유가 모자라면 외부에서 우유를 공급받기도 한다. 그 외부의 우유라 하더라도 치즈 맛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젖소를 키우고 우유를 짜는 일은 전국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진 황교익

농민신문사와 ()향토지적재산본부에서 향토음식과 지역특산물의 취재 및 발굴, 브랜드 개발 연구를 했다. 국내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로 [맛따라 갈까보다], [소문난 옛날 맛], [주말농장 즐기기], [알기 쉬운 지리적표시제]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