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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세계사] 체 게바라

풍월 사선암 2012. 11. 22. 11:18

(전략)어른이 되었을 때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여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단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는 다른 시대를 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대에 걸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후략)

- 19662월 체 게바라가 딸 일디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전사 그리스도 혹은 20세기 가장 완전한 남자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1928년에 태어나 1967년에 39세로 죽은 체게바라는 살아 있었을 때도 쿠바와 남미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사후 그가 생존 했던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많이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68운동당시 영웅으로 추대받았고 이후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소비되고 있다.

 

특히 그가 보여준 현실의 안락과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죽어간 삶의 궤적은 이후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그를 멘토로 삼기에 주저치 않게 하였고 그의 참혹한 죽음은 전사 그리스도란 별명을 붙이게 까지 했다. 이런 인기 때문일까. 체 게바라는 혁명의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경계했던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미국에서조차 가장 뜨겁게 인기있는 인물로 소비되고 있다. 혹자는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 남았다고 할 정도로 체 게바라는 이념과 국가를 떠나 전설의 혁명가로 살아 남아 있다.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그의 얼굴 사진은 붉은 티셔츠에 프린팅되어 반항기어린 10대와 20대의 가슴팍을 장식하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시계, 심지어 맥주까지 나오면서 체 게바라라는 이름은 이제 남미의 혁명가가 아니라, 젊은이라면 한번쯤 눈 돌려 관심을 가져보고 싶은 하나의 아이콘 쯤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살아있었던 인물 자체보다도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버린 체 게바라이지만 그 상징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이토록 사랑을 받게 된 데에는 인간 체 게바라의 삶 자체가 가진 준엄함과 숭고함이 있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초 남미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체 게바라는 안락한 지위를 버렸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앞에 누구보다 순정했으며, 이를 지키기위해 자신에게 가장 엄격했던 사람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여행을 좋아하는 청년 의사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체 게바라란 이름에서 체(che)는 스페인어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어이’ ‘이봐정도의 의미를 지난 말로 체 게바라가 혁명에 뛰어 들면서 스스로 이름을 이렇게 고쳤다고 한다.

 

◀17세무렵 체 게바라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중상류층 백인 가정 출신이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는 세계 경제순위 7위를 할 정도로 부유한 나라였고 남미에서 가장 잘 살았다. 하지만 이 풍요는 아르헨티나의 백인 상류층들이 구가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남미 민중들과 비슷하게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양친은 바스크와 아일랜드계의 백인으로 남미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톨릭을 믿고 있는데 반해 그의 어머니는 무신론자였다고 한다.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와 안정된 경제적 환경속에서 체 게바라는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난 데다 2살 무렵 극심한 폐렴을 앓은 탓에 평생 매우 중증의 천식을 지병으로 가지고 살았다. 체 게바라의 양친은 몸이 약한 아들을 위해 천식 치료에 좋은 곳으로 몇 번이나 이사를 할 정도로 장남 체 게바라에게 정성을 쏟았다. 천식으로 호흡곤란이 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늘 산소 흡입기를 소지해야만 했지만 체 게바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럭비나 수영 등 힘든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지병을 조절해갔다.

   

스물 다섯 살에 의학박사학위를 딴 후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체 게바라는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진보정권을 이루어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던 과테말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체 게바라는 자신의 삶에 있어 두 가지 큰 변화를 맞는다.

 

하나는 페루에서 학생운동을 벌이다가 과테말라로 망명 온 3살 연상의 여성 혁명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 선거로 이룬 과테말라의 아루벤스 진보정권이 미국자본의 지원을 받은 아르마스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체 게바라는 비폭력적 개혁은 한낮 꿈일 뿐, 남미 민중을 위한 진정한 혁명은 무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 그리고 쿠바 혁명전쟁

 

과테말라의 아르마스 독재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체 게바라는 일다 가데아와 함께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1955년 체 게바라는 일다 가데아의 소개로 쿠바의 망명 정치가인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1952년 쿠바의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선거가 무산 된 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체포, 2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한 상태였다.

 

◀피델 카스트로(맨 왼쪽)와 체 게바라(맨 오른쪽)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아는 강인하면서도 온화한 새로운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해방 운동에 동참했다. 처음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비밀 결사대에 군의관 자격으로 참여하였지만, 점차 그의 인품과 지도력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커져갔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86명의 동지들과 휴양용 요트를 개조한 배에 올라타 멕시코에서 쿠바로 떠났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상상태와 이들의 상륙을 간파한 바티스타정권의 공격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들어가 이때부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간지역을 전전했지만 곧이어 쿠바 내 반정부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게랄라의 세력은 급성장 하였다. 이 반군 게릴라 활동 중 체 게바라가 보여준 능력과 인간미는 그를 피델 카스트로에 이은 반군의 2인자로까지 끌어 올렸다.

   

체 게바라는 1958년 연말, 자신이 지휘하는 제 2군을 이끌고 쿠바의 산타클라라에서 승리하였다. 많은 쿠바의 민중들이 체 게바라의 군대에 동조하였고 이 승리로 반군은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얻었다. 마침내 19591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로 망명하면서 반군들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을 성공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가 되었고 체 게바라는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쿠바국민이 되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각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남아 있던 일다 가데아와 이혼하고 반군 활동 중 만난 전투동지 알레이다 마치와 재혼하였다.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 정국에서 라 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쿠바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 등을 거치며 서방세계로부터 쿠바의 두뇌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54,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돌연히 사라진 것에는 그가 권력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더 많은 민중을 혁명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쿠바 혁명 성공 후 피델 카스트로와의 불화가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체 게바라는 쿠바가 미국이나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하기를 원했지만 피델 카스트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강대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쉽사리 선택했고, 이는 체 게바라의 신념과 한배를 탈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군 시절 체 게바라

 

혁명가의 죽음

 

쿠바에 작별을 고한 체 게바라는 돌연히 아프리카 콩고로 가 혁명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혁명군은 체 게바라가 이때껏 접해온 남미사람들과는 달랐다. 아프리카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체 게바라는 실패하고 다시 남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금 볼리비아의 혁명에 가담했다.

 

당시 볼리비아는 1952년에 국민 혁명이 성공했지만 1964년 바리엔토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민혁명정부가 무너지고 군사독재로 접어들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반독재 혁명군에 참가하여 남미대륙에서 혁명운동의 거점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볼리비아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외국인인 체 게바라보다는 볼리비아인 혁명 대장을 원했고 혁명군 내에서도 조금씩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체 게바라의 지병인 천식은 고산지대인 볼리비아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농민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실패한 체 게바라는 산악지역을 전전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1967년 체 게바라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체포되었다. 부상을 입은 그는 마을 학교에 포로로 잡혔다. 체 게바라의 남미에서의 인기와 그의 활동으로 남미 국가들을 장악하는데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체 게바라의 총살에 동의했다. 체 게바라는 1967109일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의 손에 의해 사살되었다.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체 게바라를 쏜 마리오 테란은 6개월 후 자신의 집 4층에서 투신자살 하였다. 체 게바라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을 확인한 영국의 <가디언> 기자 리처드 곳은 이렇게 썼다.

 

나는 1963에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항한 전투에서 전세계의 급진적인 군대를 지휘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

 

그의 말처럼 체 게바라는 사후, 오히려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의 68운동에서 그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이후 이념은 사라져가도 체 게바라라는 상징으로 굳게 남았다. 그의 사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 되어 쿠바로 옮겨졌다. 그는 쿠바혁명의 성공 물꼬를 튼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대해 추억했다.

 

에르네스토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글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