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40년 공직생활 마치고 '아줌마' 돌아온 전재희 前장관

풍월 사선암 2012. 6. 9. 08:37

[김윤덕의 사람] 40년 공직생활 마치고 '아줌마' 돌아온 전재희 장관

 

철의 여인?나도 철없이 살고 싶었다

여성 최초로 행시합격·市長

3선 국회의원·복지부장관까지

졸지에 페미니스트 인생장작불 타듯 일하고 방전됐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정치는 무슨자유롭게 살고파 홍신자처럼, 한비야처럼!

 

살림하러 가요. 손주 키우러 갑니다.”

 

전재희(63)는 길에서 반갑게 알은체를 해오는 사람들 손을 잡고 일일이 인사했다. “이담에 나오시면 내가 또 찍어줄건디.” 아쉬워하는 시장통 할머니에게 힘달려 이제 그만 하려고요하며 활짝 웃었다. “업무와 상관없이 (광명) 구름산에 올라간 게 지난 주말이 처음이에요. 개인으로 돌아오니 얼마나 편한지. 아무런 구하는 바 없이 무연히 흘러가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 참 좋더라고요.”

 

4·11 총선에서 낙선한 뒤 사실상 정계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5일 광명에서 만났다. 매우 드라이한 인터뷰가 될 거란 생각은 기우였다. 장관 시절처럼 반듯한 정장차림이었지만 그는 ()의 여인이 아니었다. 별말 아닌데 파안대소하고, 별일 아닌데 눈시울을 붉히는 수다스러운 아줌마였다. 공직 리더십, 여성 리더십의 대표 유형으로 언급돼온 전재희가 홍신자, 한비야의 자유롭고 열정적인 삶이 부러웠다고 했을 땐 가슴이 다 뭉클했다. 가난을 이기려고 고시에 매달렸고, 여성이란 굴레를 떨치기 위해 이 악물고 달려온 40년 공직인생이었다.

 

◀상추와 과일 봉지를 든 전재희 전 장관의 모습이 영락없는 이웃집 아주머니다.“나는 시장에 와야 마음이 편해요. 무슨 오찬, 만찬 열리는 호텔보다 여기가 훨씬 좋아요. 우아하게 살 팔자는 못되나 봐요. 하하!”

 

정치, 반드시 이길 필요는 없다

 

국회를 떠나는 소회가 어떠신지.

 

내가 좀 꼼꼼한 성격이라 열심히 했다.(웃음) 잘못된 정책 바로잡고, 예산 낭비 막으려 노력했고, 새로운 제도도 만들었고. 그런데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나라의 정치가 더 아름다워졌나, 맑아졌나 하는 것에는 회의가 든다. 큰일은 못하고 나온 듯한 아쉬움, 도도히 흘러가는 정치의 큰 물결을 바로잡는 데는 힘이 되지 못했다는 서글픔이 있다.”

 

정치 신인 이언주 변호사에게 패한 원인이 뭘까.

 

보건복지부 장관 하는 2년여 동안 지역활동을 거의 못했다. 정권 심판론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거다. 사실 불출마할 생각이 있었는데 당이 어렵고 지역이 어려운 상황에서 제대하지 않고 군대를 떠나는 꼴이 될 것 같아 출마했다. 마지막 출마라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기도도 했다. 당선되면 공약을 100%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하느님이 100% 면제해주시더라. 홀가분하다.(웃음)”

 

19987월 보궐선거에서 조세형 당시 여당(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이라는 거물과 맞붙는 바람에 다윗과 골리앗의 주인공이 됐다. 이번엔 골리앗이 되어 다윗에게 지는 상황이 됐고.

 

그런가?(웃음) 그런데 당선된 후보가 현재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정치라는 것은 보다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한 일이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 정치는 아니다. 젊은 분이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나를 좀 더 깔끔하게 이겨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전재희는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말은 여성계 동지라고 할 수 있는 한명숙 전 민주통합당 대표가 했다.

 

진심이었는지, 정치적 수사였는지는 지금도 물어보고 싶다. 정치적 수사였다고 해도 여성 정치인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웃음)”

 

선거운동 기간 중 이언주 후보 측이 ‘OUT 전재희 18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김용민의 막말 스캔들처럼 상대 후보를 역공할 기회이기도 했을 텐데.

 

그러잖아도 참모들이 우리가 네거티브(비방)를 너무 안 한다고 불평하더라.(웃음) 근데 나는 싸움의 정치가 싫다. 소송하고 기자회견하고 경찰서 드나드는 게 얼마나 시간낭비인가. 사필귀정이니 무엇이 옳았는지는 나중에 알려지겠지.”

 

국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시 김문수 의원이 누님, 여기는 칼만 안 들었지, 전쟁터야라고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국회가 국민 대표들이 머리를 맞대고 보다 좋은 걸 택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밤낮 몸싸움만 하길래 여기는 왜 이러냐물었더니 김문수가 그런 말을 하더라.(웃음) 전쟁터라는 말도 일리 있다. 하지만 정치는 0점과 100점의 선택이 아니고 40점과 70점 사이의 선택이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 대개는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사안인데, 사사건건 자기네 주장만 백미라고 우긴다. 중진의원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몸싸움방지법에 찬성표를 던진 이유다.”

 

사실상 정계은퇴인가? 경기도지사 후보설도 있던데.

 

"일선을 떠났다고 봐야지. 더이상 (정치와 관련해) 뭘 한다든지 하는 계획은 없다. 도지사는 무슨.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정치일선을 떠났는데도 바쁘더라. 서대문에 사는 손자 봐주러 다니고, 대구에 계신 친정어머니 편찮으시니 한 달에 한 번은 내려가 돌봐드린다. 편지로 자주 안부를 여쭈려고 우표를 잔뜩 사놨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우표값이 270원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웃음)."

 

"절에서 고시공부 하다 영양실조합격 후엔 팬레터 박스로 받아"

 

가난한 지방대 졸업생

내 힘으로 취직하는 길은 공무원밖에 없어 고시 쳐이에리사 금메달만큼 화제 여성운동 질문, 곤란했었다

 

나홀로 여성운동

들어가니 여성 업무만 시켜 청와대로 보내달라 투쟁

막상 문화부 가니 재미 없어 노동부 옮겨 女工 위해 일해

 

나는 보통 아줌마

버스비 아끼려 걸어다니며 월급 타면 시어머니께 바쳐

바빠도 가족과 스킨십하려 네 식구가 한 방에서 자

 

북핵만큼 무서운 저출산

보육시설에 안 보내고도 양육수당 받을 수 있게 해야

복지예산·영리법인 때문에 기획재정부와 그렇게 싸워된장찌개 먹으며 풀었다

 

장작불 타듯 일해서 행복했다

 

3선의 국회의원이지만 전재희는 정치인보다 행정가라는 수식이 훨씬 잘 어울린다. 노동부 공무원으로 20년간 일한 점, 광명시장으로 일하면서 쌓아올린 성취와 명성을 발판으로 국회에 입성한 전력 때문이다. 전재희 자신도 "()를 모아서 밀어붙이는 정치보다 꼼꼼히 따지고 견줘서 정책을 만들고 관리하는 행정이 내 적성에 잘 맞았다"고 했다. 2년여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을 두고 그는 "내 인생에 가장 축복받은 자리였다"고 회고했다.

 

바람 잘 날 없는 보건복지부에서 장수하셨다. 퇴임할 때 '너무 치열하게 일해서 방전된 느낌'이라고 하셨더라.

 

"나는 무슨 일이든 일단 끝내고 나면 하얗게 재가 된 느낌이다.(웃음) 천성이 장작불 타듯이 일하는 타입이다. 국회의원 신분으로는 해결 안 되던 일들이 장관 신분으로는 해결되니 신바람이 났을 거다."

 

장관 재임시절 그 토대를 마련한 무상보육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 엄마들이 무상보육 혜택을 받으려고 돌도 안된 아기들을 어린이집에 보낸다.

 

"그 문제는 아동양육수당으로 해결해야 한다. 현재는 보육시설에 아이를 보내야만 무상보육 혜택을 받는데, 앞으로는 집에서 아기를 키우는 경우에도 일정액의 양육수당을 주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엄마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두 돌 전까지는 아기와의 11 스킨십이 정서적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 보육시설에서는 1(교사)3(아기)이 되니 엄마가 품고 키우는 것만 하겠나. 설령 직장에 다니더라도 육아휴직을 하고 1년간 아기와 눈 마주치며 부모가 키우는 게 맞다. 양육수당은 그래서 꼭 필요하다. 장관으로 있을 때 스웨덴식 부모보험(parental insurance) 도입을 검토하기도 했다." 스웨덴식 부모보험이란 조세 성격의 사회보험에서 육아휴직, 부모휴가 수당을 충당하는 제도다. 유급 육아휴직을 적극 권장하는 제도로, 스웨덴에서는 17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보육시설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문제는 언제나 예산 아닌가.

 

"북핵만큼 무서운 게 저출산이다.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강의 기적은 신기루가 되고 만다. 일본이 침체일로에 빠진 것은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 이전에 저출산·고령화에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미래 국가경제의 핵심 문제인 만큼 기획재정부가 깃발을 들고 나서야 한다."

 

재임 시절 영리의료법인의 설립을 끝까지 막았다. 일부 의사들은 장관 퇴진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송도 국제자유구역 같은 곳 말고 일반 도시에 영리법인이 들어오는 걸 반대한 거다. 전국에 영리법인이 허용되면 영업이 안 되는 중소도시 병원들은 문을 닫게 되고 진료비는 상승한다. 그런 부작용을 차단할 보완책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게 우리 입장이었다."

 

복지예산, 영리의료법인 등 첨예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막강 관료집단인 경제부처와 대립각을 세웠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고집 센 전재희 장관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말이 있다.

 

"국가를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싸우려고 한 건 아니다. 윤 장관님 퇴임하실 때 함께 된장찌개 먹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웃음)"

 

장관이 세세한 실무까지 훤히 꿰고 있어 복지부 직원들이 들들 볶였다더라.

 

"장관이 실무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매일 아침 신문을 펼쳐들고 복지정책 관련한 기사를 형광펜으로 줄쳐가면서 읽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담당직원 불러 해법을 마련하라고 했고. 기사의 피드백이 바로 오고, 그게 정책에 반영되니 기자들은 날 좋아했다.(웃음)"

 

장관 퇴임식에서는 왜 우셨나.

 

"원래 눈물이 많다. 연극 볼 때 무대의 막이 딱 올라만 가도 눈물이 난다. 남이 울면 또 같이 울고. 주책맞아 그렇다.(웃음)"

 

◀“큰 정치를 못해 아쉽다고 했지만, 전재희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고 윤리적으로도 청렴한 공직 리더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돌아갈 배를 태워버려라

 

대구 출신 전재희가 1973년 행정고시에 붙었을 때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행정고시 사상 첫 여성합격자인데다, 집안이 가난해서였다. 중학 시절부터 가정교사로 일해 등록금을 번 일, 산중 암자에서 고시공부를 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일화는 전재희 스토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같은 해 이에리사가 사라예보에서 금메달 딴 것만큼이나 화제가 됐나 봐요.(웃음) 라면박스 두 개 분량의 팬레터가 집으로 날아오고 인터뷰가 쇄도했으니." 졸지에 페미니스트가 되기도 했다. "가장 당황스러운 질문이 '여성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였어요. 대학 졸업한 뒤 나 좀 취직시켜달라는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 공무원 시험을 본 거라 뭐라고 얼버무렸는지 기억도 안 나요.(웃음)"

 

행정고시 첫 여성 합격자에 이어 중앙부처 첫 여성국장, 첫 여성 시장 등 '최초'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녔다.

 

"부담보다는 책임감이 컸다. '본전장사를 하고 가야 한다'고 다짐했지.(웃음) 여성 공직자로서 내가 실수하면 그게 전재희의 잘못이 아니라 여성의 잘못이 되니까 내가 거쳐 간 자리가 후배 여성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일했다."

 

경북 의성의 한 암자에서 매일 15시간씩 고시공부한 이야기는 전재희의 지독한 근성을 표현할 때 어김없이 인용된다.

 

"지방대 출신의 여성이 자력으로 직업을 얻는 길이 공무원 시험밖에는 없었다. 해야 하니까 열심히 했다. 한번은 설사병에 걸려 한밤중에 암자에서도 한참 떨어진 변소를 예닐곱번이나 들락거려야 했는데 컴컴한 산길을 오르며 다짐을 했다. 여기서 죽어 내려가든 (고시에) 합격해 내려가든 둘 중 하나라고.(웃음) 근성보다도, 학창시절부터 내가 생각이 좀 많은 여자애였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하면서 개똥철학을 하고.(웃음)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죽은 물고기는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는 말도 엄청 좋아했다."

 

'어머니가 가장 큰 스승'이라고 했다.

 

"나의 살과 뼈대는 물론 정신까지 만들어주신 분이다. 어머니는 맏딸인 내게 의도적으로 가사일을 가르치지 않았다.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3남매에게 늘 유관순, 안중근 의사처럼 살라고 독립운동 영화를 보여주셨다. 반대로 아버지는 세상 사는 데는 재주가 없는 분이었다. 사춘기 때는 그런 아버지가 정말 싫더라. 오죽하면 대원군, 아니 히틀러까지 멋져 보일 만큼 왜 우리 아버지는 강하지 않을까 속상했다. 나이 드니 선하고 어진 아버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깨닫게 되더라."

 

혼자 하는 여성운동

 

고시에 합격한 뒤 보사부 부녀 아동 담당을 하라는 권유를 뿌리치셨다더라.

 

"내가 '여자 공무원' 하려고 행시를 본 게 아닌데 여성이니 여성 관련 업무를 하라니까 화가 나더라. 땅을 넓게 파야 깊게도 팔 수 있는 거다. 절대 못한다고 장관 면담까지 신청하고, 청와대 아니면 총무처, 경제기획원 보내달라고 했다.(웃음) 그러고 보면 나 혼자 하는 여권 투쟁을 많이 한 것 같다. 무리지어 시위하는 건 못해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반드시 해낸다."

 

그 덕에 문화공보부로 갔지만 곧 노동부로 옮겼다.

 

"문화부에서 반공방송, 시책방송 만드는 일에 재미와 일체감을 느끼지 못했다. 노동부 일은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구로공단 근로여성교실도 열고 산업체 부설학교와 관련해 많은 일을 했다. 거기 오는 아이들이 라면 먹을 돈도 아껴서 시골집으로 보내는 여공들이었다. 내가 가난한 성장기를 보내서 그런지, 그들을 위한 정책을 정말 열심히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방대(영남대) 출신이라는 것이 공직 생활에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난 항상 마이너리티였다.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고향, 학교, 나이는 묻지 않는다. 그저 내 할 일이 무엇인가 찾아서 내 길만 열심히 갔다. 다행히도 여성이고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이 그걸 뛰어넘을 수 있도록 인내하고 결의를 다지게 하는 동기가 되었지, 나를 주저앉히는 장애물이 되진 않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보통 아줌마'라는 표현을 쓰셨더라. 장관까지 하신 분이 서민적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느 정도가 서민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늘 풍족하지 못했다.(웃음) 월급 타면 모두 시어머니 갖다 드리고, 버스비 아껴 용돈으로 쓰려고 신대방동 집에서 영등포까지 걸어다녔다. 내가 하는 일이 보통 여성들과 달랐을 뿐, 나 또한 일과 양육 병행하느라 힘겨웠던 여성이다."

 

양육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나.

 

"처음엔 시어머니 도움을 받다가 밤 11시 넘어 퇴근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월급을 털어 가사도우미를 고용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과의 스킨십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나, 두 아이가 모두 한방에서 잔 것도 그때문이다.(웃음) 엄마의 빈자리가 꼭 나쁜 것은 아니더라.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자랄 기회가 생기니. 우리 애들은 다리가 부러져도 저 혼자 병원에 갔다."

 

시장 아니 장관을 아내로 둔 남편의 심정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아내가 시장이고 장관이라고 기죽는 남자가 전혀 아니다.(웃음)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나의 일을 감싸고 이해해줬다. 내가 밖에서 기죽지 않는 남편을 원했듯이 남편 또한 기가 산 아내를 원했던 것 같다. 며느리에게도 부탁한다. 우리 아들이 용돈 만원만 달라고 하면 2만원 주라고. 그래야 네 남편이 밖에 나가 기가 산다고.(웃음)"

 

옛날 어머니들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유교 문화에 찌들어 자라 그렇다. 내 명의로 된 부동산이 없다.(웃음) 여성운동 하시는 분들이 보면 답답한 노릇이지."

 

홍신자처럼, 한비야처럼

 

전재희는 결벽에 가까울 만큼 청렴을 중시하는 여성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이 국회의원 후원금 계좌를 닫은 것이다. 남편이 간암 판정을 받아 장관직 사퇴까지 고려했을 때에도 주위에 알려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했고, 맏아들 결혼식도 가족끼리 몰래 치렀다. 지난해 선관위에 대한 디도스 공격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은 공직자에게 성직자 이상의 윤리를 요구한다"고 일갈하며 당 해산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너무 엄격해도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

 

"사람이니 유혹에 흔들릴 수 있지만 그걸 이겨내야 하는 자리가 공직이다."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이 공직비리로 검찰에 드나들고 있다.

 

"대통령을 모시는 자리이니 더욱 철저하고 청렴강직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사람들 아닌가.

 

"물론이다. 그런데 인사라는 게 참 어렵더라. 장관으로 내가 인사를 해보니 일할 만한 사람은 잘 안 보이고 2% 부족한 사람들, 그러나 그 자리에 가고 싶어 안달을 내는 사람들이 먼저 보이더라.(웃음) 인사는 권한이 아니라 의무라는 걸 절감했지. 두루 찾아서 사람을 쓰는 것이 필요한데 대통령이 그걸 잘하시지 못했다."

 

가난의 대물림을 막겠다는 이명박 후보의 말에 공감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뛰어들었다. 그런데 요즘 대통령이 욕을 많이 듣는다.

 

"전 세계가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 있고,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경제위기로 휘청거리는데,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이명박 대통령만큼 잘 막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양극화 문제나 서민경제 회복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대외의존도 높은 우리 경제를 이렇게나마 지켜내는 데 진력하신 것만큼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분 나름으로는 자신의 성공신화를 국가경영에도 적용해보려고 밤잠 안 주무시고 노력하셨을 거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면 '그래 해봐라' 하며 격려했는데, 대통령 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보고 난 뒤로는 그런 소리가 잘 안 나온다.(웃음)"

 

유력한 대선 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의 리더십은 어떻게 평가하시나.

 

"신중하고 절제된 정치인이다. 생각 이상으로 끈기와 강단이 있고, 약속한 것을 지키려 애를 쓰신다. 다만 국민과 자유로운 소통이 되지 않는 게 아쉽다. 삼엄한 경호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서민들과의 보다 소박하고 친근한 스킨십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재희, 나경원 등 중진 여성의원들이 빠져나가 새누리당의 여성 인물난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후배들이 잘할 거다. 역사는 항상 정()의 방향으로 가고, 후배들은 항상 선배들을 능가한다."

 

19대 국회에 여성 의원이 47명으로 역대 최다라고 한다.

 

"정치는 오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분들은 내가 하지 못한 큰 정치를 해줬으면 좋겠다."

 

네트워킹에 약해 큰 정치를 못했다는 말이 여성리더의 한계라는 말로도 들린다.

 

"여성의 한계가 아니라 전재희의 한계다. 정치란 같은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의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나는 홀로 떨어져 낙도정치를 해온 셈이다. 천성이 그러니 당대에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고.(웃음) 후회하진 않는다."

 

다시 태어나도 정치를 할 건가?

 

"천만에. 홍신자처럼, 한비야처럼 훨훨 자유롭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하!"

 

/ 입력 : 2012.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