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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 씨알 사상으로 민족정신 깨운 시대의 스승

풍월 사선암 2011. 8. 26. 18:26

한국의 名家 <현대편 

함석헌 / 씨알 사상으로 민족정신 깨운 시대의 스승 

 

일제 때부터 유신체제까지 수차례 옥고 치른 저항지식인

1979,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오산학교서 후학 가르치며 방대한 저서 남겨

월간 씨알의 소리도 창간 유신독재 반대 투쟁 앞장서

 

신천(信天) 함석헌(咸錫憲)은 일제하의 독립 항쟁과 광복 후 자유당·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종교사상가이다. 그는 5·16군사정변 후 가장 먼저 쿠데타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한 민권운동가였다.

 

1970년대 긴급조치 시절에는 직필 정론지 씨알의 소리를 발행, 유신체제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씨알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백성이란 뜻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두 번, 공산 치하에서도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 자유당 정권과 유신체제하에서도 여러 차례 구속당했던 저항지식인이다. 그의 생전에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나 외국인들로부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것도, 그의 행동과 사고가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보편성을 지녔음을 입증한 사례다.

 

함석헌은 1901313일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일명 사점)에서 함형택(咸亨澤)과 김형도(金亨道) 사이의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석헌의 부친은 명망있는 한의사였다. 평안도뿐 아니라 서울, 만주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부친은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장로가 되었다. 함석헌은 예술에 대한 감각과 합리적 사고력은 아버지로부터, 평등 사상과 열린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술회한다.(‘한국민족주의론송건호)

 

어린 시절 함석헌은 부끄러움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여서 또래의 사내 아이들과 싸움이나 다툼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숙부인 함일형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어느새 명심보감까지 달달 외웠다. 사촌형 석규는 목사였다. 틈날 때마다 어린 석헌에게 기독교와 성경, 그리고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함석헌은 1906년 함일형이 세운 사립 기독교계 덕일소학교에 입학한다. 선생님이 처음 부임하는 날, 아이들은 마중을 한다면서 모두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텅 빈 방 안에 혼자 남았다. 선생님 얼굴이야 나중에 본다고 해서 손해 날 것도 없었다. 지저분한 방을 비로 쓸었다. 왠지 자신도 모르게 오히려 마음도 편하고 기분도 좋아졌다. 자신에게 딱 맞는 일처럼 느껴졌다.

 

함석헌은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듬해 부모의 중매로 황득순과 결혼한다. 장밋빛 미래를 떠올리는 중에 함석헌은 3·1운동을 겪으면서 삶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그의 삶을 격동의 삶으로 바꾸는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함일형의 차남이며 사촌형인 함석은이다. 함석은은 숭덕학교 교사이자 열성 개신교인으로, 평양 지역 3·1운동 준비위원회의 총책이었다. 함석은은 3·1운동 후 일경의 수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민족주의적 잡지를 발간한다. 그러다가 19205월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다. 그 후 만주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3년간 수감된다. 그는 사후인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 아래 손수 만든 목판으로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 사본을 만들어 나눠준다. 3·1운동 당일에는 열렬히 만세 대열에 참가한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 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60이 되어 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 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차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함석헌 전집’)

 

3·1운동 후 반일 청년 함석헌은 평양고보 복교를 거부하고 일단 귀향한다. 그는 사촌형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1921년 오산학교로 전학한다.

 

오산은 매우 진취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기풍을 지닌 학교였다. 학생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고 그들의 표정과 발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는 격이 없었고 서로 누구하고나 잘 어울렸다. 함석헌도 곧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당시 교장은 고당 조만식이었다.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 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교육이었습니다.”(‘함석헌 전집 4’)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 지침이 되는 두 스승을 만난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은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깨우쳤고, 다석 유영모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하여 다양한 동양의 고전철학을 가르쳐 주었다.

 

평양고보 시절 의사가 되고자 했던 함석헌은 시골 벽촌 오산학교에서 거듭나 민족애와 기독교 정신을 호흡하며 생각과 지식을 다듬어 나간다.

 

함석헌은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가서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91일 관동대지진 때문에 감옥생활을 처음 경험한다. 일본 경찰이 무고한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비좁은 감옥 안에 집어넣었다.

 

감옥은 마치 지옥 같았고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거의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안에서 공포에 질려 떨던 사람들,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던 그들 대부분은 하나같이 남루하고 가엾은 조선 사람들이었다. 이런 열악한 감옥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인간이 얼마나 노골적, 본능적이고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피부로 실감했다.”(‘함석헌 평전’)

 

함석헌은 1924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이해 봄부터 평생의 친구가 되는 교육자 김교신을 만나, 그의 안내로 이마이칸(今井館)의 성서연구회에 참석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가 되고, 또한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의 영향을 받는다. 대학 4학년 때 그는 이들과 함께 성서 조선을 창간하며, 생애 최초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글을 발표한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오산학교 교원으로 부임한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채 서른이 안된 함석헌이 학생들에게 성경 강의를 하는데, 예순다섯 할아버지가 된 남강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함석헌은 웬일인가 싶어 괜히 머쓱해졌다. 남강은 강의가 끝날 때까지 주의 깊게 듣더니 학생들과 뒤섞여 교실을 나섰다.교장 남강은 그런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배움이란 것은 위 아래가 따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함석헌 평전’)

 

당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던 함석헌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학생들이 잠들기 전 그의 하숙방에서는 등잔불이 꺼지는 일이 없었다. 그는 왜곡된 일제의 조선사 편찬 작업에 맞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집필한다.

 

어느 날 역사 시간에 일본사가 아닌 조선사를 우리말로 가르치는 함석헌에게 시학관은 언성을 높이며 야단쳤다. 함석헌은 이렇게 대답했다. ‘시골 학생들에겐 조선어로 말해야 이해가 더 빠르다. 중요한 것은 교육 내용인데, 그래도 굳이 국어(일본어)로만 써야 한다면, 교육 내용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유유히 답변하자 그들은 이해하겠다면서 돌아갔다.”(‘함석헌 선생 추모문집오산학교동창회 편)

 

그의 별명은 함도깨비였다. 질문하면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는 만능 교사란 뜻이었다. 그러나 남강 선생이 별세한 어느날 좌파 학생들은 민족주의 진영의 교사들을 폭행하기로 모의했다. 당연히 민족주의자로 간주된 함석헌도 폭행 대상자였다. 낌새를 챈 다른 교사들은 모두 도망갔다. 그러나 함석헌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맞으면 안 되겠기에 두 팔로 가슴을 안았고, 두 손으로는 얼굴을 가린 채 몇몇 학생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그저 정신이 몽롱해지도록 때리는 대로 맞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웬일인지 그들은 함석헌을 다시 찾아왔다. 대단히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어느 학생이 질문했다. 자기들이 폭행할 때 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느냐고.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나도 사람인데, 어느 놈이 나를 때렸는지 알면 저 놈이 날 때렸지하는 맘이 아니 생길 수 없어서 나를 때린 학생을 아예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랬지.”(‘씨알 함석헌 평전이치석)

 

함석헌은 1938년 더 이상 우리말 수업이 불가능하여 오산학교를 떠난다. 1940년에 그의 후배 김두혁이 경영하던 평양 근교 송산농사학원의 경영 및 관리를 맡는다. 5000평 정도의 규모였고, 13명의 학생이 교육과 지도를 받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최원삼은 후일 함석헌의 사위가 된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함석헌은 19408공산주의 및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다. 이른바 계림회 사건이었다. 이어 성서조선 사건 1년 등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며 농장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는다.

 

광복 후 조만식은 소련 군정이 만든 임시인민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함석헌은 평북 지역의 문교부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함석헌은 곧 이어 발생한 신의주 학생봉기사건의 책임자로 체포돼 50일간 투옥된다. 그는 1947년에 월남하여 YMCA에서 성경강의를 시작한다.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처음으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하여 윤형중 신부와 논쟁을 벌인다.

 

함석헌의 차남 우용씨, 며느리 양영호씨, 외손자 정현필씨(오른쪽부터)

 

함석헌씨는 그 당시 이화여대 앞에서 조그만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이가 훌륭한 인물이란 걸 알고, 장준하형 보고 함석헌씨를 끌어내자고 했어요. 그럼 안 선생이 책임지라고 해서그분을 찾아가서 사상계에 글 좀 써달라고 청을 드렸더니 나 글 안 써하고 거절하는 거예요.

 

그래 그 뒤로 서너 번 더 찾아갔더니, 그런 삼고초려의 정성에 이분이 오케이를 하고 말았어요. 그때 나온 글이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는데, 이글로 일약 사상계 성가가 높아졌지요.”(‘사상계와 장준하안병욱)

 

함석헌은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전에는 상전이 하나였던 것이 지금은 둘셋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종살이를 해도 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교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니 나라가 아니다.”

 

함석헌이 아니면 못할 소리다. 그는 이 글 때문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20일간 투옥된다. 19604·19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함석헌은 자신의 로맨스때문에 연옥에 빠진 심정으로 약 1년간 일절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 시절 그는 절친한 안병무에게 절박한 어조의 편지를 보낸다.

 

친구들도 나 용서 아니하나 봐요. 그래서 맘을 걷어 잡을 수 없어요. 죽겠어요!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 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 줄, 붙들어 줄 한 사람!”(1960109)

 

이듬해 함석헌은 5·16군사정변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을 사상계 7월호에 발표한다.

 

그는 5·164·19와 비교하면서 그때는 맨주먹으로 일어났으나 이번에는 칼을 들었다고 하면서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에는 밤중에 몰래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낮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고 했다. 이 같이 5·16은 혁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한국언론인물사화송건호)

 

함석헌은 1962년 미 국무성과 영 외무성 초청으로 미국과 영국 여행 중에 철학자 학킹과 역사학자 토인비를 만난다. 역사학자 노명식은 일찍이 함석헌의 역사탐구에 대해 갈파한 바 있다.

 

노명식은 함석헌과 토인비를 비교, ‘두 사람의 역사를 보는 자리와 시각은 놀랄 만큼 거의 일치한다고 했다. 이어 노명식은 그 일치의 가장 깊은 데가 인생과 역사의 본질을 고난으로 파악한 점이라고 밝혔다.”

 

(‘한국을 바꾼 100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부록)

 

함석헌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상임대표로 선출된다. 1967년에는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에 나서,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한 장준하를 선거유세로 당선시킨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서며, 1970년에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다. 유신독재 반대 투쟁에 앞장서며 1976년 군법회의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는다.

 

함석헌은 1963년에 제1회 월남(月南)언론상, 1987년에 제1회 인촌언론상을 받는다. 그는 1988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을 수락하며, 오산학교에 자기 몸을 학생들의 실험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자신의 원효로 자택도 남강문화재단에 기증한다. 198924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해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된다.

 

함석헌은 황득순과 사이에 25녀를 두었다. 장남 국용씨는 북한에서 별세하였으며, 차남 우용(81·경희대 생물과 졸업, 농원 경영)씨는 양영호(74·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정의여고·성동고 교사 역임)씨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다. 딸 정해(46·단국대 박사 수료, 미 린치버그대 졸업, 아동특수교육 전공)씨는 국립정민특수학교 교사로 백낙영(52·서울대 토목공학과 졸업, 현대산업개발 차장 역임)씨와 결혼했다.

 

함석헌의 장녀 은수씨는 최용상씨와 결혼했다. 부부는 모두 북한에서 작고했는데 자매를 두었다. 함석헌의 차녀 은삼(85·호수돈여고 졸업)씨는 보사부 공무원을 역임한 정승림(87·성균관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22녀를 두었다. 장남 광필(61·서울대 화공과 졸업, 대림산업 여천공장장 역임)씨는 임정은(53·서울여상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현필(55·계명대 생물과 졸업)씨는 함석헌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주경희(59·대학 중퇴)씨와 결혼했다. 은삼씨의 장녀 인희(59·연세대 간호학과 졸업)씨는 미국 뉴저지주 간호사이며, 차녀 미희(57·배화여고 졸업)씨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함석헌의 3녀 은자(83)씨는 최진삼(85·평양 송산농산학원 졸업)씨와 결혼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으며 15녀를 두었다. 장남 웅일(57·동국대 농학과 데모 주동으로 중퇴), 장녀 동일씨는 작고하였으며 밑의 영일(59·신광여고 졸업경일(55)·순일(53)·선일(47·추계예술대 졸업, 동양화가)씨 자매는 LA에 살고 있다. 함석헌의 4녀 은화(79)씨는 서완근(82·중앙신학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시드니에 살고 있으며 아들 천희(42·컴퓨터 전공)씨를 두었다. 함석헌의 5녀 은선(74·숭의여고 졸업)씨는 장기홍(78·서울대 지질학과 졸업, 프린스턴대 박사, 경북대 지질학과 교수 역임)씨와 결혼하여 우범(45·서울대 지질학과, 예일대 지질학과 졸업옥경(43·경북대 인류학과 졸업)씨 남매를 두었다.

 

내가 본 신천 함석헌  

김경재 한신대학교 교수

 

나는 1970년대 초 함석헌 선생이 한국신학대에서 고전 특강을 맡으시면서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그분과 절친했던 안병무 교수가 교무과장을, 내가 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분은 지난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종교사상가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민족교육의 성지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고민하면서 집필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인이 쓴 최고의 역사서요, 한국인이 총체적으로 자기 민족사를 해석한 역사서인 것이다. 그분의 사상세계 안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역사와 자연이 노동과 예배가, 민초와 하늘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통해 있는 것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씨알 사상이라는 독특한 생명의 세계가 한국의 정신계 속에 열리게 된 것이다.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종교적으로 직관하고, 시적으로 표현한 그분의 방대한 저작들은 그분이 곧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임을 입증하는 단서인 셈이다.

   

사람이 되어 제일먼저 배워야하는 것이 "인사하기와 청소하는 일"이라고 기억이 난다.

글 배우기전에 먼저 배우는 것이 윗사람을 존경하는 일과 주변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