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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4] 새마을운동에서 녹색성장까지

풍월 사선암 2011. 5. 12. 17:40

[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4] 새마을운동에서 녹색성장까지

 

◀1960년대 중반 당대의 명사로 미국 언론에 한 묶음으로 자주 등장하던 연사 3명을 뽑은 사진. 맨 위가 허먼 칸 박사. 그는 3일간 아무런 자료도 보지 않고 수많은 수치나 통계를 넣은 강연을 지속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중간이 토마스 오닐 미 의회 전 의장(1912~94). 별명은 팁 오닐, 모든 분야에 팁 즉 코멘트를 다는 당대 최대 특강 강사 겸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맨 아래가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그는 케인스주의 적인 20세기 미국의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주도한 인물로, 그가 쓴 경제학 관련서는 50~60년대에 널리 읽혔다.

 

"한국은 녹색성장을 주도할 기득권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새마을운동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조차 잘 모르겠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이 한국의 녹색성장, 친환경 경제발전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7월말 제주 해비치 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2010 하계 포럼'은 그 어느 때보다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바로 이 포럼의 주제 강연을 맡은 허먼 칸의 수제자인 제롬 글렌 유엔미래 포럼 회장의 '새마을 운동' 재조명 때문이었다.

 

그는 "새마을 운동으로 주거환경이 개선됐고 수로시스템이 정비됐다""여기에 그린벨트 정책으로 녹색지대를 많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녹색성장 개념과는 다르지만 한국의 녹색성장은 새마을운동과 연결된다. 환경 개선이 바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녹색성장의 이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글렌 회장은 "경북 김천에 세계기후변화종합상황실이 설치됐는데, 이곳이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새마을 운동이 발생한 구미와 지리적으로도 가깝다"면서 "새마을 운동의 녹색성장 개념이 이 상황실 설치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는 유엔미래포럼이 지난해 기후변화와 재생에너지 정보를 총괄 관리하기 위한 종합상황실을 김천시에 설치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핀란드, 말레이시아 등의 요구를 물리치고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암시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번 글에서 이미 언급한 허먼 칸의 저서 '세계경제발전, 1979년 이후'(World Economic Development 1979 and Beyond)'200년후의 미래(The Next 200 Years)' 등에서 그가 주장한 환경운동 '그린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다. 허먼 칸의 환경운동은 '로마클럽' 회원들의 비관적인 시각을 반박하는, 지구촌에 대한 희망적인 주장이었다.

 

'로마클럽'684월 이탈리아의 실업가 페체이의 제창으로 지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유럽의 경영자·과학자·교육자 등 지도급 인사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결성한 국제적인 미래 연구기관을 말한다. 이 클럽의 활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돼 천연자원의 고갈, 공해에 의한 환경오염, 개발도상국의 인구 증가 등 인류의 위기에 대해 이를 타개할 길을 모색, 경고·조언하고 있다. 특히 출범 직후부터 연구를 시작해 5년 뒤 72년에 내놓은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인구폭발과 자원고갈에 따른 지구멸망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주목받았다.

 

허먼 칸은 바로 이 보고서가 지구멸망을 우려하며 내놓은 대안인'제로 성장의 실현' 주장에 반대, 아시아권의 지속적인 성장을 독려하면서 대안으로 그린프로젝트를 주장한 것이다.

 

미래연구를 지향하는 보수적 성향의 허드슨 연구소 초대소장으로서 그는 "공장이 늘고 제조업이 크게 늘어나면 환경운동도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면서 "성장에 따른 지구멸망의 가능성은 환경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선천적으로 낙천적이던 그는 "결코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면서 "지구촌이 그린 프로젝트를 펼쳐야 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당시 아시아 각국을 돌면서 강의하는 가운데 비료로 질산염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한편, 그린벨트나 녹색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제롬 글렌 회장은 들려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그린 프로젝트''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70년대 초에 불붙기 시작한 박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치적인 새마을운동은 짚으로 덮던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흙집을 개량 집으로 바꾸면서 에너지절약, 환경운동을 실현했다. 그리고 가정에서 군불 때고 가사일 하던 여성인력을 농촌 공장으로 끌고 나와 생산노동력으로 바꿨다.

 

새마을운동은 다시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국정 아젠다인 '녹색성장'으로 이어진다. 유럽의 전문가들은 한국이 녹색성장을 확고하게 주도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녹색성장의 오랜 역사'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통치기간 중 추수현장을 찾은 박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은 쌀 증산을 위한 품종개량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기후변화 녹색운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한국도 녹색성장 환경운동을 60년대에 이미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로고나 유니폼 등이 모두 녹색으로 되어있고, 또 초가지붕을 헐고 에너지절약 소재인 슬래브를 갖다 얹는 등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큰 틀에서 보면 새마을운동이 녹색성장운동이라는 말이다. 지속가능한 성장과 환경보전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과 관련, 국제정세 분석가인 윌리엄 H. 오버폴트가 쓴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Norton·1993)'이라는 책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책에서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박정희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반한적(反韓的)이던 자신이 왜 박정희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나를 밝히고 있다.

 

이 저서에 따르면 예일대학원을 졸업한 오버폴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 소장이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허먼 칸은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함에 따라 젊은 오버폴트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폴트는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박정희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됐고, '박정희의 한국'을 재평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버홀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 즉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었다는 게 오버홀트의 지적이다.

 

#환경개선·협동작업으로 시작마을단위서 직장·학교로 확산78년엔 3대 질서운동까지 전개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과 협동작업의 기반조성에 역점을 뒀다.

 

당시에 전인구의 80%가 농촌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개선시키려면 지역공동체의 특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71년과 72년은 위에서 제시된 사업을 시행함으로써 새마을 정신을 점화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73년에는 전국 단위의 모든 마을이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세분화하여 지원하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

 

사업내용은 이전의 공동사업 위주에서 기본사업, 지원사업, 소득사업으로 나누어 소득에 직결시켜 새마을운동의 기반구축을 시도했다. 또한 시·, ··구에 새마을지도과를 신설하여 행정체계도 갖추게 된다.

 

74년은 새마을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시기로, 마을 단위에서 직장, 학교, 단체 등으로 참여의 폭을 넓히고 도시새마을운동을 시작하는 등 새마을운동의 저변을 확대했다.

 

75년에는 경제난국의 극복에 중점을 두고 소득사업, 노임사업, 국민교육, 도시새마을운동에 중점을 둔다. 특히 민간단체인 새마을운동협의회를 조직, 민간주도로 도시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76년에는 도시새마을운동을 직장단체중심으로 본격화시키고 낙후마을 발전에 중점을 두면서 소득증대, 국토가꾸기, 환경보전, 도시새마을, 국민고용의 지속적 확대를 추진했다.

 

77년은 자립기반의 확대에 중점을 두고 문화복지 농촌건설, 지속적인 소득증대, 도시새마을운동의 본격화, 공장새마을운동의 강화, 새마을운동 생활화의 중점 시책을 설정했다.

 

78년은 지금까지의 물량적 근대화에 3대 질서운동의 전개, 새마을 정신의 생활화 등 정신적 근대화를 추구했다.

 

[영남일보]이영란기자 / 2010,10,18

 


 

朴正熙를 미워하다가 존경으로 바뀐 카터 참모의 고백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윌리엄 H. 오버폴트가 1990년대 중반에 쓴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著者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터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戰略의 정당성에 설득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文化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文化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 신봉자들이 講壇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터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圖式的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人權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人權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으로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人權문제와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先行)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後進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西歐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正門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有化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넷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통령은 敵對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外資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同時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國家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美軍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高位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가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오버홀터씨의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주요 저서로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朴正熙를 보는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맑아져간 그의 과정은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