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조지 워싱턴 일화]조금 더 위였습니다.

풍월 사선암 2011. 5. 5. 10:22

 

'조지 워싱턴(1732-1789)'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있던 어느 여름날,홍수가 범람하자 물 구경을 하러 나갔더랍니다. 물이 넘친 정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육군중령의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초로(初老)의 워싱턴에게 다가왔습니다.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제가 이 냇물을 건널 수

   있도록 를 업어 건네주실 수 있을까요?

, 그렇게 하시구려!

 

이리하여 중령은 워싱턴의 등에 업혀 그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노인께서도 군대에 다녀오셨나요?

, 다녀왔지요.

사병이셨습니까?

장교였습니다.

혹시 위관급(尉官級)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나 보네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중령이셨군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대령이셨단 말씀이십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그럼 장군이셨네요.[중령이 당황해서] 노인어른, 저를 여기서 내려 주세요.

냇물을 건너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소. 내가 업어 건네 드리리다.

노인께서는 그럼 준장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혹시 중장이셨나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최고의 계급인 대장이셨단 말씀이세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이때 막 냇가를 다 건너게 되자 워싱턴이 중령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을 업어 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군 중령은 그 텁수룩한 노인이 당시 미합중국의 유일한 오성장군(五星將軍)이던 '조지 워싱턴'임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우리는 흔히 막노동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혹은 차림새가 조금 초라하다거나 몸에 걸친 의복이 다소 남루하다고 해서 사람을 낮춰보는 ()를 범하기 쉽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말해 주는 일화(逸話)입니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222~ 17991214)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1797)으로,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미국인들은 그가 미국의 건국과 혁명의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1775년 대륙 회의에서 워싱턴은 미국 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영국 세력을 보스턴에서 축출하였고, 뉴욕을 잃는 대신 델라웨어 강을 건너 뉴저지를 재탈환하기도 하였다. 그의 전략으로 독립군은 사라토가와 요크타운에서 영국의 주요 부대 둘을 잡을 수 있었다. 대륙 회의와 식민주들, 그리고 동맹국인 프랑스와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그는 사실상 와해와 실패의 위협 속에서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같은 국가와 결속력 없는 군대를 같이 통솔하고 있었다. 1783년에 전쟁이 종결된 이후,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루머를 듣고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이에 왕은 "만약 워싱턴이 그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실제로 그러하였으며, 버논 산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당시에 연합 규약에 대한 대체적인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1787년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가 열렸었는데 워싱턴은 이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연방정부 수립 이후엔 새 정부의 각 부서들의 관례와 목적 등의 기초를 다잡았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진 현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1793년의 일방적인 중립 선언으로 그는 해외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겠다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전쟁으로의 유혹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이에 따라 영국과의 약 십 년 간의 평화가 1795년에 체결된 제이 조약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제퍼슨을 위시하는 민주 공화당의 집중적인 반대로부터 이 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연방당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계획을 지지하는 등 사실상 정신적인 지주였다. 워싱턴의 퇴임 연설은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주제로 하는 기본 입문서와 같은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워싱턴은 1799년에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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