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남을 배려하는 사회

풍월 사선암 2011. 4. 9. 23:49

 

남을 배려하는 사회

염 재 호(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지하철을 타면 세상이 많이 보인다. 요즘 복잡한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다른 사람을 밀치고 지날 때에도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기 어렵다. 대부분 잠깐만요!” 라거나 잠시만요!”라고 하면서 내린다. 식당에서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나를 때에도 대부분 잠깐만요!”라는 말을 많이 쓴다. 여러 해 전에 이런 표현에 대해 논술 모의고사를 내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잠깐만요!”가 미안한 마음을 나타내는 공손하고 예의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방보다 자기가 중심인 언어와 생활

 

왜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라는 표현을 듣기 어렵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쓰는 잠깐만요!”라는 표현은 매우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나의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니 당신이 잠시만 당신의 권리를 유보해 달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깊으면 내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때에는 당연히 내가 미안하고 내가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잠깐만요!”라고 하면서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또 다른 현상으로 요즘 지하철에서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열심히 화장하는 젊은 여성들을 많이 보게 된다. 심지어 기초화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눈썹 그리는 것까지 이삼십 분을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에 몰입하는 여성들도 있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전화통화하거나, 자기 집 거실에서 이야기하듯 떠들어 대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교육시킨다고 오히려 시끄럽게 아이들과 다투는 경우도 많다. 애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남의 집 일인 양 못본 체 하는 경우도 흔하다. 심지어 괜히 앞에 서있는 사람한테 아저씨! 얘 좀 혼내 주세요.”라고 애교 섞인 주문까지 하는 젊은 엄마도 있다.

 

지하철에서 진한 애정표현이나 화장을 하는 것에 대해 젊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의외로 그런 행동이 보기는 좋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심하게 침해하는 것이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대답이 많았다. 몇 년 전에는 대형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피곤해서 조는 것과는 달리 엎드려서 자는 것은 강의하는 교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지적을 했더니, 자신은 다른 사람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자는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아마 고등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나 보다.

 

자신의 권리 찾기에서 나아가 남에 대한 배려를

 

과연 공동체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어떻게 조화해야 할까? 군사독재체제를 벗어나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집단적 가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했다. 경쟁사회가 심화되면서 남에 대한 배려보다 내가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시장주의의 강박관념도 우리 속에 깊게 뿌리내렸다. 청문회가 되었건 국정감사가 되었건 정치인들도 자신이 마이크 잡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무조건 공격하고 본다.

 

지진과 해일, 그리고 방사능의 공포에서도 질서를 지키는 일본 국민을 보고 파이낸셜 타임즈는 일본의 시민의식이 인류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까지 평가했다. 다른 사람에게 고마운 경우에도 고맙다는 말보다 자신을 위해 수고해서 미안하다고 수미마센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는 일본인들이다. 일본도 전후 국가(國歌)와 국기(國旗)까지 포기할 정도로 군사전체주의 문화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남에 대한 배려는 아직도 살아 있어서 위기에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 우리도 한때는 동방예의지국이었다는 말이 아련한 추억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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