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추천 이야기 한마당] 3등칸에 탄 슈바이쳐

풍월 사선암 2010. 11. 21. 09:07

 

[추천 이야기 한마당] 3등칸에 탄 슈바이쳐

 

 

슈바이처 박사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를 떠나 파리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덴마크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문기자들이 취재를 하려고 그가 탄 기차로 몰려들었다.

 

슈바이처는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은 귀족이다. 그래서 취재경쟁에 열중한 기자들이 한꺼번에 특등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보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 일등칸으로 몰려가서 찾아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또 다시 이등칸으로 가 봤으나, 거기서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모두들 허탈한 나머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영국 기자 한 사람만이 혹시나 하고 3등칸을 기웃거리다가 의외로 거기서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꽉 끼어 앉아 있는 퀴퀴한 악취로 가득한 3등 칸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슈바이처 박사는 그들을 진찰하고 있었다.

 

놀란 기자가 그에게 특등실로 자리를 옮기기를 권했으나 슈바이처 박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어쩌자고 이렇게 냄새나고 불편한 곳에서 고생하며 가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잠시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특실의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정말 존경스럽지 아니한가? 그가 살아 있을 때, 저 아프리카 오지 그의 집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즐겨 읽던 그의 친필 명구는 이렇다.

 

‘인내가 필요할때는, 조용히 야곱의 인내를 상고하라. 기도가 부족하다고 여겨질때면, 엘리야를 보라. 마음에 찬양이 없으면, 다윗에 귀를 기울이라. 믿음이 적다고 생각되면, 바울의 서신을 읽어라. 자신이 나태해진다고 여겨지면, 야고보서를 묵상하라.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소망은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고,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니라.’  - 이보용 -

 

 

슈바이처(Schweitzer, Albert) 1875∼1965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사상가·신학자·음악가.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출생했다. 적도 아프리카에 파견된 선교 의사였던 그는 인류의 형제애 를 위한 노력으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 강사로, 그리고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그 사이에 <음악가·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en Bach>(1905) <예수전(傳) 연구사> 등을 발표하였다. 1905년 박애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선교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발표했고, 1913년 의학 박사가 되었다. 그를 돕기 위해 간호사 훈련을 받은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가봉에 있는 랑바레네로 출발했다. 그 곳에서 오고우에 강둑 위에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병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자신의 수입으로 기구를 갖추고 병원을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여러 나라의 독지가 또는 재단의 기부금으로 보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 곳에서 적국 외국인(독일인)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그 뒤에는 전쟁 포로로 프랑스에 억류되기도 했다. 그는 점차 전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돌렸으며 <문화철학>(1923)을 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자신의 철학을 발표했다. 생명을 존중하는 이러한 그의 철학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윤리 원칙으로, 그는 이 원칙이 문명의 존속에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방치되었던 병원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려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1928년에는 괴테상(賞)을 수상하고, 1951년에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19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웠다.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가 독립하여 가봉 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경외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새로 창설된 적도성십자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90세 생일이 지나고부터 건강이 나빠져서 1965년 9월 4일 전세계인의 애도 속에 죽었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사도 바울의 신비>를 출판했으며, <바흐의 오르간 작품>을 펴낼 정도로 바흐 연구가로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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