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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

풍월 사선암 2010. 10. 20. 18:49

 

1640년부터 1660년까지, 찰스 1세가 ‘장기 의회’를 소집할 때부터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까지, 20년 동안 영국에서 벌어진 ‘청교도 혁명’은 역사가들의 고민거리다. 한편으로 보면 이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이루어진 시민혁명이며, 근대 민주주의와 국민국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나라들이 이미 치르고 넘어갔던 종교전쟁의 늦깎이였다. 그리고 찰스 1세와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그는 경건하고 사심 없는 혁명가였는가, 잔혹하고 광신적인 독재자였는가?

 

 

왕과 의회, 정면 충돌하다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 그녀의 치세 기간에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의 강국들보다 한발 뒤처져 있던 처지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으며, 따라서 차기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스튜어트(제임스 6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어머니 메리 1세(메리 스튜어트)는 외가 쪽으로 헨리 7세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서자 출신 논란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 1세보다 잉글랜드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 그녀의 자식 대에 튜더 가로부터 잉글랜드 왕위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부왕 헨리 8세와 플랜태저넷 가의 에드워드 1세가 그토록 염원했던 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지배권이 한 사람의 왕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서 즉위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젊어서부터 열렬한 왕권신수설 지지자였다.

 

[자유로운 군주국의 참된 법]이라는 책까지 썼던 그는 왕이란 신에게서 지배권을 받은 존재이므로 인간이 만든 어떤 법률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그런 식으로 통치해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의회의 권한이 강력했던 잉글랜드의 왕이 되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시절에는 왕권옹호파로 유명했던 에드워드 코크가 “새로운 왕은 잉글랜드의 사정에 어두우니 잉글랜드의 법과 관습, 의회의 의사를 존중하며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제임스 1세는 “어떻게 왕이 법률 아래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코크는 “왕이란 모든 인간의 위에 있지만, 신과 법률의 아래에 있습니다”고 대꾸했고,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지만 왕권과 의회권의 대립은 이로써 시작된 셈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진행된 많은 사업으로 잉글랜드의 재정은 방만해져 있었는데, 따라서 왕이 새로운 징세를 자주 추진하자 대헌장에 따라 징세 동의권을 갖고 있었던 의회와는 충돌이 잦아졌다. 게다가 종교 문제까지 겹쳤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를 강력히 옹호하며 가톨릭과 기타 개신교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따라서 국교회 이외의 교파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를 비롯한 가톨릭교도들이 왕을 암살하려고 국회에 폭약을 설치했다가 발각된 ‘화약음모사건(가이 포크스 사건)’이 일어났고, 1620년에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집단 망명했다. 그리고 장로교회가 지배적이던 스코틀랜드에서도 불만이 누적되다가 다음 왕인 찰스 1세 때 반란으로 불거져 나온다.

 

 

제임스 1세는 1625년에 병사했다.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불확실하다. 왕위는 그의 아들 찰스 1세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아버지를 본받아 전제왕권을 추구했으며 당연히 의회와 대립했다. 1628년에 에드워드 코크가 기초한 ‘권리 청원’이 제출되자, 찰스 1세는 이를 일단 받아들였지만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하고는 이후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열지 않으며 자신의 뜻대로 만든 특별법에 따라 통치하는 독재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찰스 1세는 프랑스 출신의 왕비(헨리에타 마리아, 그녀는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4세의 숙모였다)를 얻고, 국교회에 속했으나 가톨릭과 친밀한 고교회파인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잉글랜드를 가톨릭교회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만이 쌓이고 겹치는 가운데 1639년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쟁 비용을 댈 도리가 없던 찰스 1세는 마지못해 11년 만에 의회의 문을 연다. 그리고 3주 만에 다시 해산시켜 버렸지만 그 해 가을에 다시 열었고, 이 의회는 1653년에야 폐회되는 ‘장기 의회’로 역사에 남게 된다(그 직전의 3개월짜리 의회는 ‘단기 의회’로 불렸다).

 

장기 의회는 개원하자마자 찰스 1세의 측근인 윌리엄 로드와 스트래퍼드 백작을 체포하고 “의회의 개폐를 국왕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법률을 제정하는 등 그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풀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 인기가 있던 스트래퍼드가 의회에 의해 체포되고 일방적으로 처형되자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이것이 찰스 1세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 의회는 왕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마침내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는 제각기 병력을 소집하고 상대방에게 무기를 겨눈다.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며 165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게 될 영국 내전의 시작이었다.

   

 

크롬웰, 의회파의 구세주가 되다

 

내전은 처음에 왕당파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의 다수가 국왕 편에 섰고, 그들의 기동력을 의회군이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회군은 향토 민병대가 대부분이다 보니 자기 사는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애써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대안을 제시하여 전세를 역전시킨 사람이 바로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에 잉글랜드 동부의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젠트리(영국의 토착 유력자층으로, 귀족과 평민의 중간적 존재)였으며 독실한 청교도이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법률 공부를 했으나 한동안은 고향에서 지주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듯, 40세 이전의 삶은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40대에 들어선 다음에야 역사에 이름을 새기기 시작하는데, 1640년에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내전이 시작되자 그는 고향으로 달려가 60명의 기병대를 조직해서 의회군에 가담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패배 직전의 의회군을 구원하는 수훈을 세운 그는 의회군이 내전에서 이기려면 기병대의 확충, 각개 방위 수준을 넘어서는 연합군의 조직, 그리고 병사들의 규율과 사기의 진작이 필요함을 지적했으며, 이를 실현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특별히 선발하고 조련했는데, 기병 위주의 편성과 무서운 공격력 때문에 ‘철기대(鐵騎隊)’라는 별명을 얻었다. 철기대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이자 크롬웰은 1645년부터는 의회군의 전체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철기대를 육성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병력을 재편성, ‘신 모범군(New Model Army)’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게 했다. 신 모범군이 강력했던 비결은 전문성 강화와 철저한 기율, 그리고 종교적 열정을 이용한 높은 사기 유지였다. 크롬웰은 전문직업군인이 없었던 당시 영국에서 귀족이거나 연장자라는 이유로 장교가 된 사람들을 전쟁 경험이 많고 지휘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교체했고, 사병들에게도 별도의 군복을 입고 군기와 군가를 갖추게 했다. 그리고 최고의 장비와 최고의 봉급을 어김없이 지급해 주었다. 한편 당시만 해도 반쯤은 폭도와 다름없었던 병사들에게 절대로 양민을 약탈하거나 음주, 도박 등을 하지 않도록 강조하며 어기는 사람은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병사들마다 기도서와 찬송가를 늘 들고 다니면서 전투 중에도 틈만 나면 기도회를 갖도록 했다. 크롬웰의 병사들 대부분은 “찰스 왕은 사탄의 부하이며 왕당파를 타도하는 것은 신이 내린 명령이다”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 곧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등의 광신적 믿음을 주입 받고 있었다.

 

이처럼 물적으로 우수하고 정신적으로 물불을 안 가리는 군대는 당연히 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크롬웰의 탁월한 지휘가 무적의 신화를 쌓는 마지막 벽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게 만들었지만, 전장에서는 유연성 또한 필요함도 알았다. 그래서 돌격 도중에라도 언제든 방향을 바꾸고, 진형을 다시 짤 수 있도록 했으며, 기병들에게 권총을 채워 주어 적이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덤벼도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실로 불세출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크롬웰, 이런 사람이 청교도 혁명을 만나지 않았으면 평범한 시골 지주로 늙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이런 사람이 없었다면 청교도 혁명은 의회파의 철저한 패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신의 뜻일까? 역사의 묘미일까?

 

 

“왕을 처형하라!”

 

그러나 군인과 종교인의 공통점은 타협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신 모범군의 활약에 힘입어 의회파는 내전 중기부터 승세를 확실히 잡았지만, 자신들이 시작한 이 내전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의견이 엇갈렸다. 이대로 내전을 계속 하다가는 외국의 침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 찰스 1세를 타도하고 나면 대안이 무엇이냐는 주장 등이 적당한 선에서 국왕과 타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이루어 강경파와 대립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크롬웰은 마침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1648년 12월, 그의 병사들은 의회를 기습하여 온건파 의원 약 2백 명을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크롬웰을 지지하는 삼분의 일 정도의 의원만이 남아서 의회를 운영했는데, 이를 ‘잔부(殘部) 의회’라고 부른다. 잔부 의회는 크롬웰의 꼭두각시로서 포로로 잡아놓고 있던 찰스 1세의 재판을 추진했다. 말이 재판이지 왕을 처형하기 위한 요식행위였던 재판에서 찰스 1세는 “짐은 적법한 국왕이며 의회에는 짐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률 이론상 찰스 1세의 그런 주장은 일리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의 머리를 왕관을 씌운 채로 베어버려야 한다!”는 크롬웰의 말이 바로 판결문이나 마찬가지였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의 목에 도끼가 내리쳐졌다. 그의 할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를 비롯해서 처형당한 군주는 전에도 있었으나, 자국민의 손으로 적법하게 즉위한 국왕을 처형하는 일은 사상 최초였다. 전 유럽의 왕실이 이 엄청난 사건에 전율했다.

 

어느 전설에 따르면 처형이 끝나고 군중들이 흩어졌을 때, 얼굴을 숨긴 크롬웰이 몰래 찰스 1세의 시체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크롬웰로서도 찰스 1세가 처형을 면치 못할 만큼 사악하지는 않으며, 법적인 문제도 있음을 알았으나 수백년 동안 내려온 왕정의 전통을 쳐부수고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왕의 처형이라는 극약처방이 필요하다고 믿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전설은 전설일 뿐이며, 실제의 크롬웰은 자기 병사들에게 주입시킨 그대로의 광신적 믿음에 사로잡혀 찰스 1세를 죽이는 일을 악마의 끄나풀을 없애는 일로 당연시했다는 해석도 있다.

 

 

영웅인가, 악당인가?

 

이 전설을 둘러싼 이견처럼, 그 이후의 크롬웰의 행동을 놓고 역사가들은 영웅과 악당의 두 가지 해석을 내세우며 격론을 벌인다. 찰스 1세의 목을 벤 뒤 측근들이 대신 왕위에 앉으라고 부추겼으나 단호히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크롬웰은 사실 왕이 되고 싶었지만 주변 여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크롬웰은 내란 종식과 왕의 처형 후에도 반란을 멈추지 않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누비며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오랜만에 브리튼 전역에 평화를 가져왔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인무도한 짓을 했다고 한다. 가령 1649년 8월에는 아일랜드의 드로이다를 점령하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천 명을 학살해 버렸다. 갓난아이도 살려 두지 않았으며, 당시 주민들이 교회로 대피하자 크롬웰은 교회의 문을 잠그고 불태워 버리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피에 굶주린 광신적인 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미 무장봉기가 장기화된 상태에서 무기를 내려놓게 하려면 그러한 충격과 공포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평화가 회복되자, 크롬웰은 공화국을 선포한 다음 ‘호국경’에 취임하여 사실상 독재적으로 브리튼을 통치했다. 고대 로마의 호민관에서 따온 호국경은 오늘날의 대통령과 비슷한 지위였으며, 따라서 그를 “영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호국경으로서의 그의 통치 역시 평가가 엇갈린다. 그는 1653년 4월에 1648년에 했던 것처럼 의회에 군대를 투입했다. 그리고 찰스 1세가 그랬듯 의회를 폐쇄해 버렸다. 찰스 1세가 의회를 무시하고 독재를 한다고 내전까지 일으켜서 그를 없애고 왕정을 폐지했는데, 크롬웰이 똑같은 짓을 한다면 왕정과 공화정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회의와 비판에 대해 크롬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의회는 이미 귀족과 젠트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여 앉은 클럽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가령 크롬웰이 스코틀랜드로 원정 가 있는 사이에 자신들의 이익만 고려한 ‘항해조례’를 만들어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초래하는 등 국익에 해를 끼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폐쇄는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의 강력한 권력으로 ‘기득권’ 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잉글랜드의 사회체제는 청교도 혁명 전이나 후나 그대로였다. 크롬웰은 “귀족, 젠트리, 자유농민이라는 계급 구성은 공화국의 주춧돌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소시민의 권리 신장과 계급 평등을 주장했던 수평파는 철저히 탄압되었다. 따라서 봉건 귀족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던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청교도 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혁명이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결을 부추긴 것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이념보다는 종교 문제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수십 년 전 유럽 대륙에서 벌어졌던 종교 전쟁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크롬웰은 공화국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3백 년 전 추방되었던 유대인들도 귀국할 수 있게 허가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크롬웰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었으며, 유대인들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하루바삐 그들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는 반박을 받는다.

 

아무튼 5년 동안 철권통치를 하며, 한때 하늘을 찔렀던 크롬웰의 인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독재자” “반역자” “악마” 등의 욕지거리가 런던의 뒷골목마다 넘쳐흘렀다. 아일랜드에서는 그를 자기 민족을 무참히 학살한 원수로 여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신들의 왕(찰스 1세)을 죄 없이 죽인 악당으로 취급했다. 자신이 정성 들여 키운 군대 말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크롬웰은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59세로 숨을 거둔다. 1658년 9월 3일이었다. 그가 죽은 후 호국경의 지위는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이어졌으나 그에게는 이미 민심의 이반을 막을 힘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기댔던 군부조차도 파벌로 갈라져서 서로 다투었다. 결국 1660년 5월,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왕위에 앉았다. 크롬웰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헤쳐져 토막났다.

 

적어도 내전에 있어서, 크롬웰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의회파는 왕당파에게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떨까? 크롬웰이 없었다면, 왕과 의회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 민주주의가 원만하게 발전했을까? 아니면 “왕은 아흔아홉 번 패배해도 여전히 왕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반역자일 뿐이다. 왕에게 이기려면 왕을 없애야만 한다”라고 한 크롬웰의 말대로, 더 엄격하고 잔혹한 절대군주체제가 들어섰을까? 크롬웰이 없었다면 수평파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었을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평화롭게 브리튼의 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끝없는 갈등과 살육만이 이어졌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올리버 크롬웰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한 사람의 몸은 영국의, 또는 유럽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밟고 건너야 할 외나무다리였다.

 

 

王의 목을 친 사나이 크롬웰의 剖棺斬屍(부관참시)

찰스 2세는 아버지를 죽인 크롬웰의 屍身을 꺼내 부관참시한 후 잘라낸 머리를 웨스트민스터 寺院 앞에 24년간 걸어놓았다.

 

'왕권신수설'이라고, 漢字語를 한글로 표기하면 뜻이 모호해진다. 漢字를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나, 漢字를 모르는 사람에겐 암호이다.

 

王權神授說이라고 쓰면 의미가 명료해진다. 王의 權力은 神이 준 것이란 뜻이다. 유럽에서 16~18세기에 유행하였던 思潮이다. 王權은 神聖한 것이므로 貴族이 제한할 수 없다는 사상에서 절대王朝가 탄생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유럽의 절대왕조를 대표한다. 그가 만든 베르사이유 궁전은 유럽 절대 왕조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유럽의 다른 王家도 베르사이유 궁전을 의식하여 거대한 궁전을 경쟁적으로 짓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유럽의 국가는 王의 私有物처럼 취급되었다. 政略결혼에 의하여 국가의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유럽 대륙에서 절대왕조가 강화되던 17세기, 영국에선 절대왕조를 깨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영국의 황금시대를 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603년에 죽자 영국인들은 스콧랜드왕을 초빙,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세웠다. 그는 스콧랜드왕으로 있을 때 王權神授說에 관한 책을 쓴 이였다. "참다운 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므로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신념을 가진 이였다. 자연히 그는 귀족(주로 地主)으로 구성된 議會와 자주 충돌하였다. 제임세 2세가 죽은 뒤 즉위한 아들 찰스 1세도 의회를 무시하려 하였다. 1628년 의회는 '권리 請願'을 채택, 王의 독재에 항의하였다.

 

이때 중요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한다. 올리버 크롬웰은 鄕紳, 즉 지방有志 출신이었다. 농사를 짓던 그는 캠브리지 대학을 중퇴한 뒤 런던에서 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628년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다음 해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 독재를 시작하였다. 크롬웰은 청교도였고, 키가 컸으며, 날카로운 눈매에, 목소리가 우렁찼다. 말은 논리정연하여 의회 지도자로 주목을 받았다.

 

1642년 議會와 王은 드디어 內戰을 시작한다. 양쪽이 군대를 가졌다. 의회군에 가담한 크롬웰은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가 조직한 기병대는 鐵騎兵(Ironsides)으로 불렸다. 이 부대는 軍律이 엄하였다. 보초를 서던 중 잠을 자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무기를 버려도 죽음이었다. 비무장 시민을 약탈하면 엄벌에 처했다. 그 대신 부대원들끼리는 민주적 토론이 이뤄졌다. 모두가 청교도였으므로 왜 싸우느냐에 대한 自覺이 확고하였다. 말하자면 이념형 군대였다. 찬송가를 軍歌처럼 부르면서 敵陣에 돌입하였다.

 

크롬웰은 王軍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두 번 거뒀다. 1645년 6월14일 네즈비 전투에서 크롬웰 군대는 王軍을 무찌르고 포로를 5000명이나 잡았다. 찰스 1세는 고향인 스콧랜드로 도망갔다. 스콧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그의 신병을 잉글랜드 의회에 넘겼다. 1647년 찰스 1세는 다시 도망을 가서 군대를 조직, 內戰이 再演되었다. 의회군은 또 다시 승리, 찰스 1세를 붙들었다.

 

의회의 지도자 크롬웰은 왕을 135명으로 구성된 재판부에 넘겼다. 재판부는 의원, 군인, 법률가들이었다. 사형이 선고된 찰스 왕은 1649년 1월30일 화이트홀 궁전 앞에 만들어진 처형대에서 집행인이 휘두른 도끼로 목이 날아갔다.

 

의회는 그해 5월 王政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크롬웰은 王이 되라는 간청을 거부하였다. 王이 암살되거나 廢位되는 경우는 있어도 정식 재판을 거쳐 死刑이 집행된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절대왕조가 전성기를 맞고 있을 때였으므로 찰스 1세의 처형은 큰 충격을 주었다. 150년 뒤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 때 루이 16세 부부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데, 영국 청교도 혁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크롬웰은 護民官으로서 10년간 독재를 하였다. 議會는 분열되었으나 군대가 그를 지지하였다. 이 기간 크롬웰은 舊敎세력인 아일란드를 점령하고, 해양강국으로 떠오르던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여 이겼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을 민중혁명이 아닌 부르조아지 혁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농민보다는 地主를 중시하였다. 그는 "나라가 병이 들었을 때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富者 손에 고생하는 편이 낫다"는 말도 했다. 보통선거권과 자유 평등을 주장하는, 몰락농민과 수공업자들의 水平派 조직을 武力으로 억눌렀다.

 

1658년 크롬웰은 말라리아에 걸려 急死하였다. 아들이 護民官의 권력을 승계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議會의 결정으로 王朝 회복이 이뤄졌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다시 영국의 王으로 추대되었다.

 

찰스 2세가 맨첨 한 일은 크롬웰에 대한 복수였다. 일종의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던 크롬웰의 屍身을 꺼내 剖棺斬屍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된 날인 1월30일에 크롬웰의 머리를 잘라내 창에 꽂아 웨스트민스터 홀의 바깥에 세워 두게 하였다. 크롬웰의 머리는 그 뒤 24년간 걸려 있었다. 1685년 이후 크롬웰 머리는 여러 사람 손을 거치고 경매에 붙여지기도 하였다. 머리가 캠브리지에 있는 시드니 서섹스 대학(캠브리지 대학의 일원. 청교도가 세운 학교. 크롬웰이 다닌 적이 있다) 교회에 묻힌 것은 剖棺斬屍 400년 뒤인 1960년이었다.

 

찰스 2세가 크롬웰의 屍身을 훼손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王權 약화의 大勢는 막을 수 없었다.

 

찰스 2세가 죽은 뒤 王位를 계승한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교도였다. 그는 성공회를 탄압하고 가톨릭 세력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新敎 세력과 議會는 쿠데타를 꾸민다. 네덜란드 지도자이던 오렌지 家門의 윌리엄公은 제임스 2세의 딸인 매리의 남편이었다. 부부는 신교도였다. 윌리엄公은 프랑스의 루이14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영국王 자리에 앉게 되면 對프랑스 연합전슨을 꾸미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영국 議會는 윌리엄公이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 제임스 2세를 추방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윌리엄公이 이끄는 1만5000명의 네덜란드軍은 영국에 상륙했다. 영국군의 신교도 장교들은 침공군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탈영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왕 제임스 2세는 勢가 불리함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영국 의회는 윌리엄公과 매리에게 의회가 결의한 '권리 선언'을 받아주면 왕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한다. '권리 선언'의 핵심은, 議會의 同意 없이는 왕이 課稅나 법률의 집행을 하지 못한다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1689년 '권리 장전'이란 이름으로 공포된다. 왕이 主權을 의회에 넘긴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윌리엄 3세-메리 2세 공동王이 등장하였다. 1688년에 이뤄진 이 쿠데타를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無血 혁명이란 의미이다. 1642~1688년 사이 46년간 벌어진 內戰, 王의 처형, 王政 복구, 크롬웰의 剖棺斬屍를 감안한다면 無血이란 표현이 맞지 않다.

 

영국은 유럽에서 맨 처음으로 국민들이 王의 목을 친 나라이다. '전쟁 없이는 국민국가가 없고, 혁명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대로 국민이 王의 목을 친 혁명을 맨 처음 치른 것이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그 150년 뒤, 독일은 270년 뒤 왕의 목을 치거나, 왕을 추방하였다.

 

한국에선 1960년 4월에 국민들이 권력자를 민중봉기로 몰아내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인들이 17세기에 한 일을 310년 뒤에 한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王의 목을 치지 못하고 있다.

 

비록 剖棺斬屍당했지만 크롬웰의 역사적 기여에 대한 평가는 파묻을 수 없었다.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크롬웰을 영국 最高의 영웅으로 평가하였다. 미카엘 H. 하트라는 사람이 만든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대 인물 랭킹'엔 크롬웰이 41등에 올랐다. 국민의 이름으로 王의 목을 친 사건은 절대왕조의 弔鐘이 되었다. 이는 議會와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가는, 인류의 민주주의 대장정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