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란 - 우리의自畵像
육.이오 한국동란이 발발한지 어언 59년 - 두번다시 기억하기도 싫지만,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불과 반세기전 우리의 自畵像이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피비린내는 살육의 현장들이 그 때는,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처참한 몰골로 야생초처럼 끈질게 견뎌온 모진 생명들... 불과 반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너무 빨리 이 아프고도 소중한 기억들을 까맣게 망각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사진들은 알바니아 태생으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1902~1990)가 駐日 美극동사령부 사진반에서 일할 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촬영한 것이다.
▲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한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다.
▲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 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가족의 한 끼 식사일까, 아니면 땔감일까?
▲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하여 "의지의 한국인"을 세계에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 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이 민족의 처절한 단면이다.
▲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하는 이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 개털모자에 항공모함 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