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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통 하나면 종합병원” ‘한국의 화타’ 김남수

풍월 사선암 2009. 1. 9. 21:46

“침통 하나면 종합병원” ‘한국의 화타’ 김남수

 

빈부도, 남녀도, 노소도, 신분도 초월하는 것이 침뜸. 병 걱정보다 돈 걱정이 앞서는 환자들의 고통을 우리 민중의술로 달래줘야 한다는, 침술의 대가 김남수 선생. 

 

새벽 네 시가 채 못 된 시간, 서울 청량리 남수침술원 앞길이 차들로 북적댄다. 영하의 날씨건만 전날 밤을 차에서 보낸 이들도 있다. 경상도, 제주도, 미국에서 온 교포까지 모두 침 치료를 받기 위해 먼 길 달려온 이들이다. 번호표를 받은 이들은 다행이지만 접수를 못한 이들은 발을 동동 구른다. 환자가 없어 문 닫는 병원들도 많은 시대에 찾아온 환자들을 다 받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의사가 대체 누구일까.   


“내가 새벽 여섯 시부터 낮밥 한술 먹는 십여 분 빼고는 열두 시간 진료를 해도 하루에 오십 명밖에 못 봐요. 울릉도에서 아픈 어머니를 업고와 우는 사람, 손자가 입이 돌아갔다고 울며 매달리는 할머니. 해결할 방도가 없어서 <나의 고통을 호소합니다>라는 글을 써 붙여놓고 폐업을 해버린 적도 있어요. 하지만 아픈 사람 영영 외면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빨리 침구사법이 부활되어야 해요. 이분들,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침뜸의 효능을 찾아온 것이거든요.”


줄선 유료환자 대신 일주일에 사흘 이상 무료진료 나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다 살피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유료 환자들이 줄을 서 있어도 일주일에 사흘 이상 침술원 문을 닫고 무료진료에 나서는 사람, ‘한국의 화타(華陀)’, 침구분야의 세계적 명의로 손꼽히는 구당 김남수 선생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환자들이 그를 찾아오는 걸까. 경쟁률을 뚫고 그의 침술치료를 받는 이들을 만나보았다. 지독한 어깨통증으로 외과병원을 찾았다가 어깨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권유받았다는 60대 미국 교포다. 


“어깨뼈를 자르자고 하더란 말이죠? 글쎄 뼈를 잘라야 하나….”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을 놓는다. 통증이 너무 심해 수술을 받긴 받아야겠는데, 수술이 두려워 통증을 참아왔다는 환자는 한 시간쯤이 지나자 얼굴이 환해졌다.

 

 

“신기하네. 진통제로도 안되던데, 어깨가 너무 개운해요. 선생님 내일 또 와도 되나요?”

 

“오는 것은 맘이지만 집에서 뜸을 떠보세요. 정성 들여서. 내가 뜸자리를 잡아줄 테니..”

 

사인펜으로 뜸자리를 표시해 준 다음, 쑥 5천원 어치면 서너 달 뜸을 뜰 수 있으니 집에서  부지런히 뜸을 뜨면 좋아질 거라 이른다. ‘병’ 고치는 데는 ‘돈’이 먼저라는 생각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제대로 걷는 것을 포기하고 5년 정도 수명의 쇠심 박는 수술을 해보자는 권유를 받았던 할머니 한 분은 선생의 침뜸 치료를 받고는 마당도 잘 쓸고 시장도 다닌다고 하셨다.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절망에 빠졌던 이들, 암환자들도 적지 않다.


“서양의학은 몸에서 병인을 제거하는 의술이죠. 하지만 침뜸은 스스로 치유할 기운을 북돋고 저항력을 길러줍니다. 화상(火傷)을 예로 들면, 고통도 크고 흉도 크잖아요. 그런데 침 치료를 하면 흉터도 남지 않고 고통도 크게 줄일 수 있어요. 우리의 침뜸, 전통의술의 장점이 있습니다. 재권력과 자본주의 의술이 결탁해서 없어버린 우리 민중의술을 빨리 살려내야죠.”


병 걱정보다 돈 걱정이 앞서는 환자들의 고통을 우리 민중의술로 달래줘야 한다 말씀하시는 선생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침술의 대가로 살아온 일평생이었지만 선생이 겪어온 시대는 우리 전통의술인 침과 뜸의 맥이 끊어지는 고통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장준하 선생 치료…‘실족사’에 의문 제기 

 

1915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의원이셨던 아버지에게서 침을 배웠고, 43세에는 남수침술원을 개원했다.


“아버지는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고 늘 말씀하셨죠. 하지만 진짜 의사는 침과 뜸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약이 필요하다 싶으면 처방전을 적어 주어 탕약방에서 먹게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약은 차로도 마실 수 있고, 밥으로도 먹을 수 있으니 환자 형편에 따라 먹는 것 아닙니까. 탕약값은 비싸지만 침뜸은 빈부도, 남녀도, 노소도, 신분도 초월합니다. 약은 사실 자신의 오장육부에 들어있는 것이니 침통 하나면 종합병원이에요.”


선생의 침술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이야기가 퍼질 정도였다. 덕분에 고위관료들, 권력층들의 진료도 많이 했다. 북한산에서 실족사했다는 장준하 선생도 구당 선생의 환자였다.


“제기동 사글세 집에 장선생 왕진을 갔는데 기침도 하기 힘들 정도로 디스크가 심했어요. 몇 번 치료를 하니 방안을 왔다 갔다 할 정도가 됐는데 아, 얼마 뒤 산에서 실족사를 했다는 겁니다. 그 양반은 혼자 산에 갈 수 없는 몸이었는데, 어떻게 실족사를 하냔 말이죠. 나는 의술자로서 장선생의 상태를 몇 차례 이야기를 했지만 내 이야기를 덮어버리더군요. 최근에서야 민주화진상규명위원회인가 하는 데서 내 이야기를 들으러왔었어요.”


박정희정권이 전통의술 죽여”

 

선생이 잊지 못하는 또 한사람의 환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박정희정권이 62년 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양의들 말만 듣고 침구사 제도를 법적으로 막아버렸잖아요. 절망스런 상황이었는데 마침 정보부장 김재규가 내 환자였어요. 간이 많이 나쁜데다 심장에 화가 몰려 있어서 불면증이 심했지요. 침뜸을 해주면 깊은 잠을 자니 매일같이 정보부로 나를 불러들였어요. 부마사태 때는 차지철이가 200만을 죽이면 된다고 말하더라면서 분통을 터뜨리던 기억이 나요. 나는 민심이 천심이다, 제대로 민심을 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재규씨도 동의를 하더군요. 신뢰가 생기자 나는 침구사제도의 부활과 침구대학 설립문제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10월30일에 박대통령과 면담약속을 받아놨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그런데 10월26일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김재규는 우발적으로 일을 저지른 겁니다.”


우리 전통신앙을 미신으로, 침이나 뜸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경멸했던 박정희정권의 편견은 전통의술의 숨통을 조여왔고, 침이나 뜸으로 사람을 살려내고도 감옥에 가야 하는 고발고소사건들이 이어졌다. 탄원서, 성명서가 책상 서랍에 가득했지만 법은 우리 전통의술을 고사시켜갔다. 


“자격증 갖고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 의사들이 자격증 없이 사람을 살려내는 침구사들을 고발하는 일이 빚어진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은 침뜸을 제도권 안에서 육성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침뜸의 본고장인 한국은 서양의 장비의술에만 의존을 하게 된 거죠. 전문 침술인들을 없애고 보니 의료개방도 두려운 것입니다. 전통의술을 부활시켜서 손재주 뛰어난 우리나라 사람들을 전문 침구사로 양성시켜 놓으면 의료개방을 해도 우리가 유리할 겁니다. 지금의 한의대는 침뜸보다 탕약공부에 치중해와서 침뜸 분야의 발전이 되질 않고 있어요. 가장 손놀림이 우수한 우리민족이 가장 소중한 의술을 스스로 사장시킨 거죠”

 


 

“침뜸 살려내면 돈 때문에 치료 못 받는 사람 없어질 것”

 

늦은 시간, 남수침술원을 찾은 환자 가운데 세계생명문화포럼 이사장 김지하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2007년 미국에서 열릴 세계생명문화포럼에 김남수 선생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사실 한류의 가장 경쟁력 있는 브랜드는 우리 침뜸이죠. 구당 선생은 그걸 지켜오셨어요. 구당만세! 침뜸 만세입니다.”

 

선생의 침술원에는 지금도 침구사법 부활을 위한 서명용지가 놓여있다. 93년에는 전국 마을 이장들에게 우편료만 1300만원을 들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허준이 명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그 양반은 동의보감이라는 책에 약재에 관한 섬세한 기록을 남겼지요. 하지만 허준은 침을 몰랐고, 허준이 못 고친 임금의 병을 침으로 고친 이가 허임입니다. 우리시대에 허임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의학공부도, 복잡한 장비도 필요없고, 그저 배워서 남을 살릴 수 있는 우리 침뜸을 살려내면 돈 때문에 치료 못 받는 사람은 없어질 거에요. 그래서 이장님들께 호소문을 썼었죠.”

 

하지만 답변이 없어 허탈했다며 선생이 웃으신다. 그 뒤로 직접 써 붙여 둔 ‘배워서 남주자’라는 글귀가 보인다.


“우리 뜸사랑 봉사회원들이 일년에 12만 명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침뜸 봉사를 합니다. 내 몸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고, 더불어 남의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을 덜어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잖아요. 마을마다 뜸방을 만들어서 서로 살펴주고 아껴주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꿈입니다. 그렇게 아껴주면 병도 줄고, 아픈 사람도 줄겠지요.”

 

그 어떤 보험상품이 이토록 건강한 마을,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줄 것인가. 아흔 셋 노의사의 희망은 너무도 절절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