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경복궁은 웅장하나 명당은 바로 창덕궁"
조선을 대표하는 양대 궁궐, 경복궁과 창덕궁은 남성적인 궁궐과 여성적인 궁궐로 비유 비교된다. 무엇보다 두 궁에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라는 부자(父子) 간의 애증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더 애틋함을 자아낸다. 이성계는 창업군주로 자기 위엄을 과시하고 종묘사직의 번창을 기원하며 경복궁을 지었다. 그러나 바로 경복궁에서 난을 일으켜 아버지의 측근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고 이복동생들까지 죽인 이방원으로서는 경복궁이 결코 흔쾌한 공간일 수 없었다.
그가 집권한 이후 개경으로 재천도를 추진하고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한 후 태종 4년 서둘러 창덕궁이라는 이궁(離宮)을 지은 것도 풍수지리설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실은 피의 장소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불교뿐만 아니라 풍수를 철저하게 배격했던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태종 이후 정궁(正宮) 경복궁은 국왕들의 주된 활동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의례(儀禮)를 위한 공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창덕궁(昌德宮)비원포함(秘苑包含)
창덕궁의 인정전은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준공됐다. 이후 세종은 상왕 태종이 생존해 있던 4년간 줄곧 창덕궁을 주궁으로 삼았다. 원래는 피병(避病) 목적으로 세운 창덕궁인데 세종은 궁인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 경우에만 경복궁으로 잠시 이어(移御)했을 뿐이다. 주객(主客)이 전도된 것이다.
세종이 창덕궁에 머문 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종4년 5월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10월3일 경복궁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못지않게 할아버지에 대한 배려였다. 이 무렵 세종은 세자(훗날의 문종)에게 경복궁과 창덕궁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 적이 있다.
"경복궁은 비록 장려(壯麗)하나 이 도성의 명당은 바로 창덕궁이다."
하지만 정작 세종 자신에게 창덕궁이나 경복궁은 늘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았는지 모른다. 말년의 세종은 막내아들인 8남 영응대군의 사저인 동별궁을 지을 때 한쪽에 자신이 머물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여기에 머물면서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만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찾았다. '아니되옵니다'를 반복해대는 신하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결국 세종은 자신의 최후도 궁궐이 아닌 영응대군의 집에서 맞았다.
▲ 경복궁(景福宮)
그러나 이후 경복궁은 정궁으로서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세조 1년(1455년) 윤6월20일 그동안 계유정란을 일으켜 영의정에 머물러 있던 수양대군이 마침내 왕위에 올라 경복궁을 차지하고 조카인 단종을 노산군으로 낮춰 창덕궁으로 옮겼다. 세조 7년에 왕세자빈이 병이 들어 잠시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도 했지만 세조 때 정궁은 기본적으로 경복궁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노산군이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창덕궁을 본궁으로 사용하면서 경복궁에 세자가 머물도록 했다. 이후 세조는 특히 창덕궁의 후원이 좁다 하여 인근 민가 73채를 헐고 확장공사를 한 다음 유구국(오키나와)에서 선물로 보낸 물소 2마리도 키우고 신하들과 수시로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늘 술자리에서 정사를 논했다 하여 학계에서는 세조의 정치를 '주석(酒席)정치'라고 부른다. 심지어 세조11년(1465년) 9월14일에는 믿기 힘든 사실도 기록돼 있다.
"창덕궁 후원에 범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쫓아가서 드디어 북악에 가서 범을 잡고 돌아왔다."
이후 경복궁과 창덕궁의 관계는 세종이 말했던 바대로 창덕궁을 기본으로 하면서 경복궁은 행사와 의례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경복궁의 첫 번째 큰 시련은 명종8년(1553년) 9월14일의 대화재였다. 태조 때 건축된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 등 궁궐의 핵심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실록은 "조종조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진보(珍寶)와 서적 등이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그에 비해 창덕궁은 세종이 지적한 대로 풍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큰 화재를 입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도 경복궁은 전소(全燒)됐지만 창덕궁은 부분 파손에 그쳐 광해군 초에 곧바로 중수됐다. 이후 경복궁은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중수할 때까지 힘없는 왕실을 상징하듯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오랜 논란 끝에 대원군은 6년여 공사 끝에 고종9년 경복궁을 중수했다. 전소된 지 270여 년 만이었다.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경복궁 중수로 고종의 왕권(王權)은 강화됐지만 결국 고종 때 국권(國權)을 잃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