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교실/명리학

우리문화 우리풍수 | 여주 세종대왕릉

풍월 사선암 2008. 7. 31. 16:09

[우리문화 우리풍수 | 여주 세종대왕릉]

한양 100리 밖 뱃길로 하루 행차 길

 

 

< 조선 왕릉 가운데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세종대왕릉인 영릉 전경.>

 

조선시대 왕릉은 대부분 도성(한양) 100리 안에 있었다. 당시 왕의 하루 행차 최대 거리가 100리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새로운 장지를 찾기보다는 기존의 무덤 가운데 좋은 자리를 찾아서 ‘재활용’했다는 점이다. 이때 도성 100리 안에 있는 무덤으로서 과거급제자를 많이 배출하고 장수하는 집안이 1차 심사 대상이었다.


그런데 세종대왕릉인 영릉은 도성에서 100리 이상 떨어진 경기도 여주에 위치해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세종대왕릉인 영릉 전경.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관행을 무시하고 그렇게 먼 곳에 자리하게 됐을까.


세종은 생전에 풍수를 신봉 “풍수지리설을 외면할 수 없다”고 했고, 아들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풍수를 배우게 할 정도였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역시 풍수를 신봉했다. 그런데 아들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갑자기 죽고 자신도 고질병에 시달리는 등 왕실에 불행한 일이 잇따르자, 조정에서는 헌릉(태종릉) 옆에 있던 부왕 세종대왕의 무덤(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 부근)이 좋지 않다는 등의 논란이 벌어진다[훗날 이장을 하려고 광중(壙中)을 열어보니 실제 안 좋은 상태였다]. 세조도 천묘(遷墓)를 염두에 두었지만, 일부 대신이 반대를 하고 마땅한 묏자리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중 죽고 만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지관 안효례를 중용한다. “특별히 풍수학인 안효례와 최호원을 중용하라”는 세조의 유명에 따른 것이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안효례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세조의 능 선정뿐 아니라 세종의 이장 후보지를 찾게 한다.


안효례는 풍수는 물론이고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어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같은 당대의 학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등 세조에게서 인정을 받았던 풍수학인이었다.


안효례는 세종릉 후보지로 여주의 어느 무덤을 추천했다. 본래 이 자리에는 대제학 이계전과 우의정 이인손 부자의 묘가 있었다. 이계전은 고려 말 이색의 손자로서 명문가를 이루고 있었기에 그의 무덤터는 왕릉 후보지로서 더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후보지를 찾는 일에 동행했던 대신들 가운데 정인지 등이 안효례의 풍수 실력에 의문을 제기, 벌줄 것을 효종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효종은 안효례의 의견을 받아들여 세종의 무덤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한다. 문제가 된 것이 도성 100리 밖에 위치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양에서 이곳 여주까지 배로 하루에 오갈 수 있다는 논리로 넘어간다. 훗날 효종 무덤이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소재)에서 영릉 근처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선례 때문이었다.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무덤을 여주로 옮기게 한 뒤, 이인손의 장남 이극배를 정이품으로 승진시켜 조상 묘지를 넘겨준 데 대한 보상을 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안 좋았던지, 아니면 또 다른 운명 탓인지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당시 나이 스물이었다. 우연하게도 요절한 형 의경세자와 같은 나이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벌을 그가 받은 것이라고 했다. 짧은 재위기간 때문에 예종은 많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부왕의 능을 조성하고 이미 부왕 때부터 추진하고 있던 세종의 능을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생긴 여주 영릉에 대해서는 풍수사들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대개는 ‘조선 왕릉 가운데 최고의 명당으로서 바로 그 자리 때문에 조선 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英陵加百年)’는 찬사를 했으나, ‘주산에서 혈장에 이르는 산능선이 일직선으로 힘없이 내려와 기가 생동하지 못하고 청룡 끝(현재 기념관 자리)이 배반함으로써 수구를 벌어지게 했으며, 그 결과 기가 모이지 않는다’고 흠잡은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여주 영릉은 당시 최고의 풍수학인 안효례가 잡은 자리지만, 예종이 스무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 왕실의 불행을 막지는 못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