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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숨겨진 남자'였다

풍월 사선암 2008. 7. 2. 12:24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숨겨진 남자'였다

정조대왕 '을묘원행도'

 

▲ 장용원 마작대장과 군졸들

 

장용영(壯勇營)은 정조가 장용위를 확대 개편하여 새로 만든 친위부대다. 경호실은 대통령을 근접 경호하고 수경사는 청와대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과 수경사 혼성부대쯤 될까. 그 부대에서 특수 임무를 띤 팀이 장용영 마작대다.


정조대왕은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 수구세력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막강 친위부대를 조직했다. 그들로 하여금 갑대는 자신을 호위케 하고 을대는 왕이 자리를 비운 창덕궁을 경비하게 한 것이다.


장용영은 수구세력에 대한 정조대왕의 무력시위


▲ 병조판서 


장용영과 대조적으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병조판서가 그려진 부분이다. 반차도라는 문자가 말하듯이 반차도(班次圖)는 어떤 행사에 참여한 벼슬아치들의 행사참석 순서와 서열을 기록한 그림이다. 때문에 반열도(班列圖)라고도 부른다.


정조대왕 반차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 나라의 병권을 쥔,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가 제일 뒤에 초라하게 따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수구 벽파세력과 군왕 정조와의 갈등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화성에 도착한 정조는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2월11일) 우화관에서 문과시험과 낙남헌에서 무과시험을 치러 56명의 젊은 엘리트를 합격자로 선발했다. 다음날(2월12일)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참배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왔다. 혜경궁홍씨 역시 지아비를 잃고 지내온 32년 세월이 감회가 새로웠다.


만인지상 임금이 무릎 꿇고 술잔을 올리다


▲ 자궁가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탄 가마 


다음날(2월12일).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가 벌어졌다. 왕실 가족과 문무백관 신하들은 물론 화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까지 초청하여 베풀어진 대규모 연회였다.


대궐에서 데려온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잔치에서 만인지상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홍씨 앞에 무릎 꿇고 술잔을 올렸다. 감동적인 모습이 펼쳐진 것이다. 보기 드문 장면을 지켜보던 백성과 신하들이 감격했다.


2월 14일. 나이든 노인들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었다. 연회에 참석한 노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도록 하고 비단을 하사했다. 이렇게 즐거운 날 작은 불상사가 벌어졌다.


누더기 옷을 입은 노인이 출입을 제지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정조는 대노하여 입장을 제지한 군졸을 벌하고 자리에서 몸소 일어나 노인을 맞이했다. 돌아가는 노인들에게 신풍루에서 쌀을 나누어 주었다.  


▲ 내시도  행사에 참가했다. 완전무장에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당당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접했던 내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왜곡되었다.


임금님이 몸소 일어나 노인을 맞이하고 돌아오는 날. 용양 봉저정에서 점심 수라를 들고 미륵현에 당도했을 때, 말고삐를 움켜잡은 정조가 말을 세웠다. 먼발치에 보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시야에서 멀어지려 하자 아예 행차의 대열을 세워버린 것이다.


말에서 내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훗날 정조가 현륭원을 바라보며 서성이던 자리를 지지대라 명명하고 오늘날까지 지지대 고개라 전해져 온다.


창덕궁에 돌아온 정조는 국가에서 처음 행한 거대의식을 차질 없이 거행한 모든 이에게 푸짐한 상을 내렸다. 신하는 물론 낭청과 아전 그리고 장교와 나졸에 이르기까지 포상하고 특히 민폐 없는 행사를 치러낸 정리소 관원들을 치하했다. 수많은 인원과 군마가 동원된 대규모 행차가 대과 없이 마무리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숨겨진 남자였다


▲ 어보마 


상을 받은 관리는 다음과 같으니 총리대신 채제공, 우의정 홍낙성, 광은부위 김기성, 정리소당상 심이지, 경기감사 서유방, 호조판서 이시수, 부사직 서유대, 서용보, 윤행임이다.


병조 참지 정약용은 철저히 숨겨진 왕의 남자였고 장용영 제조 이명식은 그림자 같은 왕의 남자였다. 반면에 병조판서 심환지는 철저하게 소외된 왕의 남자였다.


해마다 이루어지는 능행이었지만 을묘 원행은 달랐다. 혜경궁홍씨의 회갑연과 겹쳐 있었고 사상최대의 인원을 동원했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다보니 허점이 많았고 그것을 노린 것이 수구세력이었다.


행사를 무사히 치른 안도감에 해이해져 돌아오는 길을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한 장용영마작대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은밀히 덫을 놓아 일망타진하자는 대장의 건의를 묵살했다. 뜬 구름 잡는 듯한 정보의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홀로 사는 어머니를 위하여 치른 성대한 회갑잔치 뒤에 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장용영 마작대 군졸들


정조 임금은 일이 터진 다음에 피타작보다도 예방을 중요시했다. 그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정공법으로 나가도록 명했다. 밀명을 받은 마작대는 능행길 모든 여정을 조선 최고의 무술을 연마한 장용영 마작대가 철통 경비한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노량진 배다리에도 배를 징발한 지역(호남)의 선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리게 하고 마작대 군졸들이 승선하여 경비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공격이 최대의 방어다' 정공법으로 나가라


▲ 훈련대장 


뿐만 아니라 배다리를 가설한 강물 속에도 바다에서 물질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샅샅이 수색하고 입초 서게 한다고 소문을 냈다. 일종의 심리전인 셈이다. 공격이 최대 방어라는 개념이 주효했음인지 지레 겁을 먹은 반대세력은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있을 수 있는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며 목숨 걸고 감행한 화성행차. 만조백관과 만백성들에게 효와 충의 의미를 되새겨 준 성대한 행차. 화성을 다녀온 정조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고 음해하려던 수구세력은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음모의 칼끝을 정면승부로 분쇄해버린 정조.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군주였다. 그렇지만 정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서서히, 차근차근, 노론 수구세력을 척결해 나갔다. 그것이 탕탕평평 정책이다.


"붕당이라는 우리에 갇혀있는 나라의 재목을 끌어내어 국가에 봉사하게 하라."


▲ 행차에 참여했던 약물대령의관  


당이라는 협소한 울타리에 갇혀 당쟁을 일삼는 선비들을 정조는 소인배로 보았다. 정조 임금은 당 위에 나라가 있고 나라 위에 백성이 있다는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이렇게 탕평책을 쓰던 정조는 1800년 6월.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아까운 나이다.


등허리에 종기가 나 발병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노론 벽파와 선이 닿아 있는 내약원(內藥院) 심인은 연훈방(烟燻方)을 처방하고 오뉴월 삼복더위에 수은을 태운 증기를 쏘이며 누워있어야 했던 정조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 과정에서 정조의 온갖 장기 오장육부는 수은 중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 영춘헌. 정조가 숨을 거둔 곳이다. 창경궁에 있으며 편액은 정조 어필이다. 


정조 역시 한약재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평소에 자신이 스스로 처방하여 내약원에 명을 내려 약을 지어 올리라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즈음도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명의가 병이 나면 다른 의사의 처방과 치료를 받는 것처럼 심신이 허약해진 정조는 내의원의 진맥과 내약원의 처방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왕대비가 물러나온 후 곡소리가 퍼지다

 

 

 

▲ 정조대왕 친필 수결 

"내 몸소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올릴 터이니 경들은 물러나 있으시오."


6월 28일. 모든 대소 신료를 물리치고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영춘헌으로 들어갔다. 승지와 사관도 배석하지 않았다. 법도에 어긋났지만 누구하나 제지하는 이 없었다. 정순왕후가 영춘헌을 나온 후 곡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오라비가 정조에 의해 숙청되었던 정순왕후는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립관계에 있는 사이였다,


"독살이다. 아니다."

"수은 중독사(死)다. 아니다."


말들이 많지만 등허리에 종기가 난 것이 발병 원인이 되어 숨을 거둔 정조는 임종했을 때 앞가슴과 얼굴에 수은 중독으로 추정되는 검은 반점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지만 확증은 없다.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이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


수구세력이면서 자신을 추종하던 김희가 이탈하고 전폭적인 신뢰를 아끼지 않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자신을 비판한 것이 병이 되었을까? 지난달(5월)에 앞으로의 정국구상을 밝힌 오회연교(五晦筵敎)가 자신의 생명을 재촉했을까?


정조가 승하한 후 정조의 아들 순조가 11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정조의 위세에 숨죽이던 노론 벽파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정조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세력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분명 수구세력이다. 정조가 죽지 않고 오회연교가 실천되었다면 노론 벽파는 핍박과 고통을 받아야 했고 신진 엘리트로 부상한 정약용이 영의정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흘렀다. 때문에 독살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평소에 목이 메게 기리던 아버지 옆에 잠들어 있다. 화성에 있는 건릉이다. 조선 개국 이래 몇 안 되는 성군을 잃은 조선은 이로부터 망국의 길로 줄달음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