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현대문학> 2008년 4월) - 박경리의 마지막 詩
´토지´ 박경리, 흙으로 돌아가다
한국 문단의 대모이자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朴景利)씨가 5일 오후 3시쯤 폐암 투병 중 타계했다. 향년 82세.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씨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소설가 김동리에 의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쟁’ 등을 발표했다. 박씨는 1969년 한국문학사의 가장 큰 수확으로 여겨지는 ‘토지’를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 ‘문학사상’, ‘월간경향’ 등 매체를 옮기며 집필했고 1995년 8월 장장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 장 분량의 대하소설을 탈고해 한국 현대문학에 금자탑을 세웠다. 1950년 남편 김행도 씨와 사별했으며, 유족은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