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게 부치는 편지
잘 있느냐 지난 여름은 화려하였나니 어느 궂은 날의 지루한 장마는 온 몸으로 축복하며 마중하고 맑게 개인 날은 차마 어쩔 수 없는 무더위에 애통하며 끓어 오르는 열기 더불어 통곡하였나니
밀알이여 햇빛 충만하여 윤기 흐르는 한 잔의 술과 꽃을 다오 삐딱하게 바라보는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때가 찼으니 살 진 들판의 알곡은 다 들이지 마라 모두가 가꾸는 이의 몫은 아니로되 반은 들판 저의 것이요 날으는 새들의 철 모르는 새참이며 게걸음 인생들이 수고하는 이삭줍기러니
하늘이시여 저희 두 손에 받든 잔이 넘치나이다
사랑을 찾아 나는 미친듯이 떠돌았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드넓은 숲과 깊은 늪 에워 싸인 까닭에 시건방진 풍향계와 분별력은 우둔하여서 시조 할부지 주목 그늘 아래에 스러져 갈 뿐이더니 오롯이 하늘만 올려다 보며 목숨을 다하는 간구함으로 지친 육신의 감옥을 허물고 혼이라도 기어나와 이제 쉴 만한 물가에 다가서서 녹슬은 청춘의 닻을 내릴지니 들 뜬 구름떡과 속 빈 과자 엉성하게 버무려 놓은 마흔 다섯 해 고단한 짐 보따리 가볍게 풀어 헤칠지라
내일은 바람 빠진 넋을 갈무리 하러 산에 오르는 초라한 파수꾼이란다
잘 있거라 누구나 아름다운 단풍옷 질투하여 천지사방을 불 태우는 가슴 벅찬 재회를 으스러지도록 품에 안고 긴 겨울잠의 차디 찬 노을빛으로 사위어 가노라니 거칠게 대륙을 업고 달려와 오히려 서늘한 바람아 너와 뒤엉켜 살지 아니하면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으다
바람이 일면 뒤이어 눈이 내리고 봄이 가까이 있다는 기별도 믿을 거 같으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바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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