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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사람]북한산 500번 오른 정왕원씨

풍월 사선암 2007. 9. 7. 09:59

[이런사람]북한산 500번 오른 정왕원씨

 

‘서울의 지붕’ 북한산의 가을이 깊다. 곱게 물든 단풍은 벌써 5부능선까지 내려왔다. 이번 주말이나 내주 초에는 형형색색으로 절정을 이룰 것이다. 주봉이자 해발 836m의 서울 최고봉 백운대에 올라서면 머리가 한없이 맑아진다. 고민도 욕심도 없어진다. 생각마저 사라지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참선 삼매에 빠진 수행자들이 이런 느낌일까. 북한산이 좋아 500번 넘게 오르고 있다는 정왕원(56)씨.


본업인 택시 일이 무척 피곤하고 경기마저 안 좋아 힘들지만, “그래도 북한산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산은 인간에게 소박함과 겸손을 가르치며 어머니 품 같은 안식처가 돼준다.


북한산은 정씨에게 그런 존재다. 그가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는 것도, 자칭 ‘북한산 알림이’라는 별칭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북한산에 배운 지혜일 것이다.


“북한산은 전국 명산의 장점은 다 갖다 놓은 곳이지요.”


강원 철원에서 달려온 한북정맥은 도봉산에서 한번 몸을 일으켰다가 우이령에서 누인 후 북한산에서 마지막으로 크게 용솟음친다.


멀리서도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한눈에 드는 자태로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삼각산으로 불렸다. 북한산은 산세가 웅장하다.


노적봉, 영봉, 비봉 등 이름난 봉우리만 40개가 넘고 정릉, 우이동, 세검정 등 수십개 계곡은 사계절 장관을 이룬다. 봄의 진달래능선, 운해로 뒤덮인 백운봉, 대동문 아래 가을의 억새밭, 겨울철 나뭇가지에 핀 눈꽃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능선 8㎞에 뻗어 있는 북한산성이 굳건하게 산세를 떠받치고 있다.


서울 어디에서든 교통카드 한 장이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 북한산은 정씨에게 건강뿐 아니라 용기와 안분지족을 동시에 가져다준 곳이다.


그는 15년 전 양돈업에 실패하고 상경해 우이동에 터잡던 때를 회상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하고 대인공포증까지 가졌던 그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길도 모른 채 처음으로 북한산 정상에 올랐다가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뭐든 할 것 같은 에너지가 온몸에서 샘 솟듯 했다.


정씨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각오를 다지며 직장을 잡았다. 그러고선 본격적으로 북한산 산행을 시작했다.


“북한산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서 얼굴이며 행동거지, 옷차림, 생각까지도 바뀌는 것을 보았지요.” 산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얼굴빛이 평안하고 생각이 여유롭고 예민하지 않단다. 친구 사이에 우정도 깊어지고 부부 사이의 금실도 돈독해진다고 한다. 정씨는 이러한 내면의 변화를 북한산에서 느꼈고 다른 사람의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 1회꼴로 산행을 한다. 산을 타면 일주일이 그렇게 거뜬할 수 없다. 북한산을 자주 오래 탔기 때문일까, 정씨는 나이보다 10살은 젊어 보인다. 자신감도 넘친다. 정씨는 “쉬는 날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고스톱이나 즐기는 동료는 더 늙어 보이고 병치레를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백운대에 오르는 순간 세상 부러움도 아쉬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몸으로 안다. 자신을 버텨 줄 한없이 너그럽고 큰 힘이 몸속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씨는 욕을 먹건 말건 택시 타는 손님에게 무조건 “북한산에 가라”고 권한다. 북한산에 오르는 순간, 여유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를 500번 이상 올랐다는 정왕원씨(사진 위)는 “1주일에 한번 정도는 무조건 산을 오르자”고 권장한다. 산에 오르는 순간 건강은 시작된다는 것. 특히 북한산은 “전국 명산의 풍광과 아기자기한 코스를 다 갖다 놓은 곳”이라고 극찬했다. 깊어가는 가을날 백운대 정상에 서니 단풍이 물든 암봉에서 클라이밍을 즐기는 등산객과 멀리 서울 북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김창길 기자


산은 그에게 하늘 아래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땅에서 기는 사람도, 하늘을 나는 사람도 산에 올 때는 모두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러기에 산에선 인간의 높고 낮음이 없다. 가끔 산행길에 회사 사장이나 임원들이 부하 직원들에게 거드름피우는 것을 보면 한 소리를 한다.


“산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배우세요!” 산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그는 ‘서울의 허파’인 광활한 북한산 숲과 아기자기한 백운대 경치를 가리키며 “서울 시민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는 등산에 자신이 있다고 해서 어려운 코스를 택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취미생활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못박는다. 세 봉우리 중 백운대와 만경대는 초보자도 오를 수 있지만, 인수봉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거니와 자일에 의존해야 한다.


만경대도 대동문에서 오르는 코스는 등산로가 없다.


그래서 손바닥으로 탁탁 치는 반동을 이용해 이동하는 ‘피아노 바위’를 통과해야 하는데,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누구나 갈 수는 있다고 한다. 자신도 두어 차례 리지(암릉) 타기를 해 봤지만 위험도가 높아 더 이상은 삼간다고 했다. 피아노 바위를 수십 번 올랐던 잘 아는 전문 산악인이 그 바위에서 추락사했다는 말을 듣고 새삼 산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산에서 오만해지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라고 정씨는 생각한다.


그는 숱하게 시행착오를 했던 경험에 비춰 기왕 산을 찾을 바에는 옷이나 등산화는 좋은 제품을 구입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기능성이 뒷받침되는 장비를 갖춰야 쾌적함과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택시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과 그윽한 커피 향이 흐른다. 으레 담배 냄새가 날 줄 알고 택시를 탔던 손님들이 분위기에 취하면 그때를 놓칠세라 ‘북한산 전도’를 시작한다. 그에겐 택시 모는 게 생업이지만 북한산을 알리는 일도 주요 일과다.


북한산은 20여곳의 매표소가 말해 주듯 등산로가 다양하다. 그 중에 우이동, 정릉, 세검정, 구파발을 기점으로 하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어느 코스를 택하건 북한산성 성문 중 하나인 위문을 거쳐야 한다. 위문은 북한산의 8부 능선쯤 되며, 가파르게 놓인 백운대 정상을 향해 마지막 숨을 고르는 곳이다.


신 부재로 복원된 성곽이 다소 눈에 거슬리지만, 50년이나 100년 후 산을 찾는 사람에게는 옛것이나 새것이나 구별이 안 될 만큼 닮아 있으리라.


그에게는 꿈이 있다. 북한산 1500번 등산 기록을 세우는 일이다. 매주 한 번씩 오르면 10년이면 500번을 오른다. 지금 500차례를 올랐으니 앞으로 20년을 꾸준히 올라야 한다. 이유는 없다.


그저 산이 좋고 그 중에서도 북한산이 좋기 때문이다. 기어오르는 게 등반이니, 때가 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인수봉을 기어서 오르고 싶다.


욕심을 부리자면 서울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 코스를 무박으로 종주하는 것이다.


정성수 기자 hulk@segye.com